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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100장면] 21. 검무

<검무(1934)><에헤야 노아라(1933)>, <승무(1934)>와 함께 최승희가 창작한 초기 조선무용 작품이다. <검무> 혹은 <칼춤>은 신라시대 황창이라는 인물의 영웅적인 행위를 칭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춤으로, 두 자루의 중검을 사용하는 빠르고 힘 있는 무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기생들에게 전승된 검무는 섬세하고 유연한 춤으로 변질되었고, 최승희는 이를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장쾌하고 쾌활한 춤으로 재창작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검무>19349월에 열렸던 최승희의 제1회 도쿄공연에서 초연됐고, 이후 일본과 조선과 만주의 공연에서 상연됐다. 이 춤은 세계 순회공연에서도 19381월의 샌프란시스코 공연, 2월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공연에서 발표됐고, 1939131일 파리 공연에서도 상연됐다. 파리 공연 프로그램은 이 작품을 전사의 기사 정신은 조금씩 사그라졌지만 최승희의 춤이 위축된 정신을 다시 높이고 활발하게 고양시킨다고 설명했다.

 

강준식은 그의 <최승희 평전(2012, 118-122)>에서 최승희가 안막의 도움으로 <검무>를 복원하는 장면을 서술했다. 안막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과 정약용(1762-1836)<여유당전서>에 실린 시선집,” 그리고 <무예도보통지(1790)> 등의 문헌을 조사했고, 이를 바탕으로 최승희가 <검무>를 재창작했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은 훗날 최승희가 집필한 2개의 글로 뒷받침됐다. 평양에서 발행된 <문학신문(1961620)>에 실린 무용과 문학이라는 글과 1966322일의 같은 신문에 실린 조선무용 동작과 그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이라는 글이었다. 전자는 정약용의 시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에 대한 글이고, 후자는 이덕무와 박제가의 <무예도통지>에 실린 그림 무예도(武藝圖)”에 대한 글이었다.

 

 

안막과 최승희가 <검무>를 안무하던 1933-1934년의 시기에 실제로 이 문헌들을 참고할 수 있었을까? 이는 간단하게 확인되었다. 당시 안막, 최승희 부부는 도쿄에 거주했고, 안막은 와세다 대학의 재학생이었으므로, 와세다대 도서관과 일본국회도서관의 소장 자료를 검색했다.

 

와세다대 도서관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초판은 물론 1623년의 전주 남고사(南高寺) 소장본, 1900년과 1906년의 재간본, 그리고 <무예도보통지(1790)>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는 이 도서관에 없었다. 이 도서관에 소장된 가장 이른 출판본은 1960년 홍익인간사가 간행한 <정다산전서>였다. 따라서 안막은 와세다대 도서관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무예도보통지>는 참고할 수 있었지만, 정약용의 <시선집>은 조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국회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이 도서관은 <신증동국여지승람><무예도보통지>의 한적(漢籍), 즉 한문도서 원본을 소장하고 있었지만, 정약용의 <시선집>2012년 한국의 다산학술문화재단이 간행한 <여유당전서>가 가장 이른 문헌이었다. 따라서 안막은 1933-1934년경 와세다대 도서관과 일본국회도서관에서 <여유당전서>는 참고할 수 없었다.

 

 

각 문헌의 내용은 <검무>의 안무에 적절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황창(黄昌)에 대한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속설(俗說)’ 즉 민간에 전해지던 전설이라고 밝혔다. 이 책의 제21권 경상도 경주부 <인물편>은 화랑 관창(官昌, 646-660)의 기사를 길게 서술한 후 다음과 같은 황창(黄昌)의 전설을 덧붙였다.

 

신라의 황창(黃昌)156세에 칼춤을 잘 추었는데,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왕을 위해 백제왕을 쳐서 왕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하였다. 왕이 허락하자 곧 백제로 가서 시가(市街)에서 춤을 추니, 백제 사람들이 담처럼 빙 둘러서서 구경했다. 백제왕이 이를 듣고 궁중에 불러 춤추게 하고 구경했다. 황창이 왕좌의 왕을 죽였고, 좌우 신하들이 그를 살해했다.

