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는 세계 순회공연의 계획을 발표하면서 ‘조선옷을 입고 세계를 돌겠다’라고 공언한 바 있다. 출발 열흘 전인 1937년 12월20일의 <동아일보(2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번 길이 우리 고유의 예술을 소개하는 것이 사명인 만큼 의상도 이와 어울리도록 쪽을 찐 데다가 금비녀 금귀지개를 찌르고 끝동 저고리에 긴 치마 그리고 버선과 꽃 댕기까지 철저한 조선의 귀부인 모양을 갖추어서 출발하게 되었다."

도쿄역에서 출발할 때 최승희는 양장에 모피코트를 입었지만, 요코하마에서 출항한 치치부마루(秩父丸)의 선상 파티에서는 조선복 차림이었다.
이 선상 파티는 항해 중에 선장이 개최하는 선객 환영 파티로, 일본식 스키야키 파티였다. 최승희와 함께 좌식 테이블에 앉은 다른 일행은 모두 양복 차림이었고, 심지어 남편 안막은 일본식 유카타 차림이었으나, 최승희만은 조선복, 즉 흰 저고리에 짙은 색 치마를 입었다.

약 2주간 태평양을 횡단하는 항해를 마치고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 하선할 때도 최승희는 조선복 차림이었다. 신문마다 최승희의 상반신 사진만 게재했기 때문에, 과연 최승희가 '긴 치마'를 입었는지 알 수 없지만, 상의는 알록달록한 무늬의 한복이었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공연을 마치고, 북미 대륙 횡단 열차로 뉴욕 그랜드센트럴역에 도착했을 때는 최승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선할 때와 같은 의상, 즉 알록달록한 무늬의 한복차림이었다. 뉴욕 매체들은 최승희의 전신사진을 게재했는데 그녀는 조선식의 ‘긴 치마’와 ‘버선’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다만 이 저고리가 ‘끝동 저고리’였는지는 사진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최승희가 뉴욕 그랜드센트럴역에서 찍은 사진은 2장이 남아 있다. 한 장은 기차에서 내리는 모습, 다른 한 장은 기차에서 하차한 후 플랫폼에서 여행 가방에 걸터앉은 모습이다. 이 두 장의 사진은 역으로 마중 나온 사진기자들을 위해 최승희가 자세를 취하면서 찍은 것이다.
지금은 여행 중에 사진을 찍는 것이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지만, 90년 전에는 여행과 사진이 둘 다 부자와 유명인만 누릴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시 유명 여성 여행자들은 자신의 여행용 가방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었다.

미국의 여성 비행사 어밀리아 에어하트(Amelia Earhart, 1897-1937), 여배우 캐럴 랜디스(Carole Landis, 1919-1948)와 퍼트리샤 닐(Patricia Neal, 1926-2010)이 여행 가방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찍은 사진을 남겼고, 최승희도 1938년 12월 24일 파리 북역에 도착했을 때도 비슷한 자세로 찍은 사진이 파리의 여러 신문에 실린 바 있었다.
당시의 여행 가방은 궤짝처럼 크고 튼튼했기 때문에 그 위에 걸터앉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성이 여행 가방에 걸터앉아 찍은 사진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여성 전용의 촬영 자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주 순회공연을 위해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최승희는 조선복을 입고 첫 기자회견을 하곤 했던 것이 거듭 확인된다. 그녀는 "조선의 귀부인 모습"으로 순회공연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왜 그랬을까? 같은 날짜의 <동아일보>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더욱 의의 있는 것은 조선의 고대 악기 중에 대표적인 것 30종류와 관혼상제에 사용하는 의복과 실내 소도구로 보료, 촛대, 문갑 등을 여러 벌씩 가지고 간다. 공연을 하는 곳마다 박물관이나 큰 홀을 빌려서 전람회를 개최하고, 문화 단체에서 기부를 청하는 데가 있으면 기부까지 하여 조선의 풍속을 널리 소개하기로 되었다."
즉, 최승희는 무대에서 조선무용을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문물과 의복을 통해서도 조선을 서양 세계에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악기와 문방구, 그리고 의복은 말로 하지 않고도 자신이 조선인임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jc, 2025/12/10; 2026/3/3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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