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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100장면] 41. 부친 최준현

최승희의 가족 사항은 최승희의 자서전과 평전에 어느 정도 밝혀져 있다. 특히 부친 최준현(崔濬鉉, 1874-1950)에 대해서는 정병호의 <춤추는 최승희>(1995, 17)에 요약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최승희는 윗대 선조가 정승 판서를 지낸 해주 최씨 명문가 출신이며, “아버지 최준현은 고종 때에 진사에 합격했으며 해주 최참봉으로 통했다고 정병호는 서술했다.

 

함광복은 <월간 태백>(19894월호)을 인용하여 최준현이 해주최씨 전한공파 31세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최승희 가족들의 이름이 대령군파 혹은 좌랑공파의 항렬을 따르고 있는 것이 이상하며, 더구나 최승희 일가는 고죽공파에 속한다는 증언도 있어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했다.

 

 

최준현과 함광복의 서술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 일었다. ‘윗대 선조가 정승 판서를 지냈다는 것은 사실일까? 홍천에 살던 최준현이 어째서 해주 최참봉으로 통했을까? 과거의 진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왜 참봉으로 불렸을까? 최준현 일가는 해주 최씨의 전한공파에 속했다면서 다른 파족의 항렬을 따랐을까? 무엇보다도 해주최씨 대종회가 정리한 28개 분파 중에 고죽공파라는 분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서술들을 자세히 검증해 볼 필요가 있었다.

 

최준현이 홍천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 조선에서 양반이라고 부르는 우리 집안은 일본 계급으로는 사족과 화족의 중간에 속하는 명문가라고 서술했다. 자서전의 첫 장도 시골의 큰 부자 집안에서 태어나신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다. 최승희는 그 시골의 지명을 밝히지는 않았는데, 일본어로 저술한 자서전에서 일본인들에게 낯설 수밖에 없는 조선의 지명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최준현이 홍천 태생임을 서술한 다른 문헌도 있다. 193823일의 <신한민보>(2)는 최승희를 강원도 홍천의 최준현씨 영애라고 소개했다. 함광복은 이 기록을 최승희가 홍천 출생이라는 결정적인 문헌 증거로 제시했으나 그 증거능력은 그다지 결정적이지 않다. 이 서술은 최승희가 아니라 최준현이 홍천 출신이라는 증거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조선의 과거 합격자 명단을 수록한 <사마방목(1902)>도 최준현이 1894215일에 실시된 갑오년 식년시 생원진사과의 복시에 응시해 3등으로 합격했다고 기록하면서 그의 초시 응시 지역과 거주지를 홍천이라고 밝혔다.

 

조선의 마지막 과거였던 갑오년(1894) 식년시에는 최준현뿐 아니라 그의 동생 최문현(崔渂鉉)도 응시했는데, 형 준현은 시(), 동생 문현은 부()로 응시해 나란히 합격했다. <사마방목>은 또 진사시 합격 당시 두 사람의 거주지가 홍천이며 둘의 나이가 21세라고 기록했다. 준현-문현 형제는 쌍둥이였을 것이다.

 

 

정병호는 최준현이 진사에 합격해서 해주 최참봉으로 불렸다고 서술했으나, 그가 참봉벼슬에 나간 것은 진사시에 합격하고도 10년이 더 지난 후였다. 고종32(1905) 420일의 <승정원일기>는 최준현이 희릉참봉에 임명되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최준현은 홍천에 거주하는 동안에는 해주 최참봉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경성으로 이주한 후에는 그런 호칭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진사는 소과의 합격자에게 수여되는 학위이며 성균관 입학자격을 제외하면 그 자체로 품계나 관직이 아니다. 그러나 참봉은 관직이다. 9품의 말직이지만 조선왕조의 왕릉을 지키는 공무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관직이었고, 더 높은 관직으로 나아갈 발판이었다.

 

특이한 점은 최준현이 희릉참봉을 제수 받은 지 하루 만에 사임했다는 점이다. 421일의 <승정원일기>희릉참봉 최준현이 의원면직되었다고 기록했고, 1905426일의 <황성신문(1)>도 최준현이 “420일 서임되었다가 421일에 의원면직되었다고 보도했다.