 

그의 어머니가 전해 듣고 울부짖다가 눈이 멀었다. 사람들이 그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하려고 사람을 시켜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속여 말하기를, ‘황창이 와서 춤춘다. 황창이 죽었다는 전날의 말은 거짓이다.’ 하니, 어머니가 기뻐 울며 즉시 눈이 다시 밝아졌다고 한다. 황창이 어려서 나라 일에 죽었으므로 향악(鄕樂)에 실어서 전해 내려온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문인 이첨(李詹, 1345-1405)은 이 전설을 믿을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우선 기록의 문제를 지적했다. 백제로서는 왕이 적국의 아이에게 살해된 사건이고, 신라로서는 자국의 어린 아이가 적국의 왕을 죽여 원수를 갚았던 사건이므로, 이는 두 나라에게 사소한 사건일 리가 없는데 <삼국사기>의 백제사와 신라사에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이첨은 또 신라인 황창이 무기를 지니고 백제에 침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경비가 삼엄한 백제의 궁중에서 왕을 죽이는 것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황창이 15-16세의 청소년이 아니라 더 나이어린 소년이었다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 같은 책 <풍속편>은 경상도 경주부에 검무 유희라는 풍속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황창랑(黃倡郞)은 신라 사람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나이 일곱 살 때에 백제(百濟)의 시가에 들어가서 칼춤을 추니, 구경꾼들이 담처럼 둘러섰다. 백제의 임금이 듣고 그를 불러다 보고는 마루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라고 명령하였다. 창랑은 기회를 타서 백제왕을 칼로 찔렀다. 백제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겨 그의 얼굴 모습을 본떠서 탈을 만들어서 칼춤 추는 형상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 탈춤이 전하고 있다.’고 했다.”

 

<풍속편>의 기록은 <인물편>의 기록과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황창의 나이가 15-16세가 아니라 7세였고, 황창이 백제왕을 찔렀지만 죽었다는 말은 없다. 백제왕을 찌를 때 황창이 청소년이었다는 <인물편>의 기록도 황당하지만, 7세였다는 <풍속편>의 기록을 믿을 수 있을까?

 

 

이첨은 신라인들이 황창의 전설을 지어낸 것은 그들의 원통함 때문이라고 했다. 이 아이(황창)는 필시 관창이었을 것인데, 관창의 기록을 읽거나 전해들은 신라 사람들은 그의 비참한 최후를 비통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관창의 충의가 성공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바람 때문에 관창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황창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지어냈다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황창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니면서 점점 살이 붙어 설화로 구성되고 향악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기에 이르렀으나, 결국 그 시작은 허구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관창의 사실과 황창의 전설을 구별하되, 이 두 이야기에 내재된 민중 감성과 집단 의식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겠다. 특히 그러한 민중 감성과 의식이 어떻게 <검무>에 녹아들어 15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게 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관창이 살았던 6세기 중반에 신라는 왜 백제에 원한을 품었던 것일까? 황창이 왕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대야성 전투(642) 때문이었다. 의자왕의 백제는 신라의 대야성(오늘날 경남 합천)까지 쳐들어와 함락시켰고, 대야성의 도독 김품석을 살해했다.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로, 그가 백제군에 투항하려다가 살해됐을 때 그의 아내이자 김춘추의 딸인 김고타소도 함께 살해당했다. 백제에 깊은 원한을 품은 김춘추는 654년에 29대 신라왕에 즉위했으므로 황창이 만났다는 신라왕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였음에 틀림없고, 황창이 죽였다는 백제왕은 의자왕이어야 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해 11월 낙양에서 병사했으므로, 황창이 의자왕을 암살했을 리는 없다.

 

 

황창의 죽음에 슬픔으로 멀어버린 어머니의 눈을 다시 뜨게 한 것은 황창의 얼굴 가면을 쓰고 추었던 검무였다고 했다. 심청 설화에서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한 것이 딸의 희생 덕분이었음과 의미가 통한다. 그만큼 그날의 검무가 황창의 검무 모습과 소리를 방불케 했었다는 뜻이겠다.

 

눈을 뜬 후에 심봉사는 환희에 휩싸였겠지만, 황창의 모친은 실망했을 것이다. 어차피 이 설화가 허구인 바에야 죽은 줄 알았던 황창이 살아 돌아온 것으로 끝났다면 좋지 않았을까?

 

황창의 설화가 가상의 시나리오라고 하더라도, 그가 추었던 활발하고 씩씩하고 절도 있는 검무가 안막과 최승희의 노력으로 되살아난 것은 다행한 일이다. (jc, 2026/4/14)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