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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100장면] 28. 음력과 양력

호적과 여권의 기록으로 최승희의 생일이 19111224일이라는 점이 확인되었지만,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녀의 생년을 1911년이 아니라 1912년이라고 기록한 문헌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

 

 

19351129일자 <만슈니치니치(滿洲日日)신문(5)>은 일본 무용계에 다이쇼원년(1912)에 출생한 25세의 무용가 3, 최승희(崔承喜)와 츠다 신쿄(津田信敎)와 메이와 후타바(名和双葉)가 있다고 소개했다. 최승희가 1912년생이라고 서술한 것이다. 또 최승희 주연의 무용영화 <반도의 무희(1936)>를 소개하는 레코드의 설명문에도 최승희의 생일이 다이쇼원년(大正元年=1912) 1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최승희가 유럽순회공연 중이던 1939420일 벨기에 정부로부터 발급받은 노동허가서에는 그녀가 “1912년 서울에서 출생한 조선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었고, 19401010일에 파나마에서 신청된 멕시코 입국 비자 신청서에도 최승희의 생년이 1912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조선(=북한)의 기록에도 최승희의 생년을 1912년으로 기록한 것이 있다. 1948820일자 <노동신문(2)>은 최승희가 그해 825일 실시되는 최고인민회의(=국회의원) 선거에서 평양시 제4선거구의 대의원 후보자로 추대되었다고 전하면서, 그녀가 “1912년 한학자의 가정에서 탄생했다고 보도했다.

 

 

최승희의 생년이 자주 1912년으로 기록된 것은 음력과 양력을 혼용한 결과였다. 그녀의 생년월일을 조선의 시헌력, 즉 음력으로 표현하면 신해년 섣달 스무 나흗날이지만, 이를 ‘19111224이라고 표기하면 마치 그레고리력, 즉 양력 날짜처럼 보인다.

 

음력 생일을 양력날짜처럼 사용한 것은 최승희만이 아니었다. 최승희의 가족, 즉 그녀의 부모와 형제자매의 생년월일이 모두 양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음력 날짜였다. 당시 거의 모든 조선인들이 그런 관행을 따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조선인들은 국가공동체가 천지인(天地人)3요소로 구성된다고 인식했고, 이는 조선을 강점한 일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을 합병하면서 일제는 조선의 영토()와 인민()과 함께 조선의 시간()을 강탈했다. 민적 번역과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의 영토와 인민을 일본화했고, 이어서 조선의 달력과 시간체계를 일본식으로 변경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부터 <조선민력>을 보급했는데 이는 서양식 그레고리력, 즉 양력이었다. 이어서 191211일부터 일본 표준시를 조선에 강요했다.

 

일제식 역법과 시제를 강요당한 조선인들은 이를 국권과 민족에 대한 근본적인 도발로 받아들였다. 조선인들의 인식 속에서 달력과 시간을 정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수행하는 군주의 권한이었다. 그 권한을 빼앗긴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한 조선인들은 일본식 달력과 시간에 저항했다. 일제가 공권력과 물리력을 동원해 실시한 토지조사사업과 민적 번역을 막을 수 없었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일본식 시간과 달력을 거부하고 조선의 역법과 시간제를 그대로 사용했다.

 

 

공공부문에서는 양력과 24시간제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민간부문과 일상생활에서는 음력과 십간십이지 시간법이 그대로 사용됐다. 조선인들은 생일뿐 아니라 명절과 제사일 등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날짜를 시헌력으로 계산했다. 시헌력은 완전한 음력은 아니고 태양력과 태음력을 혼합한 역법이었지만, 양력인 그레고리력과 구별하기 위해 음력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공공영역의 양력과 사생활의 음력을 혼용하는 관행은 일제강점이 끝난 후, 20세기 후반까지도 계속되었다. 설이나 추석 등의 명절은 음력으로 정해졌고, 24절기도 마찬가지였다. 개인들의 생일도 양력처럼 표현되더라도 실제로는 음력날짜인 경우가 많았다.

 

 

최승희의 생년월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생일은 19111224일로 표기되었지만 이는 음력 날짜였고, 양력으로 환산하면 1912211일이었다. 그녀의 생년을 1912년이라고 표기한 문헌이 많은 것은 이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jc, 2025/12/30; 2026/5/15)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