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부계의 기록은 많이 발굴되었지만 모계의 기록은 드물었다. 최승희도 <나의 자서전>(1936) 제2장에서 어머니에 대해 서술했지만, 여기에도 어머니의 가족 배경에 대한 서술은 없고, 어머님의 성품과 일화를 서술했을 뿐이다.
정병호(1995:17)는 종로구청에서 최승희 부친 죄준현의 호적을 열람한 후 “(최승희의)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이름이 성녀 또는 용경”이라고 서술했다. 그런데 최승희 모친의 이름이 2개였다는 서술이 의문을 일으켰다.
조선시대의 여성은 이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렸을 때는 아명이나 별명으로 불리거나 ‘셋째’라거나 ‘끝순이’처럼 형제들 사이의 순서로 불리고 말았다. 결혼한 후에도 ‘누구의 아내’거나 ‘누구의 엄마’ 혹은 ‘어느 지역에서 시집온 여자’라는 뜻으로 ‘XX댁’이라고 불리면 그만이었다. 그랬던 시대에 최승희의 모친이 2개의 이름을 가졌다는 점은 이례적이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종로구청 호적계에 문의한 결과 최승희 모친의 성명은 ‘박용경’임이 확인되었다. 1874년생인 최승희의 모친에게 남성처럼 정식 이름이 있었다는 것이 특이한 일이었다. 박용경의 부모가 딸의 권리를 일찍이 실천한 선구자였거나, 혹은 박용경의 남편 최준현이 결혼과 함께 아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호적에 등재한 이례적인 경우였을 것이다.

최승희 모친의 이름은 일본의 여성잡지 <주부의벗> 1936년 2월호(20권2호)에 실린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승희의 출생 후 한돌 기념사진으로 보이는 이 사진의 설명에는 양친의 모습과 함께 이름이 나온다. 여기에 모친의 이름이 박용경(朴容卿)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다만 이 잡지 기사는 부친의 이름을 박용경(朴容卿), 모친의 이름을 최준현(崔濬鉉)이라고 하여, 부모의 이름을 뒤바꿔 놓았다. 아마도 일본인 편집자가 조선인의 남성 이름과 여성 이름에 익숙하지 않아 저지른 실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은 최승희의 모친 이름이 박용경임을 교차 확인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렇다면 정병호가 언급한 ‘박성녀’는 누구일까? 종로구청 호적과에서 확인해 준 바에 따르면, 박성녀(朴姓女)는 최준현의 아내가 아니라 그의 모친, 즉 최승희의 조부 최재건의 아내의 이름이었다. 박성녀란 ‘박(朴)씨 성(姓)을 가진 여(女)자’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일제강점과 함께 호적이나 민적에 여성도 이름을 등재해야 했다. 이때 여성의 이름이 급조된 경우가 많았다. 박용경처럼 이미 사용되고 있던 이름이 등재된 경우는 드물었다. 양반들은 그나마 딸에게 이름을 지어준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평민이나 노비계층의 여성들은 거의 이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일제의 강제 때문에 여성도 민적에 이름을 올려야 했으므로 어떻게든 이름을 만들어내야 했다.

민적 등재를 위해 급조된 여성의 이름 중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이 “X성녀(X姓女)”였다. 여성의 친가의 성을 가져와서 “그 집안 출신의 여성”이라는 식으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따라서 ‘박성녀’나 ‘김성녀’, ‘심성녀’처럼 성만 다르고 이름이 ‘성녀’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이 원래 이름이 같아서가 아니라 ‘그 성을 가진 여성’이라는 뜻으로 급조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인텔리 계층의 여성에서도 “X성녀”라는 이름이 발견된다. 시인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41년경 정병욱과 함께 약 반년 동안 기거했던 서촌 누상동의 하숙집 여주인의 이름도 “조성녀(趙姓女)”였다. 조성녀의 남편 김송은 소설가였고, 그녀 자신도 여학교와 유학을 마치고 성악가가 된 신학문과 신문물의 수혜자였지만 민적 등재 전까지는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정병호의 서술에 오류가 있기는 했으나 박성녀와 박용경의 이름을 모두 언급한 것은 도움이 되었다. 조사해 보고 싶은 의문을 불러 일으켜 주었기 때문이다. 취재 결과를 요약하면, 최재건-박성녀 부부가 최준현과 최문현의 쌍둥이 형제를 자녀로 두었고, 최준현-박용경 부부가 최승일, 최영희, 최승오, 최승희의 4남매를 자녀로 두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박용경이 밀양 박씨였다고 밝힌 정병호의 평전을 제외하면 최승희의 모친 박용경에 대한 인적사항을 제공하는 자료는 발견된 바 없다. 최승희의 자서전은 물론 모든 평전을 섭렵해도 박용경의 가족 배경이나 인적 사항이 기술된 것은 없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최승희 홍천 출생설’을 주장했던 함광복의 글이다. 함광복의 ‘홍천 출생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 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함광복이 수집한 자료들은 여전히 소중하며, 검증 과정을 거쳐 잘 활용될 필요가 있다.
