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호는 <춤추는 최승희>(1995, 17쪽)에서 최승희가 “윗대 선조가 정승 판서를 지낸 해주 최씨 명문가 출신”이라고 서술했다. ‘정승 판서를 지냈다’라는 말은 정부 고위직을 지냈다는 관용적 표현이겠지만, 실제로 총리와 장관을 역임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과연 최승희의 가계가 속한 해주 최씨가 명문가였는지를 조사해 보기로 했다.
해주 최씨의 관향은 황해도 해주(海州)이다. 해주는 대령(大寧) 혹은 고죽(孤竹)이라고도 불렸기 때문에, 해주 최씨는 대령 최씨, 또는 고죽 최씨라고 불리기도 한다. 해주 최씨의 시조는 최온(崔溫)으로, 고려의 문신이자 해동공자로 불릴 만큼 유학에 조예가 깊었던 최충(崔沖, 984-1068)의 부친이다.

고려의 정승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수장인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상서성(尙書省)의 두 수장인 좌정승과 우정승이다. 조선의 정승은 의정부(議政府)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다. 정승의 품계는 정1품으로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판서는 고려의 6부, 조선의 6조의 수장을 가리키는 정2품의 벼슬이다. 오늘날 정부 각 부처의 장관에 해당한다. 고려 6부의 수장은 판사(判事), 조선 6조의 수장은 판서(判書)라고 불렸다.
해주 최씨 가문은 고려시대에 4명의 문하시중(최충, 최유선, 최사추, 최유염), 조선시대에는 3명의 정승(최규서, 최황, 최효원)을 배출했다. 최규서(崔奎瑞, 1650-1735)는 생전에 영의정을 역임했지만 최황(崔滉, 1592-1603)과 최효원(崔孝元, 1638-1672)은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따라서 해주 최씨의 “윗대 선조가 정승 판서를 지냈다”는 서술은 잘못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최승희의 “직접적인 선조”였을까? 함광복은 <우리는 왜 최승희의 홍천을 찾아야 하는가>(2006)에서 최승희 일가를 해주 최씨의 전한공파(典翰公派)로 추정했다. 전한공파의 시조는 성종(재위 1469-1494) 시기의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역임한 최연(崔堧)이다. 제용감은 왕실에 의복과 식품을 공급하는 관청으로, 그 수장인 제용감정은 정3품의 벼슬이다.
최연은 제용감정에 취임하기 직전에 종3품인 전한(典翰)의 관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해주 최씨의 전한공파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전한은 세조12년(1466년)에 신설된 예문관 소속의 관직으로 왕에 대한 자문과 교육, 문서와 서책의 저술과 출판을 담당했다.

최연은 세종 시기에 집현전 부제학을 역임한 최만리(崔萬理, 1398-1445)의 다섯째 아들이다. 오늘날 약 20만 명에 달하는 해주 최씨 인구의 절반가량이 최만리의 다섯 아들을 파조로 하는 현감공파(縣監公派; 장남 최각,崔塙), 좌랑공파(佐郞公派: 2남 최정, 崔埥), 생원공파(生員公派: 3남 최당, 崔塘), 진사공파(進士公派: 4남 최은, 崔垠), 전한공파(典翰公派: 5남 최연, 崔堧)에 속한다.
최연의 아들 최세걸(崔世傑, 1458-1503)은 연산군 시기에 사간원의 헌납(獻納, 정5품)을 역임했다. 헌납은 왕에게 바른 말을 하는 간관으로 연산군에게 야간 사냥의 부당함을 간언했다가 파직, 부관참시를 당했지만, 후에 중종이 억울함을 풀어주고 병조참의 벼슬을 추증했다.
최세걸의 손자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은 시조 <묏버들>의 저자로 알려진 함경도 홍원현 출신의 기생 홍랑(洪娘)과의 사랑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관기였던 홍랑은 최경창이 병들었을 때 목숨을 걸고 관할지를 떠나 그의 병수발을 들었고, 최경창이 사망한 후에는 6년 동안 시묘 살이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는 경종 시기(재임 1720-1724)의 최규서가 해주최씨 전한공파가 배출한 유일한 영의정이었고, 그의 아들 최상리(崔尙履)는 해주최씨의 23세손이다. 따라서 최승희 일가가 최규서-최상리의 직계 후손이라면 “윗대 선조”가 정승 판서를 지냈다는 서술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주최씨 전한공파의 족보를 조사한 함광복은 최승희 일가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최승희 일가가 대부분 월북했기 때문에 해주 최씨 전한공파의 족보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함광복은 추정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가계의 족보 기록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최승희의 ‘윗대 선조’를 살피는 또 다른 방법은 조선시대의 과거 급제자들의 명단인 <사마방목(司馬榜目)>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과 본관, 거주지와 부친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고, 부친의 이름에는 그들이 역임했던 관직명도 기록되어 있다.

