최승희의 남편 안필승은 왜 필명을 가지게 됐을까? 안막이라는 필명은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모방한 것일까? 안막이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을까?
최승희는 1931년 5월 9일 안필승(安弼承, 1910~?)과 결혼했다. 오빠 최승일과 그의 친구 박영희가 중매한 결혼이었다. 최승희와 안필승은 만난 지 약 3개월의 데이트 끝에 청량리의 요리점 <청량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경성일보>와 <조선신문>,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일간지뿐 아니라 <별건곤>과 <삼천리> 등의 월간 잡지들도 최승희의 결혼 뉴스를 보도했다. 하루 전인 5월 8일은 덕혜옹주의 결혼일이었기 때문에 미디어와 세간의 관심은 상당한 부분 그리로 쏠렸음에도 불구하고 최승희의 결혼 소식도 관심을 잃지 않았다.
특히 사람들의 관심은 신랑이 누구인지에 쏠렸고, 그 주인공인 “서생 안필승”임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뜻밖이라는 반응이었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최승희 정도의 예술가라면 부호의 아내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안필승이 프로 문사, 즉 좌익계 문학가임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놀라움은 증폭되었다.
안필승은 일본 와세다 대학의 재학생이었는데, 이미 안막(安漠)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문학평론가였다. 그런데 ‘안막’이라는 필명에 대한 오해가 생겼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막(漠)’이라는 필명이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희박하다. 남북한과 일본에서 출판된 10권의 평전 중 이 주장을 서술한 것은 정수웅(2004, 372쪽)과 강준식(2012, 85쪽)뿐이다. 정병호(1995, 61쪽)는 ‘안막’이라는 이름은 이시이 바쿠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펜네임으로 잡지사에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해명했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 96쪽)에서 안막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서술했다.
“그는 안필승이라는 이름보다 안막이라는 이름으로 통했습니다. 나중에 이시이 선생님의 성함을 무단으로 베낀 이름이라며 수상하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만, 안막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라 집필하고 있던 신문사가 마음대로 붙여준 필명으로, 그것이 일반인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많은 연구서와 인터넷 포스팅은 ‘안막이라는 필명이 이시이 바쿠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을 수용하고 있다. 사실 검증이 철저하다는 위키백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주장은 이미 도시 전설이 되어 버렸다.
시인 백기행(白夔行, 1912-1996)이 일본의 단가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琢木, 1886-1912)의 이름에서 일부를 가져와 백석(白石)이라는 필명을 지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안필승이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가져와 필명으로 사용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기는 하다. 더구나 안필승이 아내 사랑과 아내의 스승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 것이라면 당대 혹은 지금도 미담으로 여겨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하다’라고 하더라도 이 주장이 사실은 아니다. 안필승이 최승희와 결혼한 것은 1931년 5월이고, 첫선을 본 것은 그로부터 몇 달 전이므로 1931년 2월경이었다. 그러나 안막이라는 필명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적어도 그보다 2년 전인 1929년 7월이었다. 안필승은 최승희를 소개받기 훨씬 전부터 안막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도쿄 유학생들은 방학을 이용해 조선을 순회하며 연극 공연과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 안필승도 강연자로 포함되었다. 이를 보도한 1929년 7월 16일의 <동아일보>(3면) 기사에는 그의 이름이 안막(安漠)으로 소개되어 있다. 최승희를 만나기 훨씬 전의 일이다. 최승희의 자서전이 미리 번역되었다면 평전과 연구서, 위키피디아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안필승에게 안막이라는 필명을 지어준 것이 어느 신문사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최승희는 안막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 ‘신문사’라고 했으나, 정병호(1995)는 이를 ‘잡지사’라고 서술했다.

정병호의 말대로 ‘잡지사’였다면 일본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기관지 <나프>였을 수 있다. 이 잡지의 1931년 3월호에 안막이 <조선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의 현실적 상황>이라는 1만 5천 자(10쪽)의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한편, 1932년의 <사상월보> 1권 10호에도 안막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 약사>라는 장문의 논문(51쪽)이 실렸지만, 이 간행물은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에서 사상범의 동향을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발간한 것이므로 고등 검사들이 안막에 필명을 지어주었을 리 없다.
안막이라는 필명을 권한 것이 신문사였다면 <중외일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안막은 1930년 한 해에만도 <맑스주의 예술 비평의 기준>, <조직과 문학>, <조선프로예술가의 당면의 긴급한 임무> 등, 장문의 평론을 잇달아 연재하면서 <중외일보>의 주요 필진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나는 안막의 필명을 정해준 곳이 잡지사가 아니라 <중외일보>라고 판단했다. 당시 중외일보의 필진에는 안필승이 두 사람이어서 그 두 사람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명의 안필승(安必承, 1909-?)은 안막과도 연배가 비슷하고 문단 활동 시기도 겹친데다가 조선어 이름까지 완전히 같았다. <중외일보>는 안필승(安必承)이 안필승(安弼承)보다 한 살 연장이었으므로 연하자인 안필승(安弼承)에게 안막(安漠)이라는 필명을 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중외일보>는 안필승에게 어째서 하필 안막(安漠)이라는 이름을 권했을까? 사회주의 성향의 <중외일보>가 막(漠)이라는 특정 이름을 권한 것은 실력 있고 유망한 카프 평론가 안필승에게 사회주의 이론가 마르크스(Karl Marx)와 비슷한 음가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jc, 2026/6/20) ⓒ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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