최승희의 모계에 대한 함광복의 공헌은 박용경의 모친이 ‘관기로써 홍천 원의 소실이었다’는 증언을 확보한 것이다. 2006년 당시 75세였던 홍천군 남면 제곡리 주민이었던 변병덕(邊炳德)씨의 증언이었다. 그의 증언을 전하는 함광덕의 글을 다소 압축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변병덕)는 ... 어려서 발새가 물커지는 병으로 고생을 했다. 부친은 쥐손이풀이 약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자터에 홍천 원의 소실(小室)의 묘가 있었다. 그 무덤가에 쥐손이풀이 많이 자랐다. 소년은 어른들로부터 소실의 외손녀에 대한 자자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소실의 딸이 해주 최씨네 집으로 시집가 낳은 딸 하나가 춤꾼이 되어 일본, 중국까지 이름을 날린다는 것이다. ... 최승희의 부친 최준현은 밀양 박씨 성을 가진 홍천 원을 아버지로 둔 여인과 혼인한 것이다. ... 제곡리는 흉흉한 소문 속에서 6.25를 맞았다. 미군 불도저가 삽날을 들이댔더라도 감히 빨갱이의 외조모 무덤 앞을 가로막지 못했을 것이다. ... 2006년 2월 22일, 비로소 쥐손이풀 무덤의 전설을 털어놓던 변씨는 그렇게 말했다.”
변병덕씨의 증언을 요약하면 제곡리 어귀의 자터에 최승희의 외할머니의 무덤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중에 미군 불도저에 밀려 사라졌는데, 이 외할머니는 밀양 박씨 성을 가진 홍천 원(=현감 또는 군수)의 소실이었으며, 그 두 사람의 딸이 최승희의 어머니 박용경이라는 것이다.
무덤과 비석이 사라져 버리고 변병덕씨도 사망한 지금 함광덕의 주장을 검증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최승희의 모친 박용경의 부친이 누구였는지 찾아볼 방법은 있다. 조선말 헌종(재위 1834-1849)과 철종(재위 1849-1864)과 고종(재위 1864-1907) 시기에 재직한 홍천 현감이나 군수 중에 밀양 박씨가 있었는지 살피는 것이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헌종 시기의 홍천현감이 8명, 철종 시기의 홍천현감은 7명이었으나 그중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고종시기에는 홍천현감과 홍천군수로 재직한 사람이 24명이었는데 그 중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두 명이었다. 고종11년(1874년) 7월13일 기록의 박제성(朴齊性)과 고종23년(1886년) 10월12일 기록의 박제억(朴齊億)이다.
박제억의 부친은 박인수(朴麟壽), 박제성의 부친은 박겸수(朴兼壽) 생부는 박용수(朴容壽)라고 하므로 박제억과 박제성은 형제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현감 재임 사이에 약 12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박제성이 1823년생, 박제억이 1825년생이므로 둘 다 최승희의 외조모, 즉 박용경의 모친을 소실로 맞을 수는 있는 연배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박제억과 박제성은 둘 다 ‘밀양 박씨’가 아니라 ‘반남 박씨’였다. 따라서 종로구청의 호적에 기록된 박용경의 본관으로 기록된 ‘밀양 박씨’가 오기가 아니라면, 최승희의 외조모가 밀양 박씨 성을 가진 홍천 원의 소실이었을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변병덕의 증언이 구체적이고 이를 전하는 함광복의 서술이 유려해도, 최승희의 모친 박용경이 홍천 원 소실의 여식이었다고 주장하기 어렵다. 결국 최승희의 외가 쪽 가계를 파악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 진 것이다. (jc, 2020/11/29; 2026/1/17/ 2026/5/2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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