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에서 상연된 작품 중에는 신라 시대의 설화를 바탕으로 안무된 두 작품이 있었다. 황창(黄昌)의 전설을 안무한 <검무(1934)>와 만파식적(萬波息笛) 혹은 옥피리의 설화를 작품화한 <옥적곡(1937)>이다.
그런데 신라시기가 배경인 작품이 하나 더 있었다. <신라 궁녀의 춤(新羅宮女の舞, 1937)>이다. 이 작품이 초연된 것은 1937년 9월27일 도쿄극장에서 열린 최승희의 “도구(渡歐) 고별공연,” 즉 유럽으로 순회여행을 떠나기 전에 도쿄에서 개최한 공연에서였다.

그보다 1년 전 1936년 9월22일 도쿄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도쿄 제3회공연>에서도 최승희는 <신라의 벽화에서(新羅の壁畵より, 1936)>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이 1년 후에 <신라 궁녀의 춤>으로 개명, 혹은 개작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같은 시기에 <낙랑의 벽화에서(樂浪の壁畵より, 1936)>가 1년 후에 <고구려의 사냥꾼(高句麗の狩人, 1937)>으로 개명된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신라의 궁녀의 춤>의 창작연도는 1936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라 궁녀의 춤>은 1938년 1월22일의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Temple Dancer of Shiragi>라는 제목으로 상연되었는데, ‘시라기(Shiragi, しらぎ)’란 ‘신라(新羅)’의 한자를 일본어 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2월2일의 로스앤젤레스 공연과 2월20일의 뉴욕 공연에서는 <Court Lady of Shiragi>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세계 순회공연에서 상연된 <신라 궁녀의 춤>에 대해서 두 가지 의문이 일었다. 첫째는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상연된 이 작품의 제목이었다. 신라의 ‘궁녀’가 등장하는 작품의 제목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템플 댄서(Temple Dancer)’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이다. 이후의 공연에서는 제목이 ‘궁녀(Court Lady)’라는 표현으로 수정되었지만, 어째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승무(僧の舞, Buddhist Temptress)’와 혼동될 수도 있는 표현을 제목에 사용했던 것일까? 둘째는, 1938년 미국 공연에서는 활발하게 상연되었던 <신라 궁녀의 춤>이 1939년의 유럽 공연에서는 전혀 상연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약간의 문헌조사로 첫 번째 의문은 풀렸다. <검무>와 <옥적곡>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바탕으로 두고 안무되었기 때문에, 같은 문헌에 ‘신라의 궁녀’가 등장하는 설화나 전설이 있는지 조사했다. 과연 있었다. “주암사(朱巖寺)의 설화”가 그것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의 경상도 경주부(慶州府) 고적(古蹟)편에는 경주 오봉산에 위치한 주암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곳에는 문무왕 시기의 의상(義湘, 625-702) 대사가 창건한 주암사(朱巖寺)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인근에 김유신이 장군들에게 맥주를 제공했다는 지맥암(持麥巖)이 있다. 지맥암의 서쪽에는 주암(朱巖)이 있는데 바위가 붉은 색이어서 붙은 이름일 것이다. 이곳에 고승과 궁녀의 설화가 얽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지맥암(持麥巖)에서 서쪽으로 8ㆍ9보쯤 가면 주암(朱巖)이 있다. 예전에 도인(道人)이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고, 일찍이 스스로를 격려하기를, ‘진실로 궁녀(宮女)가 아니라면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하였다. 귀신들이 그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서 공중으로 날아가서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곤 하는데, 때를 어기는 일이 없었다. 궁녀가 두려워서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궁녀에게 가서 자는 곳마다 단사(丹砂)로 표시하게 하고, 이어 군사에게 찾게 하였다. 안으로는 성시(城市)에서부터 멀리로는 높은 산골짜기의 매우 으슥한 곳까지 찾았으나 찾아낼 수 없더니, 홀연 이 바위에 도착해서 보니, 단사의 붉은 흔적이 바위 문에 찍혀 있는데, 납의(衲衣)를 입은 늙은 중이 그 안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상하고 미혹시키는 행위를 성내어 사나운 군사 수천 명을 보내어 죽이고자 하였다. 중이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 번 귀신의 주문(呪文)을 외우니, 귀신 군사 수만 명이 산골짜기에 잇따라 늘어선 것이 마치 세상에서 그려 놓은 귀신의 형상과 같았다. 왕의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땅에 엎드려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로 맞아들여 국사(國師)로 삼으니 그의 요괴한 일이 드디어 없어졌다 한다.”

