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광복은 최승희가 1911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고, 학령기를 맞은 1918년경 부친 최준현을 따라 서울로 이주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최준현이 서울로 이주한 것은 1905년 4월 그가 희릉참봉을 제수 받았던 때였다. 이때는 최승희의 출생 전이므로, 최준현은 장남 최승일의 학령기를 미리 고려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황성신문>은 최준현이 1906년 이래 문명록 운동(지방에 신문 보내기 운동)에 여러 차례 기부금을 냈고, 1907년 5월경 고양군 송산면 가좌리 산81번지에 약 3천8백평 규모의 땅을 소유했다고 보도했다. 1910년 5월8일의 <황성신문>(1면)은 최준현의 주소가 “인달방 북문동 상우대로변 19통11호”라고 밝혔는데, 조선시대의 북문동은 일제강점기에 수창동, 해방 후의 내수동이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최준현은 1911년 6월17일 수창동 198번지의 51평 기와집도 매입했다.

최준현은 1907년에 고양군의 토지, 1910년에 서울 주소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가 1918년에야 홍천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다는 함광복의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최승희의 홍천 출생설을 주장하기 위해 벌였던 광범위한 조사 작업은 중요했다고 평가된다. 최승희의 어린 시절에 대한 많은 증언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 증언들이 최승희의 홍천 출생설을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을 재구성하는 데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첫째, 함광복은 1982년 7월 20일 발행된 <홍천의 맥>이라는 문헌을 발굴했다. 홍천군이 발행한 이 잡지의 26쪽에 “내 고장을 빛낸 사람들”이라는 글이 실렸는데, 함광복의 인용에 따르면 최승희는 “(홍천군) 남면이 고향”이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 글을 직접 읽어보지 못했다.)

‘출생지’와 ‘고향’은 같은 뜻으로도 쓰이지만 실상은 다른 말이다. 특히 ‘본적’ 개념이 살아 있던 시기에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가리키기도 했지만, 조상의 선산이 있는 곳이나 부친의 출생지를 가리키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고향’이라는 일상어는 ‘본적’이라는 행정용어와 거의 같은 말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고향이 홍천”이라는 표현은 틀린 말이 아니다.
둘째, 함광복은 많은 증언을 통해 최승희가 홍천을 방문했다는 점을 밝혔다. 이는 다른 문헌들이 서술하지 못한 내용으로, 최승희가 고향 홍천과 유대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함광복에 따르면 박경재(당시 72세, 홍천군 남면 양덕원리 거주)는 “옻나무재 우물터에 아낙들이 모여 최승희에게 춤을 추어보라고 하면 물동이를 인 채 뱅글뱅글 돌며 춤을 춰 보여 재간동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제3대 강원도의회 의장을 역임한 허만훈(許萬壎, 당시 80세)은 당시의 제곡리 이장 이모씨의 말을 인용하면서 “최승희는 어렸을 때부터 여간 재간둥이가 아니었”으며 “어렸을 때는 노래를 썩 잘 불렀는데 무슨 일로 무용으로 이름을 날리는 줄 모르겠다”고 전했다.
최승희의 5촌 조카인 최경희(崔敬姬)는 “숙명여고를 다닐 때 고향에 다니러 온 (최승희가) ... 커다란 거울 앞에서 속옷 바람으로 춤을 추”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또 “경성제대출신의 강원도 제1호 의학박사”인 이재곤(李在崑, 1908-1944)의 아들 이종선(李鍾善, 당시 71세)은 자신의 어머니 “이봉운(李鳳雲)은 어려서 (10살 전) 최승희와 제곡리에서 소꿉장난을 하며 함께 놀”았다고 증언했다.
박경재, 허만훈, 최경희, 이봉운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홍천 남면 제곡리에서 최승희를 만났던 경험을 증언했다. 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승희가 ‘고향 홍천’을 자주 방문했음을 알 수 있는데, 방문 이유는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었고, 친척이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함광복은 인터뷰를 통해 “최승희가 홍천 사람”이라는 증언을 다수 채록했다. “홍천 사람”이란 “홍천 출생자”뿐 아니라 “홍천이 고향인 사람”을 가리킨다.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이재학(李在鶴)의 아들 이응선씨(李應善, 당시71세, 전 국회의원)는 “우리 형제들은 자라면서 제곡리와 최승희의 얘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막연히 최승희의 고향이 제곡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증언했다.
최승희의 숙명여고 단짝 친구 오정숙의 사촌동생 오금자(당시84세, 춘천시 서면 당임리 거주)는 1937년 3월29일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도구고별공연에 참석, 오정숙의 부탁으로 최승희에게 꽃다발을 전하면서 “자신이 원주출신 강원산(産)인 것처럼, 최승희가 홍천 출신 강원산(産)이란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웠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또 부친 오유영(吳惟泳)으로부터 “최승희가 홍천출신”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덧붙였다.

