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상 계관시인 최로사는 누구인가? 그녀의 대표작 <샘물터에서>(1952)는 어떻게 태어났나? 최로사의 <샘물터에서>는 최승희가 안무했던 2곡의 <샘물가에서>(1935, 1957)와 관련이 있을까?
2011년 3월 12일 자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시인 최로사(崔露沙, 1931-2011)가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향년 80세. 그녀는 최승일과 석금성의 장녀이자 최승희의 조카딸이다.

최로사라는 이름은, 부친 최승일이 “모래밭의 이슬”같이 귀하게 자라도록 붙여준 이름이라고도 하고, 폴란드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의 이름을 음차한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후자가 부친 최승일의 원래의 의도였고, 전자는 ‘로사’라는 이름을 한자로 쓰면서 고안한 이차적 설명일 것이라고 판단된다.
시인 최로사의 대표작은 <샘물터에서>(1951)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재일본 조선 문학 예술가동맹의 웹사이트는 2023년 7월 15일 자 기사로 <샘물터에서>의 해설을 게재했는데, 이 시는 김일성대학 국문학과 재학생이던 18세의 최로사가 한국전쟁 중에 입대해 간호 병사로 동부전선의 야전병원에서 복무하면서 쓴 작품이라고 했다.
1951년의 어느 봄날 아침 부상병 호송 임무를 수행 중이던 최로사는 한 농촌 마을의 샘물터에서 군인들과 마을 처녀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샘물터에 물을 길러 동이 이고 나갔더니”로 시작되는 4연 16행의 시 <샘물터에서>를 썼다. 이듬해(1952년) 국립예술극장의 작곡가 윤승진이 이 시에 곡을 붙이자, 이 노래는 방송과 구전으로 북한 전역에 빠르게 퍼졌고, 지금도 북한의 대표적인 전선 가요로 꼽힌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절) 샘물터에 물을 길러, 동이 이고 나갔더니/ 빨래하던 군인 동무, 슬금슬금 돌아앉네
살그머니 바라보니, 그 솜씨가 서투르지/ 부끄러워도 말했지요, 제가 빨아 드릴까요,
(2절) 샘물터에 물을 길러, 동이 이고 나갔더니/ 낯이 익은 동무들이, 나를 둘러싸겠지요
아름다운 처녀 동무, 노래 하나 불러주오./ 부끄러워도 불렀지요, 노들강변 봄노래를
(3절) 샘물터에 물을 길러, 동이 이고 나갔더니/ 정들은 동무들이, 전선으로 떠난다죠
허둥지둥 샘물터의, 진달래꽃 꺾어주며/ 거듭하여 부탁했지요, 승리의 날 또 오세요
최로사/윤승진의 <샘물터에서>는 전후에도 인기 가요로 불렸고, 김일성 주석도 그의 저작집(20권 334쪽)에서 “지난 조국 해방전쟁 때 나온 노래 <샘물터에서>는 지금도 많이 불리우고 있는데, 그 노래가 군중성이 있고 생활을 실감 있게 반영하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했고, 최로사는 후일 “김일성상 계관시인”의 칭호를 받았다.
최로사의 고모인 최승희도 1935년에 비슷한 제목의 무용 작품을 안무한 적이 있다. <샘물가에서(1935)>라는 작품인데, 약간의 뉘앙스 차이만 빼면 <샘물터에서>와 제목이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1935년 10월 26일 일본 효고현 고베의 야치요자(八千代座) 공연에서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민자에 의해 독무로 초연됐고, 이후 오카야마 공연에서도 재연된 바 있다.

