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 화백은 <홍범도>전에 출품한 작품에 제목을 붙이면서 ‘홍범도’라는 풀 네임보다 ‘범도’라는 이름만 사용한 것이 많습니다. <범도의 눈물(2024)>, <범도의 귀환(2024)>, <범도가 온다(2024)> 등이 그런 작품들입니다.
성을 빼고 이름만 부르는 것은 친근함의 표현이죠. 홍범도 장군이 1868년생이시니까 우리보다 1백세이상 많으신 분인데, 그냥 ‘범도’라고 부르는 것이 결례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율곡이니 다산같은 호도 아니고,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이 못마땅한 분들도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아주 맘에 듭니다. 유준 화백을 따라서 자꾸 그렇게 부르다 보니까 친근감은 더해지고 결례라는 생각은 잦아드는군요.
그래서 홍범도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그린 유준 화백의 두 작품을 <범도의 응시>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백두산에 올라 천지의 물을 바라보는 <홍범도24(2024)>와, 눈이 내리는데 석양에 굽이치는 산의 물결을 바라보고 있는 <홍범도12(2024)>가 그것입니다.
후자에서 범도의 응시는 만주의 산악에서 고국산천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두 작품을 굳이 구별하자면 ‘범도의 응시-천지’와 ‘범도의 응시-조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길>전 감상문을 쓰면서 유준 화백을 푸른색의 마술사라고 썼는데, <범도의 응시-천지>는 그의 푸른색이 한껏 두드러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뭇거뭇한 산 그림자를 담은 천지 물빛과 구름 낀 사이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이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느낌을 주는 푸른색이죠.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아주 신선하면서도 청량한 느낌을 줍니다. 다만 그의 표정이 엄숙할 뿐이죠.
<범도의 응시-조선>은 가슴 아린 장면입니다. 일본군에게 아내와 아들을 잃고 조선 땅을 떠난 것이 1908년이니까 그의 나이 40세일 때입니다. 범도의 뒷모습만으로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차림이나 태도로 보아 적어도 봉오동-청산리 전투(1920년) 전후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그렇다면 50대 중반이겠습니다. 고국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으니 얼마나 고향이 그립고 가고 싶겠어요.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석양이 끼기 시작한 범도의 뒷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입니다.
<범도의 응시-조선>은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작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Der Wanderer über dem Nebelmeer, 1818)>를 연상시킵니다.
함부르크 미술관에서 본 이 그림이 매력적이긴 합니다만, 프록코트를 입고 단장만 하나 달랑 들고서 저 험한 산을 어떻게 올랐을까, 의문이 들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파도처럼 깔려 밀리는 안개로 자욱한 산악도 멋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 그림의 초점은 젊은 남자의 뒷태죠.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배경과 함께 자신만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옵니다.
<범도의 응시-조선>은 다르죠. 군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권총벨트가 둘린 허리에 양손을 올린 홍범도 장군의 뒷태만으로는 적군을 섬멸할 수 있는 자신만만함으로 읽힐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이 닿는 굽이치는 산자락들과 그 위를 서서히 덮어가는 저녁노을이 분위기를 반전시키죠. 그는 일본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고향이 그리운 겁니다.
‘범도의 응시’ 두 점은 홍범도 장군의 분위기를 진지하고 엄숙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한국인들에게 국뽕이 차오르게 만들 수 있는 작품이니까요.
하지만 뜻밖에도 홍범도 장군은 성격이 밝고 낙천적일뿐 아니라, 부하나 동포들과도 친숙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소련의 강제이주 강행으로 키질로르다에 정착했을 때 홍범도 장군이 이미 거의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였죠.
장군의 명성을 알아본 동포들로부터 “아바이 총 솜씨를 보여주시라요” 하는 요청을 받고, 홍범도 장군은 “그럼 5꼬뻬이카 동전을 공중에 던져 보라” 하고는 총으로 쏘아 맞췄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의 사격 솜씨가 70대에도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하면서도, 동포들에게는 근엄한 장군이기보다는 친근한 이웃이었다는 뜻이기도 하죠. (jc, 20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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