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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100장면] 44. 서모 이재원

정병호는 <춤추는 최승희>(1995, 17)에서 아버지의 첩인 작은 어머니가 한 사람 있었으니 전주 이씨인 이재원이었다고 밝혔다. 정병호는 최승희의 어머니는 성품이 활달하고 수다스러웠으나 아버지의 첩인 작은 어머니는 매우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고 간략히 서술했다.

 

 

그나마 정병호는 작은 어머니에 대해 언급이라도 했지만 다른 평전들은 이재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강이향의 <생명의 춤 사랑의 춤>(1993, 44-45)에서는 최승희가 유학길에 오르면서 이재원과 이별하는 장면을 짧게 서술했고 강준식이 <최승희 평전>(2012, 20쪽과 52)에서 작은 어머니의 존재를 서술했던 것을 제외하면 이재원에 대한 서술은 극히 드물었다.

 

예컨대 초기의 평전인 서만일의 <조선을 빛내고저>(1958)와 다카시마 유사부로의 <최승희>(1959)에는 이재원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었고, 태정란의 <최승희 회고록>(2004)과 박진욱의 <최승희론>(2007), 배윤희의 <태양의 품에서 영생하는 무용가>(2011) 등의 북한에서 저술된 평전이나 회고록에도 이재원은 언급되지 않았다. 심지어 정수웅의 평전 <최승희>(2004, 16)는 이재원의 사진이 최승희의 어머니로 잘못 설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그 작은어머니이재원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자세히 서술했다. 일어판 <나의 자서전>(1936)1장과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1937)2장과 4장에 걸쳐서 이재원의 배경과 성품을 자세히 소개하고 자신과 이재원 사이의 일을 길게 서술했다. <나의 자서전>(1936, 6쪽) 1장에 나오는 이재원에 대한 첫 서술은 다음과 같았다.

 

다만 한 가지, 그 무렵 밝고 명랑한 우리 가정에도 가끔씩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는 날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은 날이 많아지고 외로움에 시달리는 어머니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어린 마음에도 어둡고 안타까운 그늘이 생기곤 했습니다.”

 

아버지의 첩 이재원 때문에 가정에 우환이 생기곤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작 최승희는 이재원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이재원이 워낙 최승희를 살갑게 보살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 12쪽)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분은 어머니에게는 쓰라린 존재였기에 도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고, 나에게도 그분이 미움의 대상이었을 텐데도, 왠지 그분은 나에게 항상 상냥하고 친절하셨습니다.”

 

 

이재원과 최승희가 한층 더 가까워지게 된 사건도 있었다. 여학교 2학년 시절 최승희가 열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최승희는 3-4일 동안 고열에 시달리면서 의식이 흐려지고 어렴풋한 생사의 갈림길을 방황할 지경이었다. 그때 최승희를 극진하게 간호했던 사람이 이재원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 11-12쪽)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때는 마침 겨울이었습니다. 지독히 춥고 캄캄한 방에 쓸쓸한 다갈색 알전등만 어렴풋이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는데 그 아래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원한 시선을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이 마치 성모의 눈동자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눈동자 주인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상대도 나의 작은 손을 다시 굳게 잡아주었습니다. 바로 그때 나는 질병의 위기가 지났다고 느꼈습니다. 그 시원한 눈동자의 주인은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었습니다.”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1937)에서도 최승희는 이 열병의 경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정신없이 앓다가 불현 듯 눈을 떴을 때, 고요하고 차디찬 밤에 어렴풋이 다갈색의 의미한 전등불 밑에서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같은 중년 부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작은어머니!’ 나는 어렴풋이 이렇게 말하고는 왼손을 내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내 손이 아까부터 이 서모(아버지의 첩)의 손아귀에 부드럽게 쥐어져 있는 것을 느낀 순간,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느 때나 불을 적게 때서 항상 방안은 추웠지만, 하나님의 입김 같은 따뜻한 기운으로 온 방이 훈훈했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과자가 머리맡에 듬뿍 있었으니, 나는 이것이 웬일인지 꿈처럼 느껴졌다. 서모는 알코올을 적신 거즈를 가지고 여러 날 동안 목욕도 못한 내 몸을 말끔히 씻어 주셨다. ‘어디가 아프냐?’ 나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본 서모가 이렇게 물었다. ‘아니요.’ ‘그렇지만 눈물이 고였는걸.’ ‘작은어머니, 너무 기뻐서 그래요.’ 내가 겨우 이렇게 말하자 그는 별안간 나를 꼭 껴안아 주셨다. ‘나도, 나도 기쁘구나.’ 달콤한 아침 이슬과도 같은 서모의 눈물이 내 등에 떨어져 흘러 내렸다.”

 

 

최승희는 평소에도 자신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을 뿐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까지 느꼈던 병상에서 성모의 눈동자하나님의 입김 같은 따뜻한 기운으로 자신을 지켜주던 이재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최승희는 이재원의 태생과 성품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했고 그분의 기구한 운명에 공감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그는 일어판 <나의 자서전>(1936)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 둘째 부인은 이른바 첩과는 다른 분이어서 천한 태생도 아니었고 알고 보니 우리와 같은 양반 출신이었습니다. 행복한 결혼을 하셨지만 불행히도 부군이 일찍 돌아가셔서 기구한 삶을 살아야하겠구나 하고 마음먹을 무렵 아버지를 만나서 둘째 부인이 되셨습니다.”

