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12월29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최승희는 약 2주일의 항해 끝에 1938년 1월1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남편이자 매니저인 안막, 반주자인 피아니스트 이광준과 함께였다. 샌프란시스코는 3년으로 예정된 세계 순회공연의 첫 공연지였고, 이 공연은 1월22일로 예정되었다.

여객선 치치부마루의 선객들이 하선해서 입국심사를 받을 때, 미국 이민국은 선객 명단을 작성했다. 이 명단은 입국 심사와 세관 검사, 그리고 위생 검역을 위한 자료였을 것이다. 미국 이민국 아카이브에서 발견된 치치부마루의 선객 명단의 8페이지에 최승희와 안막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었다. 최승희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는 물증이 발견된 셈이다.
이 명단에는 안막의 이름이 안 히츠쇼(An Hitsusho), 최승희의 이름이 사이 쇼키(Sai Shoki)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안막의 본명 안필승(安弼承)과 최승희(崔承喜)의 한자 이름을 일본식 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그들의 여권에도 영문이름이 그렇게 기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한 장의 공문서가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이 배가 (1) 1937년 11월29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발한 "M.S. 치치부마루"라는 점, (2) 하선일 기준으로 최승희가 25세, 안막이 27세였다는 점, (3) 이들의 직업이 프로페셔널 발레리나와 그의 매니저라는 점 등이 확인되었다.
배 이름 앞의 M.S.는 동력선(Motor Ship)이라는 뜻이다. 디젤 엔진을 장착한 선박의 이름 앞에 붙이는 이니셜이다. 치치부마루는 1929년 5월8일 진수된 여객선이다. 디젤 엔진 4기, 전체 길이 178미터, 배수량 22,560톤, 정원이 1,159명(여객 836명, 승무원323명)인 이 배는 진수 당시 일본의 최대 여객선이었다.
치치부마루의 영문 이름은 1938년 티티부마루(Titibu Maru)로 바뀌었다가 여성의 가슴을 가리키는 속어(Tit)를 연상시킨다는 지적 때문에, 1939년 카마쿠라마루(鎌倉丸)로 개칭되었고, 태평양전쟁 중인 1942년에 일본 해군에 징발되어 군용 병원선과 수송선으로 활용되다가, 1943년 4월28일 필리핀 근해에서 미해군 잠수함(USS Gudgeon)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

미이민국 양식에 맞춰 타이핑으로 작성된 승객 명단에는 입국심사 중에 수정된 것이 있었다. (4) 최승희의 직업이 '댄서'에서 '프로페셔널 댄서(Professional Dancer)로, (5) 안막과 최승희의 인종(Race or People)이 일본인(Japanese)에서 조선인(Korean)으로 수정된 것이다. 이 수정은 최승희와 안막의 요청에 따라 이민국 관리가 연필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댄서'가 '프로페셔널 댄서'로 수정된 것은 오락 무용수가 아니라 예술 무용가임을 분명히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여권으로 여행해야 했던 두 사람은 일본 국적(Nationality)을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인종(Race)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임을 굳이 밝혀 수정했다.
"조선인인가 일본인인가"의 논란은 미국과 유럽 순회공연 중에 줄곧 최승희와 일본 외교당국이 실랑이를 벌였던 불씨였는데, 그 단초가 이미 치치부마루의 승객 명단에 나타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일본인 교포신문 <신세카이 아사히신문(1938년 1월13일)> 영문판(7면)은 제목과 기사의 첫 줄에서 "최승희는 진정 아름다웠다(truly beautiful)"는 이례적인 보도를 했고, "이는 입항을 취재하러간 기자들과 카메라맨들 사이에 만장일치된 인상"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 기사는 최승희가 하선할 때 "소박하고 이국적인 조선옷(simple and exotic Korean costume)"을 입었다고 전하면서, "1월22일 샌프란시스코 데뷔 공연을 기대하는데, 여기서 성공하면 세계 순회공연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최승희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또 다른 일본인 교포신문 <니치베이신문(1938년 1월11일)>의 영문판(4면)도 비슷한 내용을 보도했지만, 이 신문은 편집과 인쇄가 좋지 않았다. 이 기사의 두 번째 줄이 아래위가 뒤집혀서 인쇄되어서 읽기가 어려웠고, 영어 단어를 잘못 쓴 것이 두 개나 보였다. 기사 두 번째 줄의 arrival은 arrive로, 세 번째 줄의 abroad는 aboard로 고쳐야 뜻도 통하고 영문법에도 맞게 된다.

또 이 기사는 최승희가 “여러(several)” 명의 조선 음악가들의 반주로 공연할 것이라고 추측 보도를 냈지만, 반주자는 피아니스트 이광준 한 사람 뿐이었고, 때때로 매니저 역할의 남편 안막이 북이나 장구로 장단을 치곤했었을 뿐이다. (jc, 2025/11/18; 2026/3/2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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