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 작가의 2025년 <홍범도>전에는 홍범도 장군의 가족이 등장합니다.
<홍범도28(2024)>은 죽은 줄 알았던 아내가 살아 있음을 알고 홍범도가 북청의 집으로 달려가는 모습, <홍범도17>은 돌아오는 홍범도를 맞는 아내 단양 이씨(1873-1908)와 큰 아들 홍양순(1892-1908), 그리고 <홍범도15>는 둘째 아들 홍용환(1900-1921)이 태어난 후 네 식구의 단란한 모습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한 뒤에 재혼, 이인복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았고, 이 결혼에서 딸 홍연식(?-1986)씨와 외손녀 김알라(1942-생존)씨가 태어났습니다.
홍범도의 첫 부인 단양 이씨는 고향이 함경북도 북청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이름이 이옥구 혹은 이옥녀라는 말이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금강산 신계사 시절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890년 신계사에 들어가 상좌승 지담 스님의 행자승으로 약 1년간 수도했다고 하니까,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891년이었을 것입니다. 환속할 당시에는 이미 첫 아이가 수태 중이었다고 하고요.
환속하던 중 두 사람은 건달패들의 폭력으로 헤어졌지만, 당시 만삭이었던 단양 이씨는 천신만고 끝에 건달패들로부터 벗어나 고향 북청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내가 죽은 줄 알고 홍범도는 강원도 회양 먹패장골에서 땅을 빌어 농사를 지으면서 포수 생활도 시작했습니다.
을미사변(1895)이 일어나자 홍범도는 그해 11월 동료 포수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나이 27세였겠습니다. 강원도 철령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한 후 함경도 안변에 도착 유인석 부대와 합류, 세 차례의 전투를 치른 후 일시 의병을 해산했습니다.
이후 황해도 연풍에서 금광노동자로 은신했지만 감시가 강화되자 지경산을 넘어 함경도의 덕원으로 향하던 중 박말령에서 일본군 3명을 죽였고, 덕원읍에서는 탐관오리 전성준을 처벌했습니다. 1897년 함경남도 북청에 도착, 죽은 줄 알았던 아내를 5년 만에 재회했습니다. 유준 화백의 <홍범도11>과 <홍범도28>이 바로 이때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의 나이 29세였지요.
이후 홍범도 가족은 1907년말 까지 약 10년간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서 화전농사와 사냥으로 생활했는데, 홍범도 가족이 가장 평온하고 단란했던 시기였습니다. 첫째 아들 홍양순은 이미 태어나 자라고 있었고, 둘째 아들 홍용환도 태어났습니다. 유준 화백의 <홍범도15>가 이때의 모습입니다. 둘째 홍용환이 어린 것을 보니까, 1902-3년 경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미년(1907년) 군대해산과 함께 포수들의 총기를 회수하려 하자, 홍범도는 그해 11월 북청의 산포수 70명을 규합해 산포대라는 이름으로 의병활동을 재개했습니다. 갑산과 삼수, 혜산과 풍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사살하면서 맹렬한 활동을 벌이자, 일본군은 가족을 볼모로 잡고 친일단체 일진회 소속 조선인을 앞세워 홍범도를 회유, 체포하고자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일본군은 아내 단양 이씨에게 남편의 귀순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고 고문했지만, 그녀는 거부하고 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 일제는 단양 이씨의 발가락 사이사이에 기름먹인 솜심지를 끼우고 불을 붙이면서 편지를 쓰라고 고문했지만, 홍범도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은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그런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고문은 계속됐고, 단양 이씨는 스스로 혀를 깨물어 고문에 맞섰습니다. 그녀는 벙어리가 된 채 갑산 읍내로 이송되어 옥에 갇혔고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출생연도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향년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30대 중후반이었을 것입니다.
