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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100장면] 47. 마현경

최승일의 세 부인 중에서 혼인 기간이 가장 짧았던 사람이 둘째 부인 마현경(馬賢慶)이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약 4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평전과 연구서의 기록이 가장 적은 것도 마현경이었다. 최승희의 가족관계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서술한 정병호의 <춤추는 최승희>(1995, 17)“(최승일이) 마현경과 재혼하나 다시 이혼했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종로구청에 소장된 부친 최준현의 호적에 따르면 최승일과 마현경이 혼인신고를 한 것은 19281027일이었다. 하지만 1928420일의 <매일신보>(3)에서 최승일은 결혼의 택일은 어떻게 하였나는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은 금전문제를 빼어놓고서 그 외의 모든 것에 있어서는 매우 자유로운 처지이었음으로 일체의 절차는 당사자인 우리 양인의 합의로써 결정하였는데, 택일에도 양가의 부로(父老)들은 다소의 반대도 없지는 아니하였으나 결국 우리 마음대로 1123일로 결정하였답니다. 그것이 벌써 3년전(=1925) 일이었으니 세월은 참으로 빠르기도 하지요.”

 

즉 두 사람의 결혼일은 19251123일이었다고 한 것이다. 이것만 해도 혼인신고가 3년가량 늦었다. 게다가 192625일의 <조선일보>(3)는 두 사람의 결혼일이 192626일이라고 보도했다.

 

조선 문단의 신진문사 최승일군은 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마재성(馬載星)양과 혼약이 있었더니 금월 6일 하오8시에 그 결혼식과 피로연을 시내 <식도원(食道園)>에서 거행한다고.”

 

실제로 결혼식은 <조선일보>가 보도한 26일에 이뤄졌을 것이다. 이 기사는 결혼식 하루 전에 하객들을 위해 일시와 장소를 알리는 기사였으므로 여기에 명시된 일시와 장소가 정확한 정보였을 것이다. 설혹 오류가 있었다면 이내 바로잡는 기사가 났을 것이지만, 이 기사 이후에 정정 기사가 보도된 바는 없었다.

 

 

그렇다면 최승일이 <매일신보>에서 밝힌 19251123일은 어찌된 것일까? 혹시 이 날짜가 음력 날짜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양력으로 환산해 보았으나, 음력 19251123일은 양력으로 192617일이었고, 이는 실제의 결혼일보다 한 달 이른 날짜였다.

 

그런데 실제 결혼일이었던 양력 192626일의 음력 날짜는 19251224일이었고, 이는 최승일의 막내 여동생 최승희의 생일이었다. 결국 <매일신보>에 보도된 최승일과 마현경의 결혼 날짜는 최승일의 착오였다. 결혼 3년 후에 기억에 의존해서 인터뷰에서 밝혔던 결혼 날짜는 음력과 양력, 그리고 최승희의 생일 날짜와 자신의 결혼 날짜를 혼동한 결과였다.

 

마재성은 마현경의 본명이다. <조선일보> 기사가 마현경이 경성여고보에 재학 중이라고 한 것은 아직 졸업을 2달 앞둔 시기였기 때문이다. 1926년 초에는 최승희도 숙명여고보를 졸업했으므로 최준현의 집안에는 경사가 겹쳤다. 장남이 새장가를 들었고, 새로 맞은 맏며느리가 조선 최고의 공립여학교를 졸업했고, 막내딸이 조선 최고의 사립여학교를 졸업했다. 그해는 최승일이 <경성방송국>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어 살림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마현경은 결혼 후에 바로 졸업했고, 이듬해(1927) 115<경성방송국> 입사 시험을 통과해 조선 최초의 공채 아나운서가 되었다. 최승일은 이미 1926년부터 경성방송국에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이 부부는 사내 커플이 됐다.

 

경성의 많은 문화예술인과 지식인들이 최승일-마현경 부부를 부러워했다. 식민지 조선의 대부분의 문화예술인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가운데, 최승일 부부는 나란히 안정적인 직장에서 월급을 받으며 근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안정적인 수입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되었던 것 같다. 192712일의 <중외일보>(2)신혼생활 제1년의 소감에 대한 최승일의 답변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어찌어찌하여 결혼이라고 하여가지고 투철한 경제 덕으로 윤택하지 못한 생활을 하여오느라고 올 일 년은 혼이 나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무슨 세월이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으니 하는 콧노래 비슷한 소리는 내게는 검물(禁物)이올시다. 재미가 아기자기하다든가 하는 수작은 다- 돈 있는 살림에서 우러나오는 수작이겠지요. 내게는 올 일 년 지나간 것이 한 십 년이나 지나가게 되는 것과 같이 그렇게 길었습니다.”

