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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 100장면] 4. 로스앤젤레스

최승희는 1938122일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마친 후 124일 아침에 로스앤젤레스로 출발했다. 1938125일 자 <신세카이 아사히신문> 일본어판(3)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토요일 밤 현지에서 열린 공연에서 뛰어난 성공을 거둔 반도의 미인 최승희 일행은 어제 아침 8시에 현지를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했으며, 출발할 때 샌프란시스코 체재 중 각지에서 받은 호의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고 이 신문을 통해 전해 달라고 말했다.”

 

최승희 일행은 오전 815분 서던퍼시픽(Southern Pacific) 철도회사의 <데일라이트(Daylight)> 열차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역이 킹가와 4(King and 4th Street)에 있지만, 1938년에는 타운센트가와 3(Townsend and 3rd Street)에 있었고, 이 역이 서던퍼시픽과 센트럴퍼시픽, 웨스턴퍼시픽 등 3개 철도회사의 종착역이었다.

 

1914년 타운센드와 3가에 건축된 샌프란시스코 기차역. (출처: 위키피디아 영문판: San Francisco station)

 

<데일라이트>는 서던퍼시픽 철도회사의 해안노선(Coast Line)을 따라 샌프란시스코역과 로스앤젤레스 중앙역을 연결하는 열차로, 19224<데일라이트 특급(Daylight Limited)>으로 출발했다. 주말에만 운행하던 이 열차는 19234월 매일 운행으로 확대되었고, 1927년에는 760킬로미터(470마일)를 무정차로 12시간에 운행, “미국 서부 최고속 열차라고 불렸다.

 

이 노선은 1928년부터 무정차 방침을 포기하고 5개의 중간역에 정차하면서 열차의 이름도 <데일라이트 특급>에서 <데일라이트>로 단축됐고, 1937321일부터는 열차가 유선형으로 개조되면서 운행 시간이 9시간 45분으로 줄었다. 지금도 캘리포니아의 태평양 해안선을 따라 운행되고 있는 <데일라이트>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객 철도라고 홍보된다.

 

1930년대 말에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는 데일라이트 열차. (출처: 위키피디아 영어판: Coast Daylight)

 

19381월 현재, 최승희 일행이 탑승했던 <데일라이트> 코치석 편도 요금은 9달러 47센트, 일등석의 편도 요금은 14달러 20센트(+1달러 50센트의 좌석 요금)였다. 일등석 요금은 오늘날의 215달러(소비자물가 기준), 한국 원화로 약 33만 원에 해당한다. 당시 미국의 법정 최저임금이 시간당 1달러였으므로, 일등석 요금은 대략 미국 노동자의 이틀치 임금에 해당했다.

 

1937년의 데일라이트 열차의 요금 (출처: 서던퍼시픽 회사의 웹사이트, https://spdaylight.net/Service.html)

 

1938124일 월요일 최승희 일행이 탑승한 <데일라이트>는 아침 815분에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910분 산호세, 1032분 살리나스, 오후 17분 산루이스 오비스포, 335분 샌타바버라, 538분 글렌데일을 거쳐 오후 6시 정각에 로스앤젤레스 중앙역에 도착했다. 1938127<신세카이 아사히신문>의 영문판(1)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LA, 126]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데뷔 공연을 마친 한국인 무용가 최승희는 월요일(124) 저녁에 이곳(LA)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미모로 LA를 매혹했다. ... 매니저 겸 남편인 안필승과 피아니스트 이광준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열차 승강장에 내린 이 무용수는 많은 군중을 끌었다. 그녀의 우아함과 미모는 일화 불매(Don't Buy Japanese Goods)“ 배지를 달고 나온 조선인들의 존재를 무색하게 했다.”

 

1938년 2월3일 로스앤젤레스 주재 일본영사관이 일본 외무성 장관에게 제출한 보고서 "최승희의 도미와 조선인의 일화배척운동에 대한 건." (출처: 일본 외무성 외교역사자료관)

 

최승희가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은 로스앤젤레스 주재 일본영사관의 영사 오오타 이치로(太田一郎, 1902-1996)가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 1878-1948)에게 보낸 보고서에도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LA에 도착했을 때에도 많은 조선인들이 마중 나와 열차 안에서 화환을 증정하거나, 일본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우리 동포들의 도움을 받으라는 등 여러 불평을 늘어놓은 사람도 있었으며, ... ”

1937년 7월7일 시작된 일본의 중국 침략에 항의하기 위해 미국민은 대대적인 일제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워싱턴주 연방 연맹(WCF)의 여성 회원들은 1937년 10월 일제 실크 스타킹 불매 운동을 시작했다. (사진 출처: 1937년 10월16일의 씨애틀 일간지 The Sunday News의 1면)

 

LA의 조선인 동포와 일본인 팬, 그리고 일본공관은 모두 최승희를 환영했지만, 그들의 바람은 모두 달랐다. 일본공관은 최승희가 일본인 예술가로서 미국민의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려 주기를 원했지만, 조선인 동포들은 최승희가 조선인 무용가로서 일본인과 절연하고 일제 불매운동에 참여해 주기를 바랐다. 조선 예술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던 최승희는 일본공관의 협조가 필요했지만, 정작 자신은 일본인으로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처럼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최승희는 조선인 동포와 일본인 팬들 사이의 반목, 그리고 일본 공관과 자신의 견해 차이로 난관에 봉착했던 것이다. (jc, 2026/3/29)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