그 남편에 그 아내였습니다. 원래 의기와 애국심이 높으셨던 분인지, 혹은 홍범도 장군과 생활하면서 의기를 배운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미혼의 몸으로 승려 생활을 결단했던 점, 당시에 이미 글을 깨우쳤던 점, 남편 없이 어린 아들과 5년의 기약 없는 이별을 견딘 점, 그리고 홍범도 장군과 10년간의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끌었던 점 등으로 보아, 저는 단양 이씨가 원래 심성이 곧고 굳은 분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놀랍기는 홍범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서 옮겨놓은 단양 이씨의 발언은 <홍범도 일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지는 홍범도가 키질로르다에서 <고려극장>의 수위로 근무하던 시절, 연극인 태장춘의 아내 리함덕이 홍범도를 인터뷰해 만든 구술 자서전입니다.
리함덕의 홍범도 인터뷰 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일지를 바탕으로 태장춘이 희곡 <홍범도>를 완성, <고려극장>에서 상연한 것이 1941년이므로, 이 일지는 1940년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면 정확할 것입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은 인터뷰에 응하면서 자신의 항일무장투쟁활동을 틈틈이 기록해 놓은 <목필책>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1940년 인터뷰에서 아내 단양 이씨의 유언과도 같은 1908년 발언을 또박또박 구술한 것을 보면 30년이 넘도록 아내의 말을 잊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영웅호걸이라고 불러주고, 목숨을 버리기까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꺾지 않았던 아내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일본군은 103명의 일본군과 조선인 순사보조원 8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조직해 친일파 일진회 간부 임재덕과 대한제국 고급장교 출신의 부역자 김원홍에게 홍범도 부대의 지휘관으로 삼았습니다. 임재덕과 김원홍은 당시 17세였던 큰 아들 홍양순도 어머니 단양 이씨와 함께 일본군영으로 압송했습니다. 작은 아들 홍용환은 8살로 너무 어려서 외할머니와 집에 남겨졌다고 합니다.
단양 이씨가 자필 귀순 편지 쓰기를 거부하자, 토벌대의 임재덕과 김원홍은 홍범도 아내가 쓴 것처럼 꾸민 거짓 편지를 써서 8번이나 홍범도 부대 주둔지에 보냈지만, 모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사살 당했거나 거꾸로 의병에 귀순해 버린 것이지요.
그러자 임재덕과 김원홍은 큰 아들 홍양순에게 편지를 들려 9번째 사자로 산으로 올려보냈습니다. 아들이야 죽이겠느냐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편지를 들고 온 홍양순은 의병 지휘부 문 앞에 서기는 했으나 아버지 홍범도는 격분했습니다.
“이놈아! 네가 전 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마는, 네가 일본 감옥에 서너 달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놈이 됐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겠다!”
홍범도는 권총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은 귓바퀴를 찢고 관통했습니다. 한쪽 귀가 떨어져나갔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요. 공중에 던져진 5꼬뻬이카 동전을 쏘아 맞추는 홍범도가 눈앞에 선 아들을 못 맞출 리는 없었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아버지의 고뇌가 작동해 총알이 빗나갔거나, 일러 귀를 쏘았을 것입니다.
상처를 회복한 홍양순은 아버지의 의병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함흥 신성리, 통패장골 쇠점거리, 하남 안장터, 갑산 간평, 구름을령, 괴통병 어구, 동사 다랏치 금광 전투 등에 참가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중대장의 중책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홍양순은 1908년 6월16일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홍범도는 <일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정평 바맥이에서 500명 일본군과 싸움하여 107명 살상하고, 내 아들 양순이 죽고,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자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이는 중대장이었다. 5월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이순신 장군이 3남 이면이 일본군 자객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 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난중일기, 1597년 10월14일)”
이순신의 감정이 복받친 기록에 비하면 홍범도의 기록은 담담하고 객관적입니다. 그러나 담담한 표현 속에서도 맏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이 짙게 배어 있음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단양 이씨를 고문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임재덕과 김원홍의 토벌대 200여명은 용문동 더덩 장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의 매복에 걸렸고, 209명 전원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지휘관 임재덕과 김원홍도 포함됐지요. 결박되어 무릎을 꿇은 김원홍과 임재덕에게 홍범도가 말했습니다.
