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호는 평전 <춤추는 최승희>(1995, 17-18쪽)에서 최승희의 큰 오빠 최승일의 결혼 편력을 다음과 같이 간략히 서술했다. 각 혼인의 시기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맨 처음에 혼인한 한영명과 어린아이가 없다는 구실로 이혼하고 마현경과 재혼하나 다시 이혼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충주 석씨인 석정의와 혼인했다. 그 여자는 그때 인기 있는 연극 영화배우로서 석금성이라는 예명으로 더 유명했다. (최승일은) 석금성에게서 네 자녀를 얻었으니 큰딸 로사, 큰아들 경섭, 둘째 딸 마사, 둘째 아들 호섭 들이었다.”

서울시 종로구청에서 조사한 부친 최준현의 호적에는 최승일의 아내들의 이름과 함께 결혼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개인정보 보호법의 규정 때문에 필자는 이 호적을 직접 열람하지는 못했지만 종로구청의 담당 계원이 필자 대신 호적을 열람하고 필요한 정보를 전해 주었다. 다른 자녀들과는 달리 장남 최승일의 혼인 상황이 호적에 모두 기록된 것은 그가 최준현의 호적을 승계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혼 사항은 확인되지 못했다.
정병호는 석금성(石金星, 1907-1995)의 본명이 ‘석정의’라고 했지만 호적상의 기록은 ‘석정희(石丁羲)’이다. 신문기사 중에는 석금성의 본명을 ‘석정희(石貞姬)’나 ‘석정의(石貞義)’라고 표기한 예가 있으나 이는 와전된 것이다. 여성 이름에 이례적으로 ‘고무레 정(丁)’이 쓰인 것을 ‘곧을 정(貞)’으로 오해했거나, ‘숨 희(羲)’자를 ‘옳을 의(義)’자로 착각하거나 ‘계집 희(姬)’자로 오해해서 일어난 실수였을 것이다. 이같은 착각이나 오해가 혼란을 야기하지 않은 것은 본명보다 예명이 더 자주 쓰였기 때문인데, 이 예명은 토월회 대표 박승희(朴勝喜)가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준현의 호적 기록에 따르면 최승일은 1919년 8월8일 한영명, 1928년 10월27일 마현경, 1931년 6월24일 석금성과 혼인했다. 이 날짜들은 최준현 호적의 다른 날짜와 마찬가지로 음력 날짜를 양력 날짜처럼 기재한 것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최승일은 첫째 부인 한영명과 결혼했을 당시 만17세였고, 삼일 만세운동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당시 최승희는 만7세로 숙명여자보통학교(=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최승일이 도쿄에서 유학하는 동안 한영명은 시댁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며,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시절의 대부분을 첫 번째 올케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한편, <최승희 자서전(1937, 48-)>에 실린 “누이에게 주는 편지”에서 최승일은 최승희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오빠, 나는 대관절 내년에 졸업을 하면 무엇을 하면 좋겠수?’ ... ”승희야, ...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이야기를 번역하여 어느 달에는 한 사오십 원의 수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는 도저히 부모를 뫼시고 처자를 거느리지를 못하리라고 생각이 되니, 나는 머지않아 엉청뛴 노동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고 생각이 된다.“
이 대화는 최승희가 ”내년에 졸업을 하게 되는“ 1925년에 이뤄진 것이다. 최승일은 니혼대 미학과 유학을 중단하고 1922년에 귀국했으므로 이 시기에 아내 한영명과 더불어 온 가족이 함께 체부동 137번지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최승희는 한영명과 7년이나 함께 살았으면서도 2권의 자서권과 각종 잡지에 기고한 회고록에서 그녀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최승일은 한영명과 이혼했고, 1926년 2월6일 두 번째 부인 마현경과 재혼했다. 최승희는 이내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무용유학을 떠났다. 최승희가 유학에서 돌아온 후인 1930년에 최승일은 마현경과 이혼했고, 세 번째 부인 석금성과 결혼했다. 최승일과 석금성의 결혼 무렵 최승희는 조선에서의 공연 활동을 시작했다.