최승희의 <샘물가에서>의 배경음악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피아노곡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리스트의 독주 모음곡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1842)> 중에서 제1권 “스위스(Suisse)”의 네 번째 곡이 <샘물가에서(Au bord d'une source)>이다.
이 피아노곡은 조용하면서도 빠르고 기교가 뛰어난 작품으로 리스트의 피아노곡 중 널리 연주되는 곡이다. 특히 지속적으로 연주되는 고음의 아르페지오는 솟아나는 샘물과 흐르는 샘물을 연상시키는 매우 표현적인 작품이다.
최승희가 고베 공연에서 <샘물가에서>를 발표했을 때 최로사는 불과 5살이었으므로, 고모의 작품을 알았을 리 없다. 또 최승희의 <샘물가에서>는 제자에 의해 일본의 고베와 오카야마 공연에서만 상연되었고, 이후 다시 발표된 적이 없었으므로, 줄곧 조선에서 생활했던 최승일과 최로사가 최승희의 <샘물가에서>를 알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고모와 조카딸이 약 20년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제목의 작품을 발표한 것은 신기한 일이다.
러시아에도 <샘물가에서>라는 가요가 있다. 1944년 러시아의 시인 세르게이 알리모프(С. Я́. Алы́мов, 1892·1948)의 시에 아나톨리 노비코프(А. Г. Но́виков, 1896-1984)가 곡을 붙인 <우 크리니찌(У криницы)>가 그것이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절) 샘으로 물 길으러 온 처녀들이 말했다./ 젊은이가 여기 오면 시원한 물을 주자./ 수염 덥수룩한 군인이 푸른 초장에 찾아와서/ 차가운 물을 마시고 싶다고 처녀들에게 청했다.
(2절) 두 달의 전투에서 수염도 머리도 자랐어요./ 지저분한 모습을 아가씨들아, 용서하세요./ 그때 이발병이 와서 외쳤다. “수염난 얼굴은 모여라.”/ 순간 젊은이는 마법의 물로 씻은 듯이 되었네.
(3절) 아가씨들의 눈동자가 밝아지고 맑은 노래가 흐른다./ 세 사람은 유쾌하게 원을 그리며 춤추기 시작한다./ 노래하라, 바이얀, 사랑의 노래를, 젊은 피가 끓는다./ 가슴 속의 불꽃은 전쟁 중에도 꺼지지 않는 인민의 불꽃.
(4절) 즐거운 시간은 지나고 이제는 잠시만 더 안녕./ 평화를 쟁취한 후에 다시 함께 춤추자./ 화살처럼 달려가며, 승리의 날을 향해/ 젊은이들의 흔적은 사라지고, 처녀들의 노래는 흐른다.
(후렴)
아름다운 아가씨들아 수염 덮인 얼굴을 보지 마세요./ 병사들에게 수염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나는야 쾌활한 젊은이.
작품의 소재가 샘물터에서 만난 병사와 아가씨들의 대화라는 점에서 <우 크리니찌>와 <샘물터에서>가 유사하다. 다만 <우 크리니찌>(1944)가 <샘물터에서>(1952)보다 8년 앞서는데, 전자는 이차대전 중의 독소전쟁(1941-1945), 후자는 한국전쟁(1950-1953)이 배경이다.

<우 크리니찌>는 나치 독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소련 병사들과 이들을 응원하는 처녀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소련은 1941년 6월부터 독일군의 침공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렀지만,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지켜냈다. 침공의 방향을 남쪽으로 바꾼 독일군은 1942년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했으나 극심한 소모전 끝에 1943년 2월 2일 소련군은 독일군을 격퇴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는 소련군과 인민에게 회생과 희망의 전환점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승리 직후에 작곡되고 보급된 가요가 <우 크리니찌>였다. 전투에 지쳐 머리카락과 수염이 엉망으로 자란 병사들과 이들이 지켜낸 아가씨들의 노래와 춤을 그린 노래였다. 특히 3절의 마지막 부분의 “전투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민의 불꽃”이라는 가사는, 이 노래가 전쟁에 지친 러시아 인민들에게 투쟁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보급된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우 크리니찌>가 일본에서도 <샘물가에서(泉のほとり)>라는 제목으로 번안되어 널리 불렸다. 이 노래는 한때 문부성이 공인한 일부 음악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이차대전에서 소련은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의 적국이었으므로 일본에도 가상 적국이었고, 소련은 실제로 1945년 8월에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그런데도 전후에 일본 국민이 러시아 가요 <우 크리찌니>를 즐겨 불렀다는 점이 의아했다. 아마도 일본 내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소련에 동조하여, 러시아 인민이 즐겨 부르던 <우 크리니찌>를 그들도 함께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이다.

