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생년월일을 고찰하는 데에 서만일(徐萬一, 1919-?)의 저술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조선예술> 1957년 10월부터 6회에 걸쳐 최승희 평전 <조선을 빛내고저>를 연재했는데, 여기에서 서만일은 최승희의 생일이 “1912년 12월24일”이라고 서술했다.
그가 서술한 “1912년 12월24일”은 오류이었지만, 최승희가 생년이 1912년(양력)이었다는 점과 생월일이 12월24일(음력)이었다는 점을 밝혀주었다. 즉, 서만일은 음력과 양력을 구분하지 못한 채 최승희의 양력 생년과 음력 생일을 제시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북한)은 이미 양력 체계가 완전히 정착되어 있었으므로,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들이 음력 체계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난 서만일은, 1912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승희와 시간과 거리의 양면에서 연배의 차이가 있었지만 1950년대에는 두 사람이 매우 가까웠다. 서만일은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의 일본 도쿄 니혼대학교의 후배였다. 그는 1938년 니혼대 예술과에 유학했는데, 이는 최승일이 1919년부터 2년간 수학했던 니혼대 미학과의 후신이다. 서만일은 1939년 니혼대 조선인 유학생들로 구성된 학생극단 <형상좌>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검거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뒤에 니혼대를 중퇴하고 1941년 귀국했다.
서만일은 1946년 <815해방 1주년기념 희곡집(1946, 문화전선사)>에 “김구 삽화”라는 제목의 희곡을 발표하면서 북한에서 문필활동을 시작했고, 1947년 평양국립극장에서 일하던 중, 그해 8월에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 고리키 문학대학에서 6년간 수학했다. 유학 중 서만일은 러시아어로 시집을 출간했고, 세계청년학생축전 조선대표단을 수행하는 재소 유학생에 선발되었다. 서만일은 러시아 여성과 결혼했고, 1953년 8월에 동반 귀국했다.
서만일은 모스크바 유학 기간에 적어도 세 번 최승희와 그의 딸 안성희를 만났다. 첫 번째는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이었다. 최승희는 북한의 축전참가 무용단장이었고, 서만일은 북한 축전참가단을 수행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소련 유학생이었다. 안성희는 이 대회에서 민속무용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세계적 무용가와 유학생이라는 지위 차이 때문에 격의는 있었겠으나 두 사람은 이때 처음 안면을 익혔다.

194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제2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도 최승희와 안성희가 참가했고, 서만일도 수행단으로 파견되었다. 세 번째 만남은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 북한이 대규모 예술단을 소련에 파견했을 때였다. 단장은 문화선전상 허정숙이었고 최승희는 무용단장으로 소련 순회공연을 가졌다. 6월7일부터 시작된 모스크바 공연에 서만일도 당연히 참석했을 것이다. 서만일과 최승희-안성희 모녀는 이렇게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적어도 3번 해외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서만일이 모스크바 유학을 끝내고 1953년 8월에 귀국하자, 이번에는 안성희가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학교에 유학했다. 따라서 서만일과 안성희는, 시기는 겹치지 않았지만, 모스크바 유학생이라는 공통점도 갖게 되었다.

귀국 후 서만일은 조선작가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장을 거쳐 부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시, 희곡, 시나리오, 평론, 번역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필력을 과시했다. 그의 인맥으로는 문화부 부상(=차관)으로 근무하던 안막, 조선문학가총동맹 위원장과 문화상(=장관)을 지냈던 한설야와도 가까웠다. 한설야와 서만일은 국제대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하거나 조선을 방문한 외국작가를 영접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세계 각국의 지식인들과도 폭넓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서만일은 한국전쟁 이후 1953년 10월에 창간된 북한 문예지 <조선문학>의 편집위원을 5년간 역임했고, 1956년 9월에 창간된 예술잡지 <조선예술>의 편집위원을 2년 역임했다. 서만일이 <조선예술> 편집위원이던 기간에 최승희도 <조선예술>의 편집위원이었다. 개인적 친분뿐 아니라 업무적으로도 가까웠다는 말이다.
서만일은 1958년 9월 안막, 한설야와 함께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예술>의 편집위원진도 와해되어 서만일과 최승희의 이름도 동시에 사라졌다. 하방 조치를 받은 것은 최승일과 그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이며, 최로사와 최효섭도 서만일과 함께 숙청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1938년 최승일의 니혼대 예술과 후배로 시작된 양가의 인연은 1958년 9월의 숙청으로 20년만에 끝이 났다. 1995년 최승희와 한설야는 복권되었지만 서만일은 아직 복권되지 못했다.

1964년 8월1일자 소련 외무성 자료(No.31837)에는 주조선 소련대사 모스콥스키가 서만일의 부인인 베르만 엘레나와 나눈 대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베르만 엘레나는 소련의 공민 자격을 유지했기 때문에 소련대사와 연락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 대화에서 남편 서만일이 “친소 성향 때문에 처벌을 받았고, 지금은 원산에 살면서 생계를 위해 원산 차량제작공장에서 노동 및 임금 회계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만일이 <조선예술>에 최승희 평전 <조선을 빛내고저>를 연재한 것은 1957년 10월부터 1958년 3월까지이므로, 이들이 숙청되기 1년 전부터 6개월 전까지였다. 이때야 말로 두 사람이 가장 가깝게 지내던 시기였다. 6개월간 최승희 평전을 연재하면서 서만일은 자유롭게 최승희와 만나거나 소통할 수 있었을 것이고, 최승희도 서만일의 인터뷰 요청이라면 언제든지 기꺼이 응했을 것이다.

이렇게 직접 취재가 가능했었을 시점에 쓰인 글에서 서만일은 최승희의 생일이 1912년 12월24일이라고 서술했다. 이는 최승희 자신의 답변, 혹은 최승희 가족의 답변을 반영한 날짜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렇게 가깝고 친밀한 취재원으로부터 최승희의 생년(1912년, 양력)과 생월일(12월24일, 음력)을 정확히 밝혔으면서도, 음력과 양력의 혼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최승희의 생년월일을 1912년 12월24일이라고 서술하는 오류를 범한 것은 역설적이면서도 아쉬운 일이다. (jc, 2026/1/1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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