최승희는 열 살 연상인 오빠 최승일의 결혼과 이혼을 목격했고, 오빠와 각 올케와의 관계를 관찰했을 것이다. 이 경험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최승희는 오빠의 결혼 생활에서 긍정적인 점을 배우고 부정적인 점을 회피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이 생활과 예술의 양면에서 안정적이고 생산적이었다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최승일이 최승희의 남편 안막에게 영향을 주었던 방식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최승일은 최승희의 무용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안막은 최승일의 열성을 배우면서도 그의 실패를 회피하는 방식으로 최승희의 무용 활동을 후원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즉 최승일은 막내 동생 부부에게 교사이자 반면교사였다.
따라서 오빠 최승일의 결혼과 그 변화 과정을 최승희의 성장과정과 연계해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중에서도 최승일의 세 번의 결혼 시기를 밝히는 것이 중요했다. 각 시기의 최승희의 신체적, 정신적 발달상황, 그리고 각 시기의 무용 활동의 특성과 연결시켜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최승일의 첫 두 결혼과 이혼의 시기는 비교적 정확히 파악되었지만, 석금성과 세 번째 결혼한 시기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기록이 엇갈렸다. 따라서 이 문헌들을 자세히 조사하기로 했다. 이 문헌들은 혼란을 야기했지만 그 혼란을 정리할 유일한 단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 부친 최준현의 호적 기록에 따르면 최승일과 석금성의 결혼일은 1931년 6월24일이었다. 그러나 이 날짜가 실제 결혼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최승일과 석금성은 그보다 이전에 사실혼을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많다. 이날은 최승일과 석금성이 결혼식을 올린 날일 수도 있지만, 그저 혼인신고 날짜에 불과할 수도 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최승일과 석금성은 둘 다 첫 결혼이 아니었으므로 하객을 초청한 공개 결혼식을 올리려는 동기는 약했을 것이다. 특히 최승일의 결혼은 세 번째였고, 마현경과의 두 번째 결혼식은 신문에 보도되었지만, 석금성과의 세 번째 결혼식이 거행됐다는 신문 기사는 없었다. 최준현의 호적에 기록된 다른 날짜들과 마찬가지로 이 날짜도 음력 날짜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최승일의 세 번째 혼인신고일은 양력으로 1931년 8월 7일이었을 것이다.
(2) 그러나 호적의 결혼날짜는 혼인신고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상충되는 기록도 있다. <삼천리> 1931년 11월호에 기고한 “이혼한 남자와 결혼할 경우 민적등록에 대한 신여성의 태도”라는 글에서 석금성은 1930년에 민적 등록을 했다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제가 최와 결혼할 때에는 그의 본 마누라 되는 분이 있었답니다. ... 저는 공중에 둥둥 뜬 사람 같이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으며 어린 것(최씨의 어린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이 사생아가 되면 어쩔까 해서 퍽도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본마누라를 이혼한 후 또 저한테서도 확실한 대답을 들어 가지고 (제가 본부와 자식이 있는 몸이기 때문에 최씨도 불안했든 것입니다.) 작년(=1930년)에 민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적 기록과 석금성의 기억에 차이가 있다. 호적에는 결혼일이 1931년 6월 24일(음력)로 되어 있지만 석금성은 1930년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금성 자신의 발언 속에는 결혼 시기가 1930년일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어린 것이 사생아가 되면 어쩔까 해서 퍽도 근심”했고, “그러다가 그가 본마누라를 이혼한 후 ... 작년(=1930년)에 민적 등록”을 했다고 말했다. 즉, 1930년에 민적 등록을 하기 전에 이미 최승일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1932년 1월3일자 <중앙일보>(3면)에 실린 석금성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당시에 석금성은 최승일과의 첫딸 최로사를 출산한 후였다. 인터뷰 중에 “옆에 앉았던 귀여운 <로사>가 엄마를 조른다”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혼자서 앉을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생후 6-7개월이 지나서이다. 따라서 석금성이 최로사를 출산한 것은 1931년 6월경이다. 실제로 북한의 <조선 예술 사전>에 따르면 최로사의 생일은 6월15일이다. 따라서 석금성이 최로사를 임신한 것은 1930년 11월, 그리고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무리 빨라도 1931년 1월 이후였을 것이다. 따라서 임신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민적에 등록했다면 그 시기는 1930년일 수가 없다.

(3) 정병호는 평전 <춤추는 최승희>(1995, 41쪽과 407쪽)에서 최승일이 석금성과 결혼한 것이 1928년이었다고 서술했다.