홍천 내촌 우체국장 김홍배(金洪培, 당시 53세, 홍천군 남면 양덕2리 거주)는 1965년 양덕중학교 2학년 때 국어교사 김석희 선생으로부터 “평창에 이효석이 있다면 너희들이 사는 홍천 남면엔 최승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응선, 오금자, 김홍배의 증언 내용이 사실인지 교차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인터뷰가 이뤄졌던 2006년에 이미 70세 이상이었던 증언자들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낮다. 다시 말해 함광복이 수집한 증언은 검증이 거의 불가능해 진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함광복의 조사연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확보한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함광복이 확보한 증언들이 최승희의 “홍천 출생설”을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홍천 고향설”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최승희가 홍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부친과 모친뿐 아니라 조부모의 연고지가 홍천이고, 조상의 선산이 있는 고향이었으므로, 어린 시절과 여학교 시절에 최승희가 홍천을 자주 방문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가 무용에 입문한 이후에는 그녀가 고향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조선과 일본과 만주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와 남북미 대륙의 대도시 중심으로 분주하게 기획되었던 공연 일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1930년대에는 고향에서 만날 수 있는 친척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4촌 관계이자 고향의 부유한 유력자였던 최승삼 일가도 이미 홍천을 떠나 서울로 이주해 버렸다.
최승희가 무용가로서 강원도를 방문한 것은 춘천과 금강산 온정리가 전부였다. 춘천공연은 1931년 2월21일 춘천공회당에서 열렸고, 금강산 온정리 방문은 1937년 10월25일부터 시작된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의 촬영 때문이었다. 금강산 촬영 때의 숙소가 금강산 초입에 있었던 철도국 직영의 온정리 호텔이었다.

함광복은 1931년경 “춘천은 무용공연을 소화할 만한 여건도 변변히 되어있지 않았”는데도 최승희가 “전국 순회의 첫 공연지를 춘천으로 택한 이유가 이상”하다면서 “대장정의 첫 걸음을 춘천에서 시작했다면 최승희는 새로운 무용예술운동의 시발지를 고향 땅으로 잡고 싶었던 것”이리라고 짐작했다. 그는 또 춘천에는 후원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은사... 당시 숙명여고 훈육주임교사이자 화가 이영일(李英一)”이라고 덧붙였다.
함광복은 최승희가 춘천공연을 수락했던 것이 숙명여학교 교사였던 이영일 때문이었다고 암시했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이영일이 숙명여학교의 교원으로 부임한 것은 1934년 4월이었으므로, 최승희는 이미 8년 전에 숙명여학교를 졸업했고, 춘천 공연이 열렸던 1931년 2월에 이영일은 아직 숙명여학교에 부임하기 전이었다.

최승희가 이 시기에 춘천 공연을 단행한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첫 공연지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1931년 전국 순회공연의 첫 공연지는 춘천(2월21일)이 아니라 부산(2월17-18일)이었다. 이상한 점은 공연 일정과 동선이었다. 최승희는 부산에 이어 춘천에서 공연한 다음 대구(2월24-25일)에서 공연했다. 경부선 철도를 이용해 하루만에 이동할 수 있는 부산과 대구의 공연의 사이에, 철도가 없고 도로도 미비한 춘천 공연을 끼워 넣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최승희가 처음 요청받은 춘천 공연의 시기는 2월11일이었다. 그날이 일본의 기원절(紀元節)이었기 때문이다. 춘천의 유지들은 일본의 건국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불꽃놀이와 함께 최승희 공연을 요청했다. 공연 취지에 동의할 수 없었던 최승희는 설 휴일에 맞추어 부산공연이 예약되어 있다는 이유로 춘천 기원절 공연을 거절하는 대신 열흘 후인 2월21일 공연을 수락했다.
공연을 연기할 수는 있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은 춘천의 유력한 조선인 이규완(李圭完, 1862-1946)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골수 친일파로 강원도장관(1908-1918)과 함경남도장관(1918-1924)을 역임한 후 은퇴해 춘천에 거주하고 있었다.

함광복의 주장에는 허점과 미비점이 있지만, 강원도 홍천이 최승희의 고향이었음을 역설한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홍천 출생설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홍천 고향설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주창한 “홍천 고향설”을 바탕으로 홍천의 최승희 기념사업은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발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jc, 2026/5/19)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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