 

 

이 기사에 나타난 최승일의 정조가 사뭇 비관적이다.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한 생활때문에 죽을 뻔했으며 “(신혼) 일 년 지나간 것이 한 십 년이나 지나가게 되는 것처럼 길었다고 했다. 더구나 기사 첫머리에 어찌어찌하여 결혼이라고 하였다는 표현에서는 최승일이 이 결혼에 그다지 열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최승일은 자주 부부싸움을 했다고 실토했다.

 

또한 아기자기한 재미 대신에 싸움만 밤낮 하였습니다. 그것은 다 생활에서부터 끌어 가지고 오는 모든 고통 중에 한가지이겠지요. 이와 같이 지내왔으니 일 년을 맞는 감상을 말하라면 나는 백지(白紙)로 대답할 터인데- 그러나 다시금 또 한 번 뒤집어 생각해 보니 비참하다는 생각밖에는 아니납니다.”

 

최승일이 기자에게 밤낮 부부싸움을 했으며 결혼 생활이 비참하다고 발언한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일간신문에 자신의 발언이 보도될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 마현경과 처가 식구들에게도 전해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최승일은 이 같은 내용이 보도되도록 발언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미 이 시기에, 즉 결혼 생활이 1년도 채 되지 않은 1927년 초에 두 사람의 결혼은 파국을 맞았거나 혹은 그리로 치닫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설사 두 사람이 결별을 준비하고 있었더라도 이 같은 내용이 대중매체에 보도되도록 한 것은 부부간의 예의는 물론, 일반상식에도 벗어난 것이다. 그런 몰상식한 발언을 공개한 것은 그만큼 두 사람의 감정이 이미 상해 있었고, 특히 최승일은 마현경으로부터 마음이 떠났었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마현경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최승일처럼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현경도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것으로 비쳐질 만한 발언이 있었다. 19281124일의 <조선일보>(3)와의 인터뷰에서 마현경은 이렇게 말했다.

 

제일 슬픈 일이 있었다면 학교에서나 혹은 결혼 전에 생각하고 동경하든 가정생활과 딴판으로 달랐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또는 제일 큰 문제는 나의 개성이 나쁘던 그르던 전연히 존재를 모를 만큼 죽어가고 없어져 가는 것입니다. 나의 개성은 (남편)의 개성을 따라서 거기에 용화(溶化)되고 마는 것을 점점 발견하게 되는 때 그 때였습니다.”

 

이 인터뷰는 최승일의 비참한 결혼생활발언이 나온 이후 거의 2년이 지난 후에 기사화되었다. 이때 두 사람이 형식적으로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실상 파탄이 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현경의 발언이 대부분 과거형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1928년 말 마현경은 여전히 경성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최승일과 마현경은 이미 결별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현경은 결혼 생활이 학창 시절이나 결혼 전에 동경하던 것과 딴판이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개성은 죽어버렸고 자신의 존재가 남편 최승일의 그늘에 묻혀버렸다는 사실이 그를 절망하게 했다. 마현경은 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타협도 하고 합리화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차차 생각하여 보니 전통과 인습의 뿌리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고 사회제도가 그러 하고 가족제도 같은 것은 더구나 예와 이제가 같은 이상 나의 개성을 양보하고 남편의 개성을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그 가정에서나 그 사회에서 용납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마현경의 반론이나 타협조차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다. 최승일이 싸움만 밤낮 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마현경이 전통과 인습에 양보해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최승일의 최대 걱정이었던 돈 문제가 두 사람의 맞벌이로 점차 개선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혹은 오히려 부부의 맞벌이 때문에 개성의 부딪힘이 더 격렬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마현경으로서는 경제적 부담을 분담하는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되어야 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아이의 문제도 있었다. 최승일이 첫 부인 한영명과 이혼한 것은 결혼한 지 7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뒤이어 마현경과 재혼한 최승일은 결혼 후 거의 3년 가까이 아이가 없자 비슷한 고뇌가 생겼던 것 같다. 대가족의 장남으로써 두 번의 결혼으로 1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는 것은 최승일과 그의 부모를 걱정시켰을 것이다. 마현경도 이에 대해 과민했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마현경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 어린아이를 갖지 못하였으니까 길러가면서 느끼는 일은 말씀할 수 업습니다마는 ... 우리는 아들을 귀여워하되 그의 정신개성의 존재를 귀여워하고 키워줍시다. ... 무리하게도 그 아이를 부모의 마음에 맞도록 키우려고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많습니다. ... 우리는 어쨌든 어린아이의 개성을 존중히 여기어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어른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대할 적에도 어렵게 대합시다.”