“이시이 연구소가 자유의 언덕(自由ケ丘)으로 옮긴 뒤 얼마 안돼서 최승일이 재혼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상대자는 그 전에 두서너 번 본적이 있는 연극배우 석금성이었다. 최승일은 일찍 혼인을 했으나 아이가 없어서 이번에 재혼한 것이었다.” (41쪽)
이 서술의 출처는 석금성의 증언이었다. 정병호는 <춤추는 최승희>의 부록에 정리한 연보에서도 “최승희가 열여덟 살이던 1928년 큰오빠 승일이 연극-영화 배우 석금성과 세 번째 혼인을 했다”고 서술했다.
이시이 칸(石井歓)이 저술한 이시이 바쿠의 평전 <무용시인 이시이 바쿠(舞踊詩人石井漠)>(1994, 241쪽)에 따르면 이시이 무용연구소가 무사시사카이(武藏境)에서 지유가오카(自由ヶ丘)로 이전한 것은 쇼와3년, 즉 1928년 가을이었다.
“1928년 가을, 지유가오카의 무밭을 조성하여 건평 150평 정도의 2층 건물 스튜디오가 완성, 무사시사카이에서 이전하였다.”
미도리카와 준(綠川潤)이 저술한 평전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생애(舞踊家石井漠の生涯)>(2006, 77쪽)도 무용 스튜디오의 이전이 쇼와3년(=1928년) 가을이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최승일과 석금성의 결혼이 이시이 연구소가 자유의 언덕으로 이전한 직후라면 대략 1928년 10월경이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스튜디오가 입문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미타카의 무사시사키이에서 도쿄부 에바라군 카네로 이전한 것은 쇼와 3년 가을이었다. 그는 시부야에서 도큐 토요코선으로 약 30분 정도 이동한 회역 앞에 500평 규모의 토지를 빌려, 건축면적 150평인 스튜디오 겸 주택을 새로 짓고 이사했다.”
따라서 석금성의 기억과 정병호의 서술이 정확하다면 최승일과 석금성의 결혼은 “1928년 가을 직후”로 좁혀질 수 있다. 그리고 정병호는 당시에 “최승일에게는 본부인이 있었”고, “최승희도 석금성을 두서너 번 만난 적이 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석금성의 첫 결혼 시기와 연기 활동을 조사해 보면 최승일과의 결혼이 1928년 가을이었을 리 없음을 알 수 있다. 석금성은 1925년부터 토월회에 가입해 연기를 시작했고, 그해 충청도 갑부 이충직과 결혼했다가 1928년에 이혼했다. 석정막이 이혼한 그해 가을에 최승일과 결혼했다는 문헌 기록은 발견된 바 없다. 심지어 석금성과 이충직의 이혼이 1929년이었다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출처가 나타나 있지 않아 추가 조사가 어려웠다.
석금성은 이혼한 이후 연극계에 돌아와 <초생달>(1929), <즐거운 인생>(1929), <간난이의 설움>(1929), <아리랑 고개>(1929), <나무아미타불>(1930), <탄광부>(1930), <모란등기>(1930) 등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 시기에 <약혼>(1929)과 <종소리>(1929) 등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석금성이 1928년 가을에 최승일과 혼인했다면 신혼과 출산과 육아의 문제로 1929년과 1930년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석금성의 활동은 1931년에 크게 줄었다. 연극으로는 <말 못할 사정>(1931)을 제외하고는 출연한 작품이 없었고, 영화 출연도 전혀 없었다. 토월회가 해체되고 그 후신인 미나토좌 신극부와 신흥극단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토월회 구성원들의 활동이 전반적으로 둔화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바로 이 시기(1930년 후반)가 석금성과 최승일이 결혼한 시기였다고 추론한다. 일이 뜸해진 틈을 타서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했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첫딸 최로사를 양육하느라 석금성의 활동은 1931년에도 재개되지 못했다.
1932년에는 석금성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극단 <태양극장(1932)>이 결성되고 석금성이 이에 참여하면서 그 4회 공연작 <부활>과 <이 대감 망할 대감>, 5회 공연작 <월요일>, <마데오>, <지쳐가는 가을>, 7회 공연작 <지나간 시대>, 8회 공연작 <스타가 되려고>, <사막의 광상곡>, <명나라 원나라> 등에 출연했다. <태양극장>에는 석금성과 함께 최승일도 참여했는데, 최승일은 문예부 소속으로 각색과 연출을 맡았고, 석금성은 연기부 소속이었다.