“너희 두 놈은 내 말을 들어라. 김원홍 이놈! 네가 수년을 진위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원을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에서 감자 농사하며 먹고사는 것이 그 나라 국민의 도리이거든. 도리어 나라의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할 것이다.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 다 처한다.”
홍범도는 김원홍과 임재덕을 나무 기둥에 묶고 “석유통의 뚜껑을 떼어 저놈들에게 뿌리고 불을 놓아라”고 명령했고, 이 명령은 즉각 실행됐습니다.
놀라운 것은 홍범도가 김원홍과 임재덕을 처형하면서 아내를 죽이고 아들을 간첩으로 보낸 죄를 묻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이 두 친일 부역자를 화형에 처한 것은, <홍범도 일지>에 따르면, 나라를 배신한 반역죄였을 뿐이지요. 개인감정이 대단히 절제된 판단이자 실행이었습니다.
10년 동안 단란했던 홍범도의 가족은 1908년에 붕괴됐습니다. 아내는 고문으로 사망했고, 큰 아들은 의병 투쟁 중에 전사했습니다. 이후 홍범도 의병부대도 대대적인 일본군의 반격으로 1908년 10월 압록강을 건넜고, 그때부터 만주와 연해주와 시베리아를 주유하게 됩니다.
유일하게 외할머니와 집에 남았던 둘째 아들 홍용환에 대한 기록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대로 북청에 살았다면 거기서 해방을 맞았을 것이고 북한 정부 아래 생활했을 것입니다.
북한 정부가 홍범도의 둘째 아들을 예우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승만이 김구와 김좌진의 독립투쟁을 무시했듯이 김일성도 홍범도와 여운형의 독립운동을 무시했기 때문이죠.
2021년 8월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키질로르다에서 수습되어 서울로 운송될 때, 대한민국 국군 유해 수습단은 홍범도 장군의 DNA를 채취했다고 합니다. 후일 홍범도 장군의 후손이 나타날 경우 이를 대조해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40세에 아내와 맏아들을 잃고, 8살짜리 둘째 아들을 북청에 남겨둔 홍범도 장군은 이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20년 이상 독신으로 살았고, 62세가 된 1929년에야 이인복과 재혼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1922년 ‘원동’의 식민지-반식민지 혁명가로서 국제공산당 국제대회에 참석하고, 1927년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연해주 체류시절에 재혼한 것으로 보입니다.
홍범도 장군이 이인복과 결혼한 직후 이인복이 데려온 손녀 에카테리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오늘날까지 전합니다. 이인복과 에카테리나는 손에 꽃을 들었고, 홍범도는 소련군 장교외투에 권총을 찬 모습입니다. 이 사진에서 홍범도의 앉은 키가 이인복의 선 키보다 큰 것을 보면 그는 대단한 장신이었음에 틀림없죠. 그런데 새 아내와 키를 맞추기 위해 자신은 앉아서 사진을 찍도록 했던 그의 배려심이 읽히는 사진이기도 합니다.
홍범도는 둘째 부인 이인복과의 사이에서 딸 홍연식(?-1986)을 얻었고, 그의 딸 김알라(1942-생존)가 홍범도의 외손녀로 지금까지 생존해 있습니다. 후일 북한에 생존했었을 지도 모르는 둘째 아들 홍용환의 자손이 확인될 때까지는 김알라씨가 생존한 유일한 혈육입니다.
유준 화백의 <홍범도28>과 <홍범도17>와 <홍범도15>을 보면서 홍범도 장군의 가족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글처럼 원고지 10매 내외로 예상했지만, 30매가 되고 말았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파란만장했던 투쟁과 그의 신산한 가족생활을 생각하면 이마저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글을 마치려면서 4가족이 모두 모인 <홍범도15>를 다시 봅니다. 행복한 모습입니다. 이 가족의 행복은 일제의 침략과 그런 일제와의 투쟁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지만, 그 희생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은 영웅의 가족을 기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jc, 202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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