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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100장면] 45. 최승일

큰오빠 최승일은 최승희를 무용의 길로 이끌어준 인물이지만, 그 자신도 작가이자 비평가, 연극인이자 방송인으로 활동했으므로 당대와 후대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부친 최준현의 호적에 따르면 최승일(崔承一, 1902-?)은 최준현과 박용경 사이의 장남이다. 이어 장녀 최영희(崔英喜, 1904~?)와 차남 최승오(崔承五, 1906~?)가 태어났고, 다시 6년 후에 최승희(崔承喜, 1911-1969)가 막내로 출생했다. (4남매의 호적상의 생년은 모두 음력이다. 따라서 음력 12월생인 최승오와 최승희는 양력으로는 1907년생과 1912년생이다.)

 

 

그동안 최승일은 1901년생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는 권영민의 <한국근대문인대사전(1990)>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권영민은 1900-1989년 사이에 활동한 문인 2695명의 생애와 문학적 평가, 작품 목록과 연구 문헌 목록을 수록한 문인 사전을 3권으로 발간했는데, 그 첫 권이 <한국근대문인대사전>이다. 여기에는 강경애부터 황순원까지 일제강점기에 문단에서 활동한 395명의 문인이 가나다순으로 실려 있고, 납북 및 월북 문인 110명도 포함되어 있다.

 

이 사전에 수록된 최승일의 출생 정보는 “1901년 서울 근교 보광리이다. 출처나 문헌 증거는 인용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부친 최준현의 호적에는 최승일의 생년월일이 1902522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의 확실성과 구체성의 양면에서 권영민의 주장보다는 공문서인 최준현의 호적 기록을 신뢰하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에는 호적 신고가 늦는 경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기였으므로 돌이 지나서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출생 신고가 늦으면 처벌 조항이 있었으므로 처벌을 피해 실제와는 다른, 늦은 날짜를 신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생일이 음력인지 양력인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따라서 옛 기록의 생년월일을 살필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최승일이 1902년생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1923911일의 <매일신보>(3)는 최승일이 연루된 낙양관 구타 사건을 보도하면서 그의 나이를 22세로 보도했고, 1928420일의 <매일신보>(3)는 마현경과의 결혼 소식을 전하면서 최승일의 나이를 27세라고 밝혔다.

 

당시의 신문은 세는 나이를 보도했으므로, 1923년에 22, 1928년에 27세였다면 최승일의 생년은 1902년이다. (19263월의 신문 기사가 음력 191112월생인 최승희를 16세라고 한 것도 같은 방식의 나이 계산법이었다. 당시 최승희는 만으로 14(+2개월)였다.)

 

<한국근대문인대사전>은 최승일의 출생지를 서울 근교의 보광리라고 밝혔는데 보광리는 지금의 서울 용산구 보광동이다. 그러나 192743일의 <매일신보>(3)는 최승일이 홍천 태생이라고 밝혔다.

 

“(최승일)씨는 원래 강원도 홍천 태생으로 엄격한 가정의 교훈을 받아 자라났으나 천부의 예술적 싹은 자연히 자라고 커서, 씨가 아직 이십이 못 되어서부터 주머니에 돈을 꺼내어 당시에 젊은 문학청년의 유일한 잡지이던 <신청년>을 경영하였답니다.”

 

 

최승일의 부친 최준현은 1874년생으로 1894년에 과거에 합격한 이후로도 상당 기간 홍천에 거주했다. 그가 경성에 첫 주소를 가진 것은 1905년 희릉참봉으로 제수될 즈음이었을 것이다.

 

최준현의 호적과 일제의 <토지조사대장><지적원도>, 그리고 <토지등기부>를 참고하면 그의 가족은 1905420일 이전에 홍천을 떠나 경기도 고양군 모현면 보광리에 일시 정착했다가 곧 한성부 서부 인달방 북문동 1911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최승일은 부친이 한성으로 이주하기 전에 태어났으므로 그의 출생지는 강원도 홍천이다. 따라서 최승일은 “1901년 서울 근교 보광리가 아니라 ‘1902년 홍천군 남면 제곡리출생이다.

