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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100장면] 10. 옥적곡

<옥적곡>은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에서 자주 상연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3822일의 뉴욕 공연에서는 <한국의 명상(Korean Meditation)>이라는 제목으로 상연됐고, 남미 우르과이의 잡지에도 <메디타씨온 꼬레아나(Meditación Coreana)>라고 번역되어 소개됐다.

 

이 작품은 1939131일 파리 공연에서 <매혹적인 멜로디(Mélodie enchanteresse)>라는 프랑스어 제목으로 상연됐는데, 이 공연 프로그램의 표지 사진이 <옥적곡>이었다. 193942일의 독일 공연에서도 이 작품은 <옥적(Die Jade Flöte)>이라고 직역되어 소개된 바 있다.

 

 

옥적(玉笛)이란 옥피리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옥()구슬을 가리키므로, 동그란 구슬로 피리를 만든다는 것이 상상되기 쉽지 않다. 피리는 전통적으로 대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이란 구슬로 다듬어지기 전의 옥돌 원석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구슬은 한자어 ()’을 가리키는 고유 한국어였다. 따라서 유리구슬이나 구슬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옳지 않은 합성어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어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구슬구형 물체를 가리키게 되었고, ‘구슬이나 구슬 등의 말도 쓰이게 된 것이다.

 

국악기 목록에 옥피리는 포함되지 않는다. 삼현육각이나 줄풍류, 합악이나 민속악이나 풍물에도 옥피리가 없다. 국악 관악기를 나열할 때에도 향피리와 당피리, 대금과 중금과 소금, 그리고 심지어 해금도 나열되지만 옥적이 포함되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래도 옥피리는 한국인에게 친숙하다. 신라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신비한 옥피리 때문이다. 이 피리가 처음부터 옥으로 만들어졌던 것은 아니다. 7세기 후반 경주에서 대나무로 만들어졌던 만파식적(萬波息笛)에 대해 <삼국사기(1145)>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신문왕 때에 동해에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모습이 거북이 머리와 같았다. 그 위에 한 그루의 대나무가 있어서 낮에는 갈라져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합해져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베어다가 적()을 만들고 이름하여 만파식(萬波息)이라 하였다.”

 

<삼국유사(1281)>의 기록은 더 자세하다. 신라의 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은 부친인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感恩寺)라는 절을 지었다. 682년 동해에 작은 산이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다가오자, 신문왕이 배를 타고 산에 들어갔을 때, 용이 왕에게 검은 옥대(玉帶)를 바쳤고,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국유사>의 제2권 기이(紀異) 2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은 ...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갑자기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2<원성대왕>편에 따르면, 만파식적은 1백년이 지난 후에도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일본왕 문경(文慶)이 신라를 공격하기 전에 만파식적을 제거하려고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50냥과 금1천냥을 제공했으나 원성왕(재위 785-798)은 이를 거절하고 만파식적을 내황전(内黃殿)에 옮겨 보관했고, 일본은 신라를 침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만파식적은 신라가 고려에 패망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경순왕(재위 927-935)이 왕건(재위, 918-943)에게 항복하면서 만파식적을 바쳤고, 이후 광종(재위 949-975)은 경주 객사에 동경관을 짓고 만파식적을 이곳에 보관했다.

 

조선 시대에도 만파식적은 신라의 신기한 유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자주 문인들의 시제가 되었다. 다만 만파식적이라는 원래 이름보다 옥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만파식적과 옥적은 그 기원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조선 후기의 고증학자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옥적이 가야에서 만들어져 신라로 전해졌던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조선 시기에는 그 두 피리의 전설이 섞이고 융합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의 시에 따르면 15세기에도 옥적은 흠 없이 완전무결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고, 1504년 연산군이 경주의 옥적을 (서울로) 올려 보내게 하라고 명령한 것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이 옥적은 1인의 악공만 연주할 수 있고 조령(=문경새재)를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경주의 동경관으로 되돌려 보내졌다고 했는데, 후일 정약용(1762-1836)계림옥적변(鷄林玉笛辨)”이라는 글에서 이 황당한 주장은 옥적을 경주에 보관하기 위해 조작된 거짓이라고 비평한 바 있다.

 

경상감사를 역임한 홍성민(洪聖民, 1536-1594)은 옥피리가 임자년(1552)에 불타버렸다는 시를 썼고,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은 이 피리가 임진왜란(1592) 중에 훼손되었다고 기록했다. 광해군(재위 1608-1623) 시기에는 경주 부윤이 옥피리가 없어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옛 모습대로 새로 만들라고 명령했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옥적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치윤은 신라의 옥적을 직접 목격했다면서 옥으로 대나무 모습을 모사한 이 피리는 임진왜란 중에 왜인들에 의해 훼손됐고, 그 부서진 부분을 쇠로 보완했기 때문에 이후로는 청랑하던 소리가 다소 변질되었다고 기록했다.

 

 

숙종(재위, 1674-1720) 시기인 1690, 동경관에서 근무하던 향리 김승학이 무너진 담장을 보수하던 중 옥적을 발견했고, 당시 경주 부윤 이인징(李麟徵, 1643-1729)이 이를 다시 동경관에 보관하도록 지시했다.

 

이 옥피리는 1909년 창경궁에 조성된 어원박물관(오늘날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준공됐을 때 역사에 다시 등장했다.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1849-1910)가 경주의 옥피리를 이곳으로 옮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912년 어원박물관이 덕수궁으로 옮겨 이왕가박물관으로 개칭되면서 옥피리도 이곳으로 이관됐다. 이때 경성제대 교수로 재직하던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경주소장옥적고(慶州所藏玉笛考, 1912)”라는 소논문을 발표했다.

 

이 옥피리는 1929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오늘날의 국립경주박물관)이 설치되면서 다시 경주로 옮겨져 수장고에 보관되었다가 해방을 맞았고, 2011년 국립경주박물관의 특별전에서 만파식적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된 바 있다.

 

 

만파식적 또는 옥적은 13백여 년 동안 외적을 막고 자연재해를 물리치는 신묘한 악기로 인식되어 왔다. 비록 이 피리가 신라와 고려의 멸망과 일제의 조선 침략을 막지는 못했지만, 민중과 지식인뿐 아니라 관료와 왕들까지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최승희가 <옥적곡>을 안무한 것은 1937년이었다.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1905)한지 한 세대 이상이 지났고, 일본의 만주 침략(1931)과 중국 침략(1937)이 진행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본 군부는 태평양 전쟁과 동남아시아 침략(1941)을 기획하고 있었다. 조선인한테는 희망이 없고 암울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최승희가 <옥적곡>을 발표했던 것은 대범한 일이었다. 조선의 외적, 특히 왜적을 물리치는데 효험이 있었다는 옥피리의 전설을 작품화했고, 이를 조선과 일본과 미국과 유럽과 남미에서 지속적으로 상연했기 때문이다. 특히 <옥적곡>의 초연은 순종황후 윤대비를 위한 특별공연이었다. 나라를 잃고 실의에 빠진 대한제국 황실을 위해 <옥적곡>을 상연했던 것은, 암울한 상황이지만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제공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는 위험한 일이었다. 일본 당국은 만파식적혹은 옥적의 전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를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어 무용 활동을 중단시키거나, 치안유지법(1925)이나 국가총동원법(1938)으로 형사 처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어째서 이러한 위험을 무릅썼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위험을 피하면서 계속 <옥적곡>을 상연할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좀 더 체계적인 조사와 정리가 필요하다. (jc, 2026/4/30)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