<사마방목>에 따르면 최승희의 조부의 이름은 최재건(崔載鍵)이다. 부친 최준현이 과거에 급제했기 때문에 그의 부친도 기록에 남은 것이다. 최준현의 급제 당시 부친 최재건의 품계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정3품), 관직은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이었다. ‘절충장군’이란 무반의 품계이며 용양위 소속 ‘부호군’은 종4품의 관직이다.
최재건은 두 아들이 진사과에 나란히 합격한 직후인 1896년에 홍천군수에 취임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관직이었다. 조선시대 군수의 품계는 종4품이었으므로 결국 최재건은 품계에 맞는 관직을 역임하지 못하고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최재건은 1883년 부사과(종6품)의 품계를 받고 1890년 1월에는 사천 현감(정6품의 관직)에 부임했고, 1890년 11월에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고 12월에 총어영 기사장(정3품 관직)을 거쳐 사천군수를 역임했다.
최승희는 1932년 2월22일 사천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공연장이 사천읍내 요리점이었던 명월관이었다. 극장도 없는 사천에서 무용공연이 단행되었던 것은 사천 현감과 군수를 역임한 조부 최재건이 아직 그 지역에서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홍천군수를 역임한 후 최재건은 비리 혐의로 감사를 받았다. 직속상관이었던 강원도 관찰사 이봉의(李鳳儀, 1839-1919)와 대립해 논쟁을 벌이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갈등상황이 1897년 6월29일자 <독립신문>(4면)에 보도되었다. 1898년 1월4일자 <독립신문>(3면)에 따르면, 최재건은 이 비리 혐의로 징계를 받았고 이후 다시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사마방목>에는 최재건의 과거급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1880년에 이름을 최진태(崔鎭泰)에서 최재건으로 개명했기 때문이었다.
최진태라는 이름으로 <사마방목>을 조사해 보니, 3명의 최진태가 발견되었다. 그중 해주 최씨는 1명이었는데, 그는 1829년(순조29년) 기축년 정시의 병과에 급제했다. 당시 최진태의 나이는 26세였는데, 그의 본관이 해주 최씨였을 뿐 아니라 거주지도 해주로 기록되어 있었다. 즉, 최승희의 조부 최진태는 해주에서 태어나 그곳에 거주하다가 후일 홍천군수를 역임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홍천에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최진태=최재건이 홍천군수를 역임한 것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었다. 만일 그가 홍천 출생이었다면 조선시대의 상피제도 때문에 홍천의 군수로 부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최진태=최재건이 홍천군수를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향이 홍천이 아니라 해주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 최진태가 최승희의 조부였는지에 대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는 1804년(순조4년) 출생인데 그 아들 최준현과 최문현이 1874년생이다. 최진태=최재건이 70세에 쌍둥이 아들을 낳은 셈이다. 또 그가 홍천군수에 취임했던 1896년에는 그의 나이가 92세였다. 조선시대에 92세의 노인이 군수에 임명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생년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사마방목>에 기록된 이 최진태가 과연 최승희의 조부였는지에 대해서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 최진태의 부친, 즉 최승희의 증조부의 이름은 최상길(崔尙吉)이었다. 그의 관직이 유학(幼學)이라고 기록되었으므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마방목>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으로는 증조부 최상길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 가계를 조사하기 어렵다.
최승희의 증조부 최상길(崔尙吉)과 영의정 최규서의 아들 최상리(崔尙履)의 돌림자가 같고 비슷한 시기(17세기 말-18세기 초)에 생존했으므로 이들이 인척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최상리는 영의정 최규서의 독자였기 때문에, 최상리와 최상길이 이명동인(異名同人)이 아니라면 최승희는 영의정 최규서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을 것이다.
즉, 조선의 공문서 기록에 따르면 최승희의 부친과 조부와 증조부의 관직은 “정승판서”에 이르지 못했다. 또 최승희의 가계가 영의정 최규서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면, 파조 최연부터 조선 왕조가 망하기까지 해주 최씨 전한공파가 배출한 인물 중에는 정1품의 정승이나 정2품의 판서가 없었다. 전한공파가 성립하기 직전, 최연의 부친인 최만리의 벼슬이 가장 높았지만, 그의 관직도 집현전 부제학으로 종2품에 머물렀다.

정병호가 <춤추는 최승희>에서 최승희가 “윗대 선조가 정승 판서를 지낸 해주 최씨 명문가 출신”이라고 서술한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해서 해주 최씨 가문은 많은 중요 인물을 배출했다. 다만 조선조의 공적 기록을 따라 최승희의 가계를 조사해 보면, 전한공파가 해주 최씨 가문의 주류를 형성했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글의 결론은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해주 최씨의 족보를 포괄적으로 조사하면 좀 더 자세한 사항이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기록인 족보가 역사적 변란기에 자주 변조되기도 했던 점을 고려하면 족보의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최승희의 가계가 해주 최씨 전한공파의 족보에서 사라진 것이 그 한 가지 예이다. 상황에 따라 유리하면 강조되고 불리하면 폄하되거나 삭제되는 것이 사기록의 특징이다. 따라서 향후 최승희의 가계를 조사하는 연구자들은 사기록과 공기록을 종합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jc, 2026/6/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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