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 화백의 <홍범도>전에 전시되었던 작품 중에는 금강산의 봉우리와 함께 홍범도 장군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있습니다. <홍범도11(2024)>입니다.
홍범도 장군이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절은 신계사입니다. 작품에는 사찰 이름이 나타나지 않지만 수묵전기에는 그렇게 서술되어 있고, 유준 화백도 ‘신계사가 맞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놀랐던 것은 최승희 조사연구 중에 신계사가 최승희 선생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大金剛山譜)>의 촬영지였기 때문입니다. 최승희 선생을 포함, 신계사의 대웅전 앞에서 찍은 영화 촬영팀의 단체사진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그 사진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이곳이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다카시마 유사부로와 정병호 등의 초기 평전자들도 신계사를 몰랐는지 이 사진을 수록하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사진의 배경이 된 산세로 보아 저는 인왕산이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무악재 아래 현저동에는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이 세워졌을 뿐 사찰은 없었습니다. 배경 산세가 비슷해 보여도 그곳이 인왕산 맞은편 안산 자락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이곳이 어딘가”고 공개 질문했습니다. 개인적으로 3년 동안 조사했지만 밝혀낼 수 없었으므로 큰 기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4시간 만에 이곳이 <신계사(神溪寺)>이며 뒷편 봉우리는 <문필봉(文筆峯)>임이 확인됐습니다.
결정적인 제보를 해 주신 정철훈 선생을 포함해서 조성무, 홍원주, 박성환, 정창현, 안해룡, 정승일, 조만경, 황웅길, 이준호, 홍준호 선생 등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 사진의 촬영 장소가 중요했던 것은 <대금강산보>의 로케 동선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 촬영에 관련된 최승희 선생의 사진은 5장이 남아있는데, 다른 4장의 촬영 장소는 보현사와 석왕사, 만상정과 옥류담이었습니다. 5번째 사진의 촬영지가 신계사임이 확인되면서, <대금강산보> 촬영과 관련된 최승희 선생의 동선이 조금 더 자세히 확인된 것이지요.
최승희 선생의 <대금강산보> 촬영 시기는 1937년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반세기 전인 1890년에 홍범도 장군은 이 절에서 계를 받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던 겁니다.
홍범도 장군은 출생과 함께 모친을 잃었고, 9세에 부친마저 사망해 고아가 됐습니다. 이후 머슴 생활을 하던 중, 15세가 되던 1883년 나이를 속이고 조선 관군에 입대, 평양감영 소속부대의 나팔수가 되었습니다. 군복무 3년 동안 군교(=장교)의 부정부패를 숱하게 목격했고, 선임 사병들로부터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자신을 구타하던 선임을 맞구타하고 병영을 탈출했습니다.
병영을 떠난 홍범도는 1886년 황해도 수안의 제지공장에 취직했습니다. 3년여 동안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결국 공장주와 다투고 제지공장을 떠났습니다. 탈속을 결심한 홍범도는 1890년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22세였습니다.
그의 스승 지담 스님은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었다고 합니다. 홍범도는 스승으로부터 이순신 장군과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위난에 처한 나라를 구했던 활약상을 자세히 전해 들었습니다.
신계사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운명적으로 만난 사랑 때문이었지요. 상좌승 생활이 1년쯤 지났을 때 신계사 인근 암자에서 수행 중이던 비구니 단양 이씨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환속,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북청으로 떠났습니다.
최승희 선생은 신계사를 거점으로 촬영한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를 가지고 세계 순회공연을 떠났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페루의 리마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를 상영하면서 금강산의 신묘함과 함께 조선무용의 아름다움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50년 전에는 홍범도 장군이 신계사에서 인생의 전기를 맞았던 것입니다. 고아로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겪었던 생활난과 사회적 폭력을 피해 외금강의 신계사로 흘러 들어왔지만, 신계사를 떠날 때는 가슴에 사랑과 정열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물세살의 홍범도는 아내가 보여준 사랑과 신뢰, 그리고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국난극복 선열들의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jc, 20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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