 

 

참봉 벼슬에 재임한 것이 하루에 불과하고 실제로 희릉에 부임조차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복무할 의사가 없으면서도 참봉 벼슬을 받았던 것은 조선 사회에서 관직에 나갔다는 사실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참봉 벼슬을 했던 사람은 제사를 받을 때 지방에 학생대신에 참봉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1905년이면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삼키려던 상황이었으므로 조선 왕조시기의 벼슬 경력이 특권이나 혜택이 될 수 없었고, 이는 최준현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루 만에 의원면직을 신청할 벼슬을 제수 받았던 이유는 한성(=서울)으로 이주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한성 이주를 결심한 것은 자식들에게 신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최준현은 관직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재운은 좋았다. 최승희도 자서전에서 시골의 큰 부자집안에서 태어나신 아버지시골의 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어 농사를 짓게 하는 이른바 부재지주였다고 썼듯이 아버지 최준현은 홍천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국이 발간한 강원도 홍천의 <토지조사부(1912)><지적원도(1912)>를 보면 최준현은 남면 제곡리에 49건의 부동산을 소유했다. 여기에는 논과 밭, 임야와 가옥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동생 최문현의 이름으로 등록된 부동산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최준현의 부동산은 문중의 재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준현의 부동산은 강원도 홍천에 국한되지 않았다. 1907521일의 <황성신문> (41)에 따르면 최준현은 고양군 송산면 가좌동 후율리에도 12마지기의 땅을 소유했다고 보도되었다. <임야조사부>(1918)<임야원도>(1918)로 확인해 보니 이 땅의 규모는 약 3,800평이었고, 소재지는 고양군 송산면 가좌리 산81번지였다.

 

최준현은 강원도와 경기도 일원에 많은 땅을 소유한 부유한 부재지주였고, 관직이나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도 부유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최승희가 <나의 자서전>(1936)에서 시골의 큰 부자 집안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사람이 좋으셨고 ... 경성에서도 태평스럽게 생활할 수 있었다고 서술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최승희가 아버지를 가리켜 사람이 좋으셨다고 평가한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우선 가족들에게 보였던 온화한 성품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높지만, 동시에 남의 말에 쉽게 귀 기울이는 경향을 가리켰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넉넉한 재산을 바탕으로 이웃을 돕거나 사회적으로 뜻있는 일에 선뜻선뜻 기부금을 내는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켰을 수도 있다.

 

실제로 최준현은 사회사업, 특히 조선사회의 문명개화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자신은 한학을 공부해 과거를 보고 참봉 관직을 제수 받은 한학자였지만, 네 자녀는 모두 신학문을 공부하게 했다.

 

 

그는 또 경성 이외의 지역에 신문을 보급하는 운동에도 참여했다. <황성신문>1906년부터 1909년까지 문명록(文明錄)” 운동을 벌였는데, 이는 경향 각지에 신문보내기 운동이었다. 특히 신문을 구독할 여력이 없는 지방에 <황성신문>을 보내서 나라 소식을 알리는 운동이었는데 이에 필요한 비용은 독자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하였다. 190682일부터 시작된 문명록 기부금은 190972일까지 거의 3년간 계속되었고, 최준현도 여기에 적어도 3회 이상 기부금을 보낸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문명록 운동이 시작된 지 약 2달 만인 1906109일의 <황성신문>(3)은 최준현이 310전의 기부금을 보낸 사실을 게재했다. 이 기부자 명단에는 훗날 서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건영씨(632)와 불교대학인 동국대학의 전신인 사립 명진학교의 초대 교장 안순극씨(629)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같은 기부금의 액수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얼마나 되는지 따지기는 쉽지 않다. 최준현의 기부금은 이건영, 안순극보다는 적었지만 대구사범학교(3)와 중교의숙(15) 등의 기관 기부자들보다 많았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로서는 꽤 거액의 기부자였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후 최준현씨는 1907114일과 1907712일의 <황성신문> 문명록에도 이름이 올라 144전과 15전의 기부금을 낸 사실이 보도된 것으로 보아, 그가 문명록 기부자로 지속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도 최준현은 <황성신문>을 직접 후원하기도 했다. 190735일의 <황성신문> 2면에는 최준현씨가 어제 본사에 금화 1원을 의연하였기에 이에 감사한 뜻을 보냅니다라는 특별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당시의 화폐단위가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에서는 금화 1()’이라고 쓴 것을 보면 뭔가 특별한 기부였거나 거액의 기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준현씨는 지역 사회의 유지 역할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인 홍천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191058일의 <황성신문>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도됐다.

 

강원도 홍천군 금물산면의 지세액 중에서 수백 결이 광주군 수어영에 부속 납세되어 둔결이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었으되, 토지는 민유확거에 구권이 자재하여 무토둔이 분명한데 이 군의 재무서에서 국유로 간주하려하여 측량 조사함으로 인민이 원앙함을 재무감독국에 고소할 뜻으로 지주대표인을 선정하여 상경하였다.”

 

, 민유지 소출의 세금은 해당 관아에 내는 것인데, 이를 국유지로 간주하여 중앙정부 기관인 수어영에 귀속한 것은 부당하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기 위해 금물산면의 지주 대표가 서울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같은 날자 <황성신문> 3면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문도 실렸다.