즉, 석금성의 활동이 1929년과 1930년에 활발했던 것으로 미루어 그녀가 1928년 가을에 최승일과 결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1931년의 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으로 미루어 두 사람의 결혼 시기는 1930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4) 1928년 가을에 결혼했다는 석금성의 기억은 오류였더라도, 두 사람이 결혼(=사실혼)했을 당시 “최승일에게는 본부인이 있었다”는 석금성의 회상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여성으로서 그런 사안에 대한 기억이 잘못될 리 없기 때문이다.
1926년 2월5일의 <조선일보>(3면) 기사에 따르면 최승일과 마현경은 1926년 2월6일 결혼했고, 잡지 <삼천리>의 1935년 8월호 기사에 따르면 마현경은 1930년에 고향 성진으로 돌아갔으므로 낙향 직전에 최승일과 이혼한 것으로 보인다. 마현경은 1930년 3월말에 경성방송국에서 해직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녀가 성진으로 돌아간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낙향과 이혼의 시기는 1930년 4월부터 그해 12월까지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이다.
석금성은 자신이 결혼했을 때 최승일이 아직 마현경과의 이혼이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했으므로, 최승일과 석금성의 사실혼은 1930년 4월 이후에 시작됐음에 틀림없다.

(5) 석금성이 1930년 1월까지 재혼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다른 기록도 있다. 1930년 1월 8일의 <조선일보>(5면)는 “극단의 효성(曉星), 대리석 같은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석금성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다. 당시 24세라고 밝힌 석금성은 “이상적 배우자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저 마음만 맞으면 이상적 배우자”라고 대답했다.
이 질문과 대답은 내용보다 맥락이 중요하다. ‘이상적 배우자’를 묻는 것은 미혼자를 인터뷰할 때 던지는 질문이다. 즉 기자가 석금성에게 ‘이상적 배우자’를 물었다는 것은 그녀가 미혼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기혼 여성에게 ‘이상적 배우자’를 묻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따라서 기자가 일부러 무례를 범한 것이 아니라면 1930년 1월 현재 석금성은 미혼이었음에 틀림없다.
최승일과 석금성이 사실혼 관계였으나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당시의 문화예술인들의 생활은 기자들에게 비밀일 수 없었다. 특히 여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기자들의 정보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기자들과 문화예술인들은 대개 친구이거나 선후배였고, 기자들 자신이 문인이거나 예술인인 경우도 많았다.
석금성을 취재한 <조선일보> 기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가 석금성의 결혼 여부를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그 기자는 최승일의 친구나 선후배, 아마도 후배였을 가능성이 크다. 최승일이 당시의 문화예술인들 중에서 나이가 많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자가 석금성에게 “이상적 배우자”를 물었다면 석금성이 최승일과 결혼하기 전이었다는 뜻이다.
기자가 석금성이 기혼자임을 알았더라도 그 사실을 공개하기 어려웠을 수는 있다. 석금성이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선배인 최승일이 입단속을 요청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기자가 “이상적 배우자”를 물었다면, 석금성에게 남편 최승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이 이상적 배우자”라고 말한 석금성의 대답은 남편 최승일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고백이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당사자와 내부자들이 아는 정보와 대중에게 전달된 정보가 달라지고, 나아가 독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 같은 글쓰기는 저널리즘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언론 보도는 행간을 읽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결혼 여부와 같은 사적인 정보에 대한 기사까지 행간을 읽어야 하고 음모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조선일보>의 석금성 인터뷰 기사는 1930년 1월8일 현재 석금성은 미혼이었음을 알리는 기사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6) 필자가 조사한 문헌에서 석금성과 최승일의 결혼을 처음으로 확인해 준 기록은 1931년 11월1일에 발행된 잡지 <별건곤>(45호)의 기사이다. “극장홍진곡(劇場紅唇曲): 여배우들의 이 모양 저 모양”이라는 제목 아래, 이서구(李瑞求)는 당대의 인기 여배우 6명(복혜숙과 석금성, 이경설과 이월화, 신은봉과 전옥)을 짤막짤막하게 인터뷰해 연작으로 보도했는데, 이서구의 한 질문에 대해 석금성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렇지만 우리 사랑양반은(문사 최승일군) 밤낮 없이 승희(무용가 최승희가 승일군의 누이이다.) 지방 흥행에 따라 다니시니까 집에 계신 날이라야 며칠 되지도 않는답니다.”