 

일어판 <나의 자서전>(1936)에서는 이처럼 짤막하게 서술된 내용이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1937)에는 더욱 길고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작은어머니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었다. 그분은 본래 남의 첩 노릇이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당당한 양반 집안의 규수로서 어느 양반 댁의 당당한 신사에게 시집을 갔지만 불행하게도 남편이 일찍 죽고 말았다. 과부가 된 작은 어머니는 마땅히 그대로 정절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가정 사정으로 인해 혼자 살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또다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혼인이란 것도 생각지도 않은 악당들에게 속아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또다시 세상의 차디찬 물결 위에서 울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쯤 화려한 생활을 하는 나의 아버지와 이런 환경에 처한 작은어머니가 만나 뜨거운 사랑으로 연을 맺게 된 모양이었다. 오빠와 나는 이 아버님의 첩을 작은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인자한 품위가 환하게 빛나는 어머님과는 달리 이 두 번째 어머니를 언니나 아주머니를 대하듯이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맞아들였던 것이다.”

 

최승희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뒤에도 작은 어머니는 그 고통과 아픔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어판 <나의 자서전>(1936)과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1937)의 서술이다.

 

둘째 부인의 생활도 아버지의 파산으로 평온했던 꿈이 갑자기 산산이 깨졌고 우리 일가와 마찬가지로 곤경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헤어지고 다른 곳에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점점 더 심한 가난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된 뒤에도 이 분은 우리에게 친절하셨고 진심어린 따뜻한 마음을 다해 주셨습니다.” (1936)

 

그녀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귀금속과 보석 같은 것을 하나씩 팔아서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이미 몰락해 버린 아버지로 부터는 절연이 선고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동시에 별다른 방책이 없던 그녀는 가난하고 순결한 생활에서, 개미가 먹이를 하나씩 옮겨 나르듯이 자기의 몸을 깎으면서까지 우리식구들을 부양하였던 것이다.” (1937)

 

그후 이재원은 재가해서 다른 분과 원만한 가정생활을 하고 계시지만 옛날의 저를 잊지 않으셨다고 최승희는 술회했다. 특히 최승희가 무용가가 된 이후에도 조선 공연을 가게 되면 반드시 뭔가 선물을 가지고 오셔서 변함없이 따뜻한 말과 상냥한 온정으로 나를 꼭 안아 주시곤했다고 전하고, 특히 1936년 봄 최승희가 경성에 갔을 때는 양복 선물을 하셨다고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최승희는 작은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분이 나를 보실 때에는 자식이라도 보는 것처럼 정다운 얼굴을 하십니다. 내게도 이 분은 또 한분의 어머니처럼 친한 분입니다.” (1936)

 

그런데 이 서모는 어젠 일인지 아버님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아주 맹목적으로 사랑해 주었다. 또한 나의 어머님에게도 마지 자신의 친언니에게 하는 것처럼 깍듯하게 그녀를 공경하며 성실하게 대해 주었다. (1937)

 

최승희도 이재원에게 친근하게 대했고 깊은 정을 유지했다. 갑작스럽게 일본 무용유학이 결정되었을 때에도 준비하기에 바쁜 틈을 내어 이재원에게 찾아간 것만 보아도 두 사람 사이의 가까운 관계를 잘 알 수 있었다.

 

 

최승희가 이재원을 어머님과 꼭같이 대했다는 것은 무언의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가 마침내 무용가로 성공의 길을 달리게 되자, 그에게는 각종 잡지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그중에서도 무용가로서의 자신의 반생을 소개하는 글을 자주 요청받았다. 최승희는 가능한 모든 인터뷰 요청과 글 청탁에 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여성잡지 <주부의벗> 19362월호에 실린 조선 태생의 정열의 무희, 최승희의 눈물의 고투사라는 기사에는 서로 마주보는 416쪽과 417쪽에 부모님 사진이 실렸다. 416쪽에는 부친 최준현, 모친 박용경과 함께 찍은 돌 사진이었고 맞은편 417쪽에는 이재원과 함께 찍은 숙명여학교 졸업 당시의 사진이었다. 최승희가 서모 이재원을 친부모와 완전히 꼭 같이 대접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진 배치였다.

 

 

최승희에 대한 조사연구 초기에 필자는 혹시 이재원이 최승희의 생모가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최승희의 자서전은 물론 그밖의 각종 회고의 글에서 친모 박용경에 비해 서모 이재원에 대해 압도적으로 많은 서술을 제공했고, 이재원에 대한 감정의 폭이나 깊이가 박용경 못지않게 넓고 깊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의 나이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큰 차이가 나도록 어렸다는 점도 그 같은 출생의 비밀에 대한 의문을 떨치지 못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 후의 조사연구에서 이 같은 가설적인 출생의 비밀을 더 이상 추구하지는 않았다. 만일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하더라도 최승희를 비롯한 온 가족이 이를 지키기 위해 그다지 노력했다면 이를 굳이 파헤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가상의 출생의 비밀은 최승희 가족에게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어머니 박용경에게는 이재원의 존재 자체가 쓰라린 경험이었겠지만 당시의 사회상에 비춰보면 이재원의 존재는 그다지 이례적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유한 집안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재원과 다른 가족들 사이의 관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끈끈했고 튼튼한 의리가 있었다. 휴머니즘의 관점에서도 이재원을 포함한 최승희 가족들은 주어진 사회 환경 속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와 가족에 대한 책임을 놓지 않았던 훌륭한 사람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jc, 2020/11/29; 2026/1/17/ 2026/5/25)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