귀신들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을 만큼 도력이 높은 경주의 고승이 궁녀의 유혹을 이겨냈다는 신라 설화의 설정은, 지족선사(知足禪師)가 황진이의 유혹을 이겨냈다는 조선의 설화와 그 구성이 유사하다. 그래서 <신라 궁녀의 춤>이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될 때에 “Temple Dancer”라는 표현이 들어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진이의 <승무> 설화와 주사암의 <신라궁녀> 설화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다. 경주 주암(朱巖)에 거주했던 노승이 “빼어난 미녀라도 내 수도를 방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자 귀신들이 노승을 시험하기 위해 밤마다 왕궁에서 아름다운 궁녀들을 납치해 노승 가까이에 두었다. 따라서 <승무>의 설화에서는 지족선사를 유혹한 것이 황진이 본인이었지만, <신라궁녀의 춤>의 설화에서는 노승을 유혹은 것은 귀신들이며 궁녀들은 이 유혹에 동원된 도구로 기술되어 있다.

귀신과 노승의 대결에 왕궁의 궁녀가 동원되었다는 점 때문에 왕은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격노한 왕은 대결의 장소와 당사자를 알아내기 위해 궁녀들에게 붉은 모래를 지니도록 지시했다. 이 계략 덕분에 대결의 장소가 오봉산이며, 궁녀들을 납치한 것이 귀신들이라는 점도 알아낼 수 있었다.
노승과 귀신의 대결은 이내 노승과 귀신 연합과 왕의 대결로 전환되었는데, 결국 왕은 이 노승이 귀신의 보호를 받는 고승임을 깨닫고, 그를 궁으로 불러 국사(國師)로 임명함으로써, 결국 왕과 노승과 귀신이 모두 힘을 합치는 연대를 이루게 되었다.
왕은 노승이 있던 암벽의 굴을 넓혀 절을 지었고, 그 암자가 바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주사암이다. 이 설화 덕분에 주암사(朱巖寺)는 주사암(朱沙巖)으로 개명되었는데, 지금도 주사암의 바위가 붉은 것은 신라 궁녀가 뿌렸던 ‘붉은 모래’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라의 설화를 배경으로 한 최승희의 3개 작품이 모두 외적을 격퇴하는 이야기와 관련된다는 점도 특이하다. <옥적곡>은 동해안을 침범하는 왜적을 격퇴하는 설화, <검무>는 신라가 대야성에서 패했던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담은 이야기, 그리고 <신라 궁녀의 춤>은 고구려를 격퇴한 경주 오봉산의 주사암에 얽힌 설화가 바탕이 되었다.
또 <옥적곡>과 <검무>와 <신라 궁녀의 춤>은 모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21권 경상도 경주부편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이 한 권의 문헌을 조사함으로써 최승희는 세 작품을 안무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문헌 조사는 서양식 교육만 받았던 최승희 보다는 어린 시절에 한문 교육을 받았던 남편 안막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안막과 최승희 부부는 1933년부터 세계 순회공연을 떠났던 1937년 말까지 도쿄에 거주했으므로 이들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참고하려면 이 책을 소장한 도쿄 시내의 도서관을 이용했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에 이 책은 도쿄 신주쿠(新宿)구 니시와세다초(西早稲田町) 소재 와세다(早稲田) 대학 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었고, 도쿄 치요다(千代田)구 나가타초(永田町)에 위치한 일본국회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었다. 일본국회도서관은 시설과 장서의 양면에서 일본의 최대 도서관이며, 와세다 대학 중앙도서관도 장서의 면에서 일본의 대학도서관 중에서는 최대 규모이다.
최승희 안막 부부는 1933년 3월부터 무사시노(武藏野), 그해 10월부터는 지유가오카(自由ヶ丘)에 거주했으므로 국회도서관까지는 전철로 약 30분, 와세다 대학까지는 약 40분 거리였다. 또 1936년 9월 에이후쿠초(永福町)로 이주한 후에도 와세다대학 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이 모두 전철로 40분 이내의 거리였으므로, 안막이 두 도서관을 이용하기에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안막은 재학생이거나 졸업생으로서 와세다 대학의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조사한 것은 아마도 와세다 대학 도서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신라궁녀의 춤>이 1939년의 유럽 공연에서 전혀 상연되지 않은 이유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살피기 위한 단서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jc, 2026/5/2)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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