조선 가요 <샘물터에서>는 전후에도 널리 불리고 연주되었는데, 모란봉악단의 여성 5중창단이 부른 <샘물터에서>는 1985년 서울에서도 남북예술단 교환 공연에서 상연된 바 있다. 이 공연에서 가창에 나선 가수들은 박미경, 김설미, 정수향, 김유경, 박선향 등의 5명이었다.
<샘물터에서>는 탭댄스 버전으로 연주되기도 한다. 유튜브에는 2017년 왕재산 악단이 <샘물터에서>를 탭댄스로 편곡해 연주한 작품이 올라와 있는데, 멜로디는 원곡 그대로이지만 5명의 여성 탭 댄서와 1명의 남성 탭 댄서의 연주와 동작이 경쾌하고 역동적이다.
조선에는 <샘물터에서>(1972)라는 무용 작품이 또 하나 존재한다. 7명의 여성 무용수가 출연하는 군무 작품이다. <조선예술문화사전>(2006)에 따르면 이 <샘물터에서>는 1972년 만수대예술단이 안무한 작품으로 함경도 민요 <돈돌라리>의 선율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돈돌라리>는 함경남도 북청 지역의 민요이다. ‘돈돌라리’는 ‘동틀 날이’가 자꾸 반복되면서 변형된 말이라고 한다. 즉, 일제강점기에 조선 민중이 ‘동틀 날, 즉 해방의 날이 다가온다’라는 뜻으로 부르면서 해방을 염원하며 부르던 민요라고 설명되어 있다.
민요 <돈돌라리>는 가사가 그리 길지 않고 ‘돈돌라리’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민요가 처음부터 춤과 함께 불렸기 때문이다. 즉, 빠른 춤을 추면서 가사가 긴 노래까지 부르기가 어렵기 때문에 “모래 산천”이나 “시내 강변,” 혹은 “보배 산천” 등의 단편적인 표현의 사이사이에 “돈돌라리”나 “리라 리라리” 등의 후렴구를 무한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한편, 민요 <돈돌라리>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해 안무 된 다른 무용 작품도 있다. 만수대예술단의 8인의 여성 무용수가 출연하는 <돈돌라리>라는 제목의 무용 작품이 그것이다. 여성 7인 군무 <샘물터에서>와 여성 8인 군무 <돈돌라리>는 출연자 수뿐 아니라 소품에서도 차이가 난다. <돈돌라리>에서는 머리에 작은 광주리를 이고 춤추지만, <샘물터에서>는 물동이를 이고 춤춘다.
최로사/윤승진의 가요 <샘물터에서>가 반주음악으로 사용되면서 그 가사 내용을 무용 동작으로 재현한 작품도 있다. 여성 무용수 4인과 남성 무용수 3인이 출연하는 혼성 군무인데, 이 작품에서는 여성 무용수는 물동이, 남성 무용수는 대야를 소품으로 사용한다.
한편, 여성 7인 군무로서의 <샘물터에서>는 때로 <물동이 춤>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무용수들이 상연 중에 물동이를 소품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작은 바가지로 샘물을 길어 물동이에 담는 모습이나,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춤을 추는 장면, 그리고 물동이를 타고 흐르는 물을 손으로 훔치는 장면 등은 매우 표현적이다.
여성 7인 군무 <샘물터에서>의 압권은 7인의 무용수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모습이다. 특히 리더인 무용수는 다른 6인의 무용수보다 묘기에 가까운 회전 동작을 시연하는데, 이때는 관객들의 박수가 절로 터지곤 한다.
<샘물터에서>는 조선무용 특유의 빠르고 절도 있는 동작이 대종을 이루지만, 각 동작을 연결할 때는, 이른바 ‘굴신(屈伸)’ 기법을 강조하기 때문에, 동작과 동작 사이가 부드럽게 연결되고, 움직임에 탄력이 생기고 리듬감이 고조되는 것이 특징이다.

<물동이 춤>은 독무로도 상연되는데 이때는 주로 아동 무용이다. 유튜브에는 2012년 조선소년단 창립 66돌 경축 행사에서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의 리광연 학생이 상연한 <물동이 춤>이 올려져 있는데, 깜찍한 춤동작과 함께 물동이를 다루는 묘기에 가까운 동작이 감탄을 자아낸다.
오늘날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부에서도 여성 7인 군무 <샘물터에서>와 여학생 독무 <물동이 춤>이 자주 상연되는데, 원래 여성 7인 군무로 창작된 <샘물터에서>=<물동이 춤>은 일본과 중국의 동포들이 시연할 때는 여성 무용수의 수가 6인이나 8인으로 바뀌기도 한다.

만수대예술단의 <샘물터에서(1972)>와는 구별되는 또 하나의 <샘물터에서(1957)>가 있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심사 위원으로 참가하고 돌아온 최승희는 그해 9월 3일의 <로동신문>에 “우리 무용 예술의 경험과 과제”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글에서 최승희는 <샘물터에서>가 “조선 인민이 오랜 시일을 두고 자기의 로동 과정에서 창조한 민요의 리듬과 밀접히 결합된 무용 동작을 정리한” 작품이며 “세계 1백30개국에서 참가한 무용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라고 서술했다. 다만 이 <샘물터에서>(1957)의 배경음악이 어떤 민요였는지 확인되지 못했는데, 만일 그것이 <돈돌라리>였다면 이 작품은 만수대예술단이 창작했다는 <샘물터에서>(1972)의 선행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조선과 재일 조선학교에서는 최로사가 작시한 <샘물터에서>(1952)와 민요 <돈돌라리>를 반주음악으로 한 무용 작품 <샘물터에서>(1972), 그리고 <물동이 춤>이 자주 상연되고 있다. 그만큼 가요계뿐 아니라 무용계에도 최로사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최승희가 안무했던 1935년의 <샘물가에서>는 잊혀 졌고, 1957년의 <샘물가에서>는 오늘날의 <돈돌라리>와 <샘물터에서>(1972)의 안무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승희는 1952년 공훈 배우, 1955년에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고, 약 반세기 후인 2001년에는 최로사가 “김일성상 계관시인”으로 지명됐다. 최승일은 여동생과 딸이 조선 최고의 예술가 반열에 오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jc, 2024/9/6; 2026/6/19)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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