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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100장면] 31. 벌금형

최승희의 생일을 바로 잡으면서 국어학자 이희승의 회상을 소개한 바 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초기에 조선의 호적이 일본식 민적으로 번역되면서 많은 오류가 발생했고,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잘못 기재된 것도 그 같은 오류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적 기록을 시작한 것은 실제로 강점이 이뤄지기도 전, 즉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던 19094월부터였다. 통감부는 19093월 법률 제8호로 <민적법>을 공포, 4월부터 이를 시행하면서 출생, 사망, 호주변경, 혼인, 이혼, 양자, 파양, 분가, 일가창립, 입가, 폐가, 페절가재흥, 부적, 이거, 개명등의 15개 사항을 기입하도록 했고, 신고 의무자는 호주였다. 신고를 게을리 한 호주에게는 무거운 처벌도 가해졌다.

 

 

일제의 민적번역사업이 오류를 양산한 것은 그 작업이 단기간에 졸속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198545일자 <경향신문(5)>에 실린 칼럼 <진실을 그르치는 형식>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다소 길지만 생일 관련 주요 부분을 발췌해 보자.

 

“1910년에 한일합방을 강요당한 후 소위 조선총독부란 것이 생기면서 헌병정치를 펴서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일제는 일반 민원사무인 호적에 관한 일도 헌병에게 맡겨 이를 처리하게 하였다. 각 지방에 군청이 있고, 그 산하에 면사무소가 있었지만, 면장은 모두 한국 사람이라 믿지 못해서 그랬는지, 헌병으로 하여금 호적사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 우리나라에 종래부터 있었던 호적을 다시 정리한다고 민적(民籍)이란 명칭으로 가족별로 대장을 만들어 각 지방 헌병분견소에 비치하였었다. 헌병분견소에는 소장인 일인 헌병이 한사람씩 밖에 없었고, 일어를 조금 아는 한인 청년을 헌병조원이란 명칭으로 몇 사람씩 두었는데, 그들의 사무능력이 말이 아닌 정도였다. 그리하여 종래의 호적에서 이기(移記)하여 민적대장을 만들 적에 많은 착오가 생기게 되었다. 이름자가 잘못되고 가족관계가 틀리고 본관이나 생년월일이 잘못 기록된 일이 비일비재였다.

 

대한제국시대의 호적에는 가족의 생년이 개국 몇 년으로 되어 있었는데, 조선개국(朝鮮開國)이란 연호를 피하기 위해 일제는 메이지(明治) 몇 년으로 환산하여 민적에 기입하였었다. 그런데 그 환산이 잘못되어 우리 가족의 생년이 모두 1년씩 늦어지게 되었다. 나 자신 개국505(서기1896)생인데 일본의 메이지29(서기 1897)생으로 잘못 환산하여 형식상으로 한 살이 줄어들게 되었다.

 

또 대한제국 시대에 호적을 작성할 적에는 생년월일에 음력을 사용하여 428일생인데, 오늘날 호적에는 이 생일이 자동적으로 양력으로 둔갑을 하여, 공식상으로는 양력 428일생으로 행세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실제로는 양력 69일이 내 생일이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428일생으로 인정받고 있다.”

 

조선의 호적을 일제의 민적으로 번역할 때 헌병조원들은 조선인의 음력생일을 그대로 옮기면서 양력날짜 취급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연호(개국)를 일제의 연호(메이지)로 바꾸면서 자주 계산상의 혼란을 일으켜 오류가 발생했고, 이 때문에 생일이 잘못 기록된 조선인이 많았다.

 

 

그런데 최승희는 경우가 다르다. 그녀는 일제강점이 시작된 1912년에 출생했으므로 조선의 호적에 기록된 적이 없었고, 태어나자마자 바로 일본식 민적에 등재되었다. 따라서 최승희의 호적상 생년월일에 오류가 발생했던 것은 헌병조원들의 번역 미숙 때문이 아니었다. 실수와 오류는 번역작업이 끝나고 일상적인 호적 관리 과정에서도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최승희의 음력 생일이 호적에 양력처럼 기록된 것은 일차적으로 헌병조원의 실수가 아니었다. 호적 등재 신청서에는 양력 날짜를 기입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조선인들은 음력 날짜를 양력처럼 기입해 제출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것은 조선인들이 일제 통치에 저항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호적에 등재되는 15개 인적항목은 사안이 발생한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본적지의 관할 헌병 분견소에 신고해야 했다. 신고를 게을리 한 사람은 50대 이하의 태형, 혹은 5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되어 있었고, 특히 거짓 신고를 한 경우에는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100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음력 생일을 양력 날짜처럼 호적에 등재하는 행위는 두 가지 면에서 민적법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첫째는 잘못된 날짜를 신고했기 때문에 거짓 신고에 해당했고, 둘째는 음력 날짜와 양력 날짜 사이에는 보통 열흘 이상의 차이가 있으므로 신고 태만에 해당했다.

 

최승희의 실제 출생일은 양력 1912211일이었지만, 부친 최준현은 그녀의 생일을 19111224일로 신고했다. 이는 신고 기한(10일 이내)을 한 달 이상 넘긴 행위였다. 더구나 이 날짜마저 헌병조원에 의해 19111124일로 잘못 등재되는 바람에, 최준현의 신고는 두 달 이상 지체된 셈이었다. 이것만 해도 최준현은 최고의 태형이나 벌금형에 처해질 상황이었다.

 

게다가 음력 출생일을 양력처럼 신고한 것은 거짓 신고로 간주되어 형벌이 가중될 수 있었다. 만일 이 행위가 처벌되었다면, 최준현은 6개월 이하의 징역형이나 100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아야 했다. 6개월 징역형도 가벼운 것이 아니지만, 100원의 벌금형도 무거운 처벌이었다.

 

일제강점 직후인 1910년대의 100원은 쌀 8(1석은 144Kg)의 가격에 해당했다. 이는 오늘날의 쌀 14가마(1가마는 80Kg, 1=1.8가마)에 해당한다. 2025년 기준으로 한국의 쌀값은, 1가마(80Kg)의 평균 산지 가격이 23만원이므로, 1912년의 100원의 벌금형은 오늘날의 약 320만원에 해당한다. 3백만원 이상이므로 벌금형 중에서도 무거운 편이었다.

 

최준현은 어째서 이런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최승희의 음력 생일을 양력 날짜처럼 신고했던 것일까? 그것이 바로 당시 조선인들의 일반적 정서였을 것이다. 일제의 통치에 협력하기 보다는 조선의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최승희의 생년월일을 늦게, 혹은 거짓으로 신고했다는 이유로 호주 최준현이 실제로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음력 생일을 양력 날짜처럼 신고하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일제 당국도 이를 일일이 처벌하지 못한 채 묵과하고 넘어가야 했을 것이다. 혹은 부유했던 최준현이 벌금 100원을 각오하고 거짓 신고를 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최준현이 최승희의 음력 생일을 고수한 것은, 당시의 조선인들이 일제식 양력을 거부하고 조선식 음력을 수호하려는 의지와 관행을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jc, 2026/1/15)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