 

결혼 후 3년이 지나도록 최승일-마현경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결혼 초기부터 부부싸움을 해 온 사이라면 아이를 가질 기회조차 없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직 갖지도 않은 자녀에 대한 육아관도 사뭇 달랐다고 했다. , 최승일과 마현경은 가난한 살림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남녀평등의 개성 존중과 자녀관에도 큰 차이를 보였다.

 

경성제일여고보 졸업생이자 경성방송국의 첫 공채 아나운서를 역임한 조선의 최상위 모던걸이었던 마현경은 배재고보를 거쳐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문학가였던 남편 최승일에게서 모던보이다운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승일에게 실망한 마현경은 결국 1930년 경에 별거에 들어갔고, 1931624일 이전에 최승일과 정식으로 이혼했다.

 

 

마현경과 최승일의 별거 시기는 그녀가 경성방송국을 사임한 시점과 일치할 것으로 추정된다. 마현경이 1928년에 경성방송국을 사임했다는 방송계 일각의 증언이 있었지만 문헌 근거가 제시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경성방송국의 첫 아나운서 이옥경(李玉景, 1902-1982)의 사임을 마현경의 사임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옥경은 19267월 경성방송국의 시험방송 시기부터 아나운서로 활동했고, 마현경은 1927216일의 정식 개국에 맞춰 채용된 첫 공채 아나운서였다.

 

이옥경은 19283, 둘째 딸 노명자(盧明子, 1928321일생, 미국 이름 노라노, Nora Noh)의 출생과 함께 경성방송국을 사임했고, 이후 마현경은 경성방송국의 유일한 조선인 아나운서로 근무했을 것이다. 종합잡지 <삼천리> 19358월호는 마현경이 경성방송국에서 해고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현경)양도 소화5(=1930)에 방송국의 사업이 일시 정지되어 여자 아나운서를 두지 못하게 될 사정에 이르매 하는 수 없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우울한 얼굴로 몸을 돌이켜 고향 성진(城津)으로 내려간 다음에는 그 후의 ()양의 소식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하니 ... 그 후의 마양은 그야말로 일거무소식(一去無消息)이다.”

 

이 기사의 서술이 사실이라면, 이옥경은 개인 사정으로 아나운서직을 사임한 반면, 마현경은 경성방송국의 경영난 때문에 해고된 것으로 보인다. <삼천리> 기사는 마양은 그 후 백구가 떠도는 동해 바닷가에서 거세게 처드러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애수에 가득 찬 노래를 불렀을 것이고 지금(19307-8월경) 쯤은 사랑의 짝을 찾아 행복된 가정을 이루었을 듯도 하다고 추측 기사를 썼다. 그러나 마현경이 재혼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마현경이 최승일과 이혼한 것은 이 즈음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고향 성진으로 돌아가기 전에 모든 서류작업을 마쳤을 가능성이 높다.

 

요약컨대 최승일과 마현경은 192626일 결혼한 직후부터 경제난과 개성 충돌로 부부싸움이 그치지 않은 비참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이들의 험악한 관계는 <중외일보><조선일보> 등의 일간신문에 보도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일과 마현경은 19305-6월까지는 경성방송국 근무와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마현경과 최승일이 실제로 결혼한 것은 192626일이지만, 혼인신고 날짜는 19281027일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1927년 초부터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파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거의 2년이 지나서야 혼인 신고를 했고, 그로부터 다시 2년이 지나서야 이혼 신고를 했다. 아마도 결별을 결심한 두 사람이 결혼 자체를 취소하기보다는 결혼을 공식화한 다음에 이혼 절차를 밟기로 합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4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경성방송국에서 해고되고, 최승일과 이혼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간 마현경은 삶에 대한 깊은 실망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불행한 생활에 좌절하거나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경력을 바꾸어 학교 교원이 되었고, 이후 계속해서 교육자의 길을 간 것으로 나타났다.

 

1938년의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따르면 마현경은 1939년까지 <전북공립 태인제일심상소학교>의 촉탁 교원으로 근무했고, 193910월에는 총독부가 주관하는 소학교교원자격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며 1940년부터는 <전북공립 태인중앙국민학교>의 훈도(=정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여전히 미혼이었는지, 혹은 재혼하여 가정을 꾸렸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jc, 2026/1/18)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