또 이 기사는 석금성과 최승일의 결혼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실마리도 주었다. 이서구가 “연극을 한 번 다시 해 보시”라고 권유하자 석금성은 “글쎄요... 그렇지만 젖먹이가 있어서...”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석금성은 최승일의 아이를 출산한 후였고, 아직 젖을 먹이고 있다고 했으니 출산 후 1년 이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결혼 또는 사실혼이 시작된 것은 1931년 1월이거나 그 이전이다. 따라서 <조선일보>와 <별건곤>의 기사를 종합하면, 이들의 결혼 시기는 1930년 4월과 1931년 1월 사이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이다.
(7) 1932년 1월3일자 <중앙일보>(3면)에 실린 석금성의 인터뷰 기사도 이러한 추정을 확인해 준다. 당시에 석금성은 최승일과의 첫 딸 최로사를 출산한 상태였다. 인터뷰 중에 “옆에 앉았던 귀여운 <로사>가 엄마를 조른다”는 표현이 있었기 때문인데, 아기가 혼자서 앉을 수 있는 것은 대체로 태어난 지 6-7개월이 지나서이다. 따라서 석금성이 최로사를 출산한 것은 1931년 6월경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최로사의 생일은 6월15일이었다.
최승일 일가의 관행대로 최로사의 생일 6월15일은 음력 날짜였음에 틀림없고 이를 양력 날짜로 환산하면 7월29일이 된다. 따라서 최승일과 석금성의 결혼, 혹은 사실혼 관계는 그보다 10개월 전인 1930년 9월 말 경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8) 북한의 <조선예술사전>에는 최승일과 석금성의 장녀 최로사의 생년월일과 출생지가 “1932년 6월 15일 서울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월일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만, 생년이 1931년이 아니라 1932년으로 기록된 것이 의문이다.
1931년 11월1일의 <별건곤>(45호)의 기사에 따르면 최로사가 이미 태어나 젖먹이였고, 1932년 1월3일의 <중앙일보>(3면)의 인터뷰 기사도 석금성이 “두 살 먹은 어린 로사(따님의 이름)를 안고 기자를 반가이 맞았다”고 보도했다. 아마도 최로사가 사생아 상태로 태어났다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출생 신고를 1931년이 아니라 1932년으로 일 년 늦추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9) 그렇다면 최승일과 석금성은 1930년 9월 전후에 어떤 계기로 만나서 사귀고 동거하게 된 것일까? 1930년 9월11일의 <중외일보>(7면)는 경성에 신축된 극장 미나토좌의 신극부가 상연한 단막극 <하차(荷車, Der Karren)>의 평론기사를 실었다. <하차>는 오토 뮐러(Otto Müller, 1816-1894)의 희곡을 최승일이 연출했고, 출연 배우는 심영(沈影), 석금성(石金星), 나운규(羅雲奎), 김순희(金順熙), 이호영(李鎬榮), 이명우(李明雨), 임운학(林雲鶴) 등이었다.
또 9월18일에는 루 메르텐(Lu Märten, 1879-1970) 원작의 <탄광부(Bergarbeiter)>를 각색한 <산>이 같은 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이 작품의 연출가도 최승일이었고, 출연배우는 심영, 나운규, 석금성, 이영철(李營哲), 박갑득(朴甲得), 김종하(金宗河), 박종(朴鍾, 현철鉉哲의 본명), 이호영(李鎬榮) 등이었다.
미나토좌 신극부가 <하차>와 <산>을 상연하기 위해서는 원작의 각색과 배우들의 연습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는 적어도 상연보다 1-2개월 전부터 준비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 준비기간과 상연기간에 연출가 최승일과 주연 여배우 석금성이 만나 가까워졌고 동거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일과 석금성은 그해 10월 토월회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흥극단>에도 함께 참여했는데, 최승일은 문예부, 석금성은 연기부에 속했다.