 

본면의 결둔 사건으로 각 지주가 회의하고 관에 진정한 것은 각 재경 지주 여러분께서도 널리 알고 계신 바, 본인 등을 대표로 뽑아서 상부에 다시금 호소하려고 상경하였사오니, 재경 지주 여러분께서는 서부 인달방 북문동 상우대로변 1911호 최준현씨 집으로 빨리 오셔서 의논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강원도 홍천군 금물산면 지주 대표인, 최정현, 김응식 등 올림.”

 

이 광고기사는 58일에 이어 10일과 12일에도 <황성신문>에 게재되었다. 홍천군 금물산면의 재향 지주들의 대표가 서울로 파견되고, 재경 지주들을 결집시키는 한편, 이를 위해 3일 연속 광고기사까지 게재한 것을 보면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금물산면 지주들의 노력이 절실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최준현씨의 집을 연락처로 삼은 것은 연락이나 회집이 편리하였거나 혹은 최준현씨가 이 청원 운동의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홍천군 금물산면의 결둔 사건에 대한 후속보도가 없으나, 이 광고기사를 통해 19105월경의 최준현의 주소가 한성부 서부 인달방 북문동 상우대로변 1911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태조5(1396)이래 한성을 5(,,,,중부) 52()으로 나누었는데, 인달방(仁達坊)은 서부에 속한 11개방의 하나였고, 인달방은 다시 8개의 계()로 나뉘었는데 최준현의 주소지 북문동은 봉상시계(奉常寺契)에 속했다.

 

봉상시는 국가의 제례와 묘호와 시호를 관장하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관청이다. 관청이름에 절 사()자가 쓰였고, 이를 왜 라고 읽었는지 의문이었는데, 아마도 여기에 내시라는 새김이 있는 것과 관련된 듯하다. 이 관청은 1894(고종31)에 봉상사(奉常司)로 개칭되었다가 1907년 일제의 통감정치 아래서 폐지되었다.

 

북문동(北門洞)봉상시(奉常寺)의 북문지역에 붙은 이름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서울지명사전(2009, 370)>에 따르면 북문동은 내수동 244-250번지에 해당한다. 일제강점 이후 서부 인달방의 내수동과 대창동과 북문동 등은 수창동으로 통합되었는데, 이는 내수사와 대창동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동리 이름이었다. , 대한제국 시기의 북문동은 일제강점기의 수창동에 속했다.

 

 

<토지등기부>에 따르면 최준현은 1911627경성 서부 인달방 북문동 185의 가옥을 등기했다고 기록했는데, 대한제국 시기의 이 주소는 일제강점기에 수창동 198번지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주소는 <황성신문>의 광고기사에 등장한 최준현의 주소(북문동 1911)와 같은 지역이지만 다른 가옥임을 알 수 있다. , 최준현은 일제강점 직전인 19106월 이전에도 여전히 수창동에 살고 있었다.

 

최준현은 막내딸 최승희가 경성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했을 때 그 운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정병호는 <춤추는 최승희>(1995, 54)에서 온 가족이 무용연구소 운영에 참여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는 최승일의 협조로 순조롭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연구소를 관리하고 최승일은 매니저 노릇을 해 주었다. 때마침 둘째 오빠인 최승오가 소학교 선생이 되어 경상북도 영천으로 부임했으므로 집안의 경제적인 어려움 또한 조금씩 풀려나갔다.”

 

최준현은 최승희의 지방공연이나 영화촬영 때에도 동행하면서 연구소장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1937년 무용영화 <대금강산보> 촬영을 위해 금강산 로케 당시의 일행을 촬영한 사진 중에도 남편 안막과 함께 부친 최준현의 모습이 발견된다.

 

 

최준현이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는 공적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함광복은 <우리는 왜 최승희의 홍천을 찾아야 하는가>(2006)에서 최승희의 먼 친척인 이종선이 6.25 때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최승희 아버지가 집을 지키고 있던 가회동 최승희 집으로 피난했다고 서술했다.

 

정병호는 <춤추는 최승희>(1995, 287)에서 안제승과 최병창의 회상을 통해, 최준현이 한국전쟁 중에 사돈인 안창선의 집 문간채에 거주하다가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삼청동 공원에 가매장되었다가 후일 화장되어 산에 뿌려졌다고 서술했다.

 

따라서 최준현은 인민군의 서울 점령기간(1950628-928)에 가회동 11번지에 거주했고, 서울 수복 전투 중에 가회동 집이 파괴되자 사돈 안창선의 팔판동 88번지로 옮겨 거주하던 중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망 당시 최준현은 76세였고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노령 또는 숙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jc, 2022/4/28; 2026/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