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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100장면] 38. 서대문정 1정목 122번지

니시키 마사아키는 <떠돌이 무희>(2010, 27-28)에서 최승희 가족의 주소 2개를 언급했다. “수창동 134번지서대문정1정목 122번지이다. 이중 수창동 134번지는 최준현이 법적으로 소유한 적이 없지만,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는 소유한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서대문정1정목은 지금의 서소문1가를 가리킨다.

 

 

<토지조사부>(1913)는 이 주소지가 정()모씨의 소유라고 기록했다. <부동산등기부>에 따르면 최준현이 1917529일 이 가옥을 매입했다가, 191861일 조()모씨에게 매각했다. 즉 법적으로 최준현이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를 소유한 기간은 약 1년 정도였다.

 

불과 1년 동안 소유했던 집의 주소인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가 그로부터 6년이나 지난 19224월에 최승희의 학적부에 기재된 까닭은 무엇일까? 학적부의 주소는 그곳에 가면 그 학생 혹은 그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에는 최준현의 일가 혹은 가족의 일부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최준현은 이 가옥의 법적 소유자는 아닌 경우에도 이 집의 실질적인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보다 더 늦은 시기에도 이 주소지에 최준현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19298월 최승희가 무용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했을 때, 한동안 무용연구소의 주소를 옥천동 65번지에 두었다. <부동산등기부>에 따르면 이 주소지는 192946일 박용경(朴容卿)에게 매각되었는데, 박용경은 최준현의 아내이자 최승희의 모친이다.

 

 

<부동산등기부>에는 박용경이 옥천동 65번지 가옥을 매입했을 당시에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에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었다. 옥천동 65번지가 무용연구소로 사용되었으므로, 가족이 거주할 곳이 따로 있어야 했고, 그곳이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였을 것이다.

 

<부동산등기부>는 박용경이 193572일 옥천동 65번지 가옥을 이()모씨에게 매각했다고 하므로, 최준현 가족이나 일부가 적어도 19294월부터 19357월까지 약 6년 동안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준현이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를 1917529일에 매입했다가 19186월 조()모씨에게 매각한 후에도 실질적 소유자로서 계속 이 주소지에 거주했다면, 최준현 가족의 전부 혹은 일부가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에 거주한 기간은 1917년부터 1935년까지 약 18년에 달한다. 그래서 이 주소가 수창동 134번지와 함께 최승희의 학적부에 기재된 것이다.

 

최준현 일가가 1917년보다 더 이른 시기에 서대문정1정목에 거주했을 수 있다는 기록도 있다. 1927929일의 <매일신보>(3)에는 경기도의 보통학교와 소학교 교원자격 시험 합격자 명단이 발표됐는데, 여기에 최승희의 작은 오빠 최승오가 포함되었다. 이 명단에는 이름과 함께 본적지가 기록되었는데, 최승오의 본적지가 경성부 서대문정이었다. 신문 기사에는 번지가 기입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였을 것이다.

 

 

본적이란 부친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최준현처럼 지방에서 서울로 완전히 이주한 경우에는 본적지를 새로 설정하곤 했다. 그럴 때는 대개 새로 이주한 곳의 주소를 본적지로 설정했다. 음력 190612(양력 19071) 출생인 최승오의 본적이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였다면, 그때 최준현이 이미 경성에 거주지를 마련했다는 뜻이다.

 

필자는 최준현 일가가 언제 무슨 이유로 경성으로 이주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을 세웠었다. 첫째는 최준현이 1905년에 제수된 희릉 참봉에 취임하기 위해서 경성으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가설이었고, 둘째는 장남 최승일의 학령기에 맞추어 19104월 이전에 이주했을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19071월생인 최승오의 본적이 서대문정1정목 122번지였다면, 최준현 일가는 19071월 이전에 이미 경성 이주를 마쳤다는 뜻이다. 즉 장남의 학령기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경성 이주를 단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최준현이 1906년경에 경성 이주를 결심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최준현은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자녀들에게는 신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신념 아래 경성 이주를 실행에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jc, 2026/1/16; 2026/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