 

최승일은 1910년 대한제국 시기의 학령(8)에 도달했고, 당시에 최준현 일가의 주소지는 인달방 북문동 1911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인달방 북문동은 일제강점기에 수창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제강점 직후인 19116월 최준현 가족은 다시 인달방 북문동 185의 가옥을 매입했는데, 그 주소가 일제 강점 후의 주소로는 수창동 198번지였다.

 

 

최승일의 학력은 흔히 배재학당 중퇴와 니혼대학 미학과 중퇴로 소개된다. 그러나 그가 배재학당에 입학하기 전에 어느 보통학교에 다녔는지 언급되지 않아왔다. 1886년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가 고종의 지원으로 설립한 배재학당은 처음부터 중등교육기관으로 출발했다. 1887년 보통과(4년제)와 본과(5년제)를 두기는 했으나, 이때의 보통과란 초등학교가 아니라 중등과정의 특별과라는 의미였다.

 

배재학당의 입학 자격은 ‘17세 이상의 남자로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고 한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보통학교 학령(8)에 입학할 수 없었다. 배재학당은 1916년에 5년제 배재고등보통학교, 1937년에 6년제 배재중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45년에 해방을 맞았다.

 

최승일이 배재학당에 입학하기 전에 수학했던 보통학교는 어디였을까? 필자는 그것이 수창동의 협성보통학교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부친 최준현이 홍천을 떠나 보광리를 거쳐 수창동으로 이사한 까닭이 최승일을 협성보통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협성보통학교는 수창동 198번지의 집에서 걸어서 불과 5분 이내의 거리였기 때문에 서울의 보통학교들 중에서도 가장 가까웠다. 더구나 이 학교는 경성의 모든 보통학교들 중에서도 학부모와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학교였다. 교육의 질이 높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협성보통학교는 1897년 감리교 선교사 아더 베커(Arthur L. Becker, 1897-1978)가 설립한 초등학교이다. 아더 베커는 1915년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함께 조선 기독교 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를 설립했는데, 이는 연희전문학교(1917)을 거쳐 오늘날의 연세대학교가 됐다.

 

최승일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배재학당으로 진학한 것도 협성보통학교의 교육 덕분이었을 것이다. , 명민한 두뇌와 좋은 성적으로 5년제 협성보통학교를 졸업한 최승일에게 아더 베커 교장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진학하도록 권고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최승일이 1910년에 협성보통학교에 입학, 19153월에 졸업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했는데, 2학년 때인 1916년에는 학교가 5년제 배재고등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그는 배재고보 5학년이었던 1919년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했고,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최승일이 유학을 위해 동경에 도착한 것은 1920년 초였다. 최승일은 그해 봄 도쿄에서 결성된 <극예술협회>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또 그가 입학했던 니혼(日本)대학 미학과는 19214월에 문을 열었다. 따라서 이 학교의 입학 자격을 채우기 위해서 최승일은 1920년에 중학교나 영어학교를 다녔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의 본격적인 유학은 1921년에 시작됐다.

 

유학 기간에도 최승일은 <극예술협회>의 회원으로서 문예 운동에 참여했다. 니혼대 미학과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맞은 여름방학 때 도쿄의 조선인 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同友會) 요청으로 연극단을 조직해 조선 순회공연을 가졌다. 이 극단은 192179일부터 818일까지 부산, 대구, 목포,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등의 전국 10개 도시를 순회했다.

 

 

그러나 최승일은 1922년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해 9월 경성에서 결성된 프로문학 단체 <염군사>의 주역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유학을 중단한 것은 가세가 기울었기 때문이다. 그해 부친 최준현은 수입원이던 전답을 잃었고 수창동 집마저 매각해야 했으므로, 도쿄 유학 중이던 최승일에게 학비를 보내줄 수 없었다.

 

19224월에 최승희가 숙명여학교에 입학할 당시에도 집안은 부유했지만, 최승일이 그해 9월 귀국해야 했던 것을 보면, 최준현의 파산은 19224월과 9월 사이였을 것이다.

 

 

당시 도쿄의 조선유학생들 중에는 고학으로 공부를 한 사람들도 있기는 했다. 비슷한 시기에 도쿄에 체류했던 박열(朴烈, 1902-1974)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란 최승일은 생활력이 강했던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최승일의 도쿄 체류는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약 2년 정도였고, 니혼대 미학과 재학 기간은 약 1년 정도였다. (jc, 2026/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