(10) 최승일과 석금성이 만난 것은 1930년 9월 미나토좌 신극부 공연이 처음이었을까? 정병호는 최승일과 석금성이 결혼하기 전에 “최승희가 석금성을 두서너 번 만난 적이 있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 그것은 언제였을까?
최승희는 1926년 3월에 도쿄로 무용유학을 떠난 이후 1927년 10월과 1928년 11월에 이시이 무용단의 일원으로 경성공연에 참여했고, 1929년 8월 말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따라서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 유학하던 기간에는 최승일과 석금성의 결혼(1930년 9월경) 전에 석금성을 만났을 가능성이 없다. 1927년 10월에는 석금성이 이충직과 결혼한 상태였고, 1928년 11월에는 석금성이 이혼했더라도 오빠 최승일과 결혼하기 전이었다.
최승희는 귀국한 후, 1929년 11월초에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설립한 후, 12월에 귀국 후 첫 공연에 참가했다. 이 공연은 최승희가 독자적으로 조직한 공연은 아니었고, 찬영회(讚映會)가 주최한 <무용, 극, 영화의 밤> 행사였다. 12월 5-6일에 조선극장에서 개최된 이 행사에서 최승희는 <인도인의 비애>와 <금과 은>, <세레나데>의 세 작품을 선보였다.
그런데 이 행사에는 극단 토월회도 참여해 <아리랑>을 상연했다. 이 작품은 1929년에 초연되었던 <아리랑 고개>와 같은 작품으로 보이는데, 여기에서 석금성이 여주인공 봉이 역을 연기했다. 따라서 최승희와 석금성은 1929년 12월5-6일의 <무용, 극, 영화의 밤>에서 처음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최승일이 최승희 공연의 매니저 역할을 담당했으므로 최승일도 이때 석금성을 처음 만났을 것이다.
그때까지 토월회 활동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최승일은 최승희가 토월회와 함께 공연한 이후 <미나토좌 신극부(1930)>와 극단 <신흥극장(1930)>, 그리고 극단 <태양극장(1932)>에 이르기까지 토월회 구성원들이 참여한 연극 활동에 각색자와 연출자의 역할로 적극 참여했다. 1929년 12월의 첫 만남 이후 최승일과 석금성이 마침내 1930년 9월 <미나토좌 신극부> 공연과 11월의 <신흥극장> 공연 즈음에 동거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이며, 이때까지는 최승일은 마현경과 이혼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의 문헌 조사와 해석을 통해 최승일과 석금성의 호적상의 혼인신고일은 1931년 6월24일이었으나, 두 사람이 사실혼을 시작한 것은 1930년 9월경이었고, 처음 만났던 것은 1929년 12월 5-6일에 열렸던 찬영회 주최의 공연 행사였음을 밝힐 수 있었다.
끝으로, 여담이지만, 최승일과 석금성이 대면으로 처음 만난 것은 1929년 12월의 행사였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그보다 6년 전인 1923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도 있다. 1923년 7월24일자 <조선일보>(3면)는 일본 유학생들로 구성된 <형설회>의 단성사 공연을 보도하면서, <형설회>를 후원하기 위해 성금을 보낸 기부자 명단도 함께 발표했다. 이 명단에 수록된 첫 번째 사람이 5원의 기부금을 낸 석정희(石貞姬)였다.
이 석정희가 석금성이었다면 그녀는 토월회에 참여하기 전에 이미 <형설회>의 연극 공연을 후원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석금성은 16세의 소녀였으나 연극에 관심이 깊었을 뿐 아니라, 5원의 기부금을 보낼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형설회>는 1921년 일본 도쿄에서 조직된 고학생 단체로 학생들의 기숙사 겸 회관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1923년 여름 조선 각지에서 연극과 음악회를 개최하면서 기금을 모금했다. <형설회>의 조선 순회공연은 <극예술협회>가 조직하고 후원했는데, 당시 22세의 최승일은 이 협회의 창립 동인이자 <형설회>의 총무로서 연극단을 이끌고 전국 순회공연을 진행했었다.
따라서 최승일이 1929년 12월에 석금성을 처음 만났을 때 1923년의 기부금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달했을 수 있고, 이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어린 첫 인상을 심어주고 관계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jc, 2020/10/30; 2026/1/17; 2026/6/1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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