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 화백의 2025년 <홍범도>전에는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에 조성된 홍범도 묘를 묘사한 작품도 전시되었습니다. <홍범도27(2024)>입니다.
화폭 오른쪽에는 “저명한 조선빨지산 대장 홍범도 묘, 1868년 3월1일 출생, 1943년 10월25일 사망”이라고 쓴 홍범도 장군의 묘비가 있고, 왼편에는 고려인 동포들이 줄지어 장군의 묘를 참배하는 모습입니다.
묘비 위쪽은 구름이 낀 사이로 언뜻언뜻 하늘이 보이는데, 그 하늘마저 검푸른 색이어서 비장함을 더해 주고 있죠.
1943년 10월25일 홍범도 장군이 사망한 직후 그의 묘지는 살던 집 근처에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묘역이 자꾸 내려앉는 바람에 키질로르다의 고려인 동포들은 1951년 장군의 서거 8주년을 즈음해서 고려인 노 혁명가 이인섭 등이 “홍범도 장군 분묘 수리위원회”를 조직, 장군의 묘를 키질로르다 중앙공동묘지로 이장했습니다. 이때 새로 세운 묘비가 유준 화백의 <홍범도27>에 보이는 묘비입니다.
이 묘비는 돌이 아니라 철판으로 만든 것입니다. 얇은 철판이 아니라 두툼한 철판이죠. 거기에 새겨진 글씨도 철판을 긁어 파낸 음각이 아니라, 철판 위에 도두라진 양각입니다. 용접한 흔적이나 틈새가 없는 것을 보면 주조해서 만든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주조를 했다면 석고 모형을 만들고 거푸집을 제작한 다음 청동을 부어 완성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진으로 보면 철판의 재질이 청동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아랫부분에 파란 녹이 슨 것을 보면 구리 성분이 들어있는 철판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암튼, 어떤 재질로 어떻게 제작된 묘비인지 사진만 보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엄청나게 공이 들어간 묘비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재료가 청동이라고만 하더라도 같은 크기의 화강암 묘비보다 여러 배 값이 높고, 대리석보다도 두 배 이상 비싼 묘비입니다.
이 정성스런 묘비를 제작해 홍범도 장군의 묘 앞에 세운 것은 키질로르다의 고려인 동포들입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에게 홍범도 장군은 자랑스런 영웅으로 정신적 지주이자 아버지같은 존재였습니다. <홍범도 일지>를 구술받아 기록한 <고려극장>의 배우 리함덕씨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 그녀가 홍범도 장군을 “아바이(=아버지)”라고 부르더군요.
홍범도 장군이 서거한 1943년에는 소련이 나치 독일과 싸우던 중이었고, 묘가 이장된 1951년에는 한국 전쟁으로 남북한이 피터지게 싸우던 시기입니다. 누구도 홍범도 장군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동포들이 정성을 다해 홍범도 장군을 장례하고 묘역을 조성하고 이 묘비를 세우면서 최선의 예우를 다해 온 것입니다.
30년이 지난 1982년 4월25일 고려인 동포들은 홍범도 장군의 묘역을 중앙공동묘지 뒤편에서 앞쪽의 넓고 쾌적한 위치로 이장했고, 이듬해(1983년) 서거 40주년을 맞아 <레닌기치> 신문 부주필이었던 김국천 등이 중심이 되어 “홍범도 장군 추모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조직, 모금에 착수했습니다. 모금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1984년 10월25일 동포들은 홍범도 장군의 추모비와 함께 반신 청동상을 나란히 건립했습니다.
이때 용처가 사라진 1951년의 철제 묘비는 당시 카자흐스탄 홍범도 기념사업회의 김 레프 니콜라예비치 회장이 자신의 집에 보관하기 시작했고, 이후 이 묘비의 존재는 잊혀졌습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카자흐스탄이 소련에서 독립한 후 김영삼 정부가 유해 송환을 추진됐으나, 남북한의 외교전으로 무산됐습니다. 1993년에도 북한이 카자흐스탄 정부에게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송환하겠다고 했으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가 반대해 거부됐습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남한이 카자흐스탄에 정부 조사단을 파송, 묘소 조사와 함께 유해 송환을 협의했습니다. 북한은 1995년 8월28일 평양방송은 “홍장군 유해 봉환은 사기 협작극이며, 홍범도 열사의 고향이 평양이고 후손들도 평양에 있기 때문에 평양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으로서는 남한의 송환 시도를 ‘사기협작극’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지나친 감은 있으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것은 “후손들도 평양에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후손이 생존해 있다면, 언젠가는 그 후손을 예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후손은 아마도 홍범도 장군의 둘째 아들 홍용환씨의 후손일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이 “평양의 후손”을 발표한 지 30년이 지나도록 홍범도 장군의 후손이 발표된 적은 아직 없네요.
1997년 5월 한국 국가보훈처와 몇몇 기업이 홍범도 장군 묘역 정비사업 지원금으로 1만달러를 전달했고, 이 자금으로 홍범도 장군 흉상 주위에 3개의 기념비를 추가로 건립하는 한편, 공원 묘역을 단장했습니다. 세 기념비란 (1) 1937년 강제이주 기념비, (2) 1995년 광복50주년 기념비, (3) 1997년 강제이주 60주년 기념비입니다. 이는 키질로르다의 고려인 동포들에게 홍범도 장군의 묘역을 맡기고 한국은 지원에 집중한다는 뜻으로 이뤄진 조치라고 봅니다.
다시 20여년이 지난 2019년 4월21일 카자흐스탄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고려인 애국지사 계봉우, 황운정 선생의 유해와 함께 홍범도 장군의 유해의 송환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현지 동포들은 홍범도 장군이 고려인들의 자존심이자 자존감의 상징적 인물이므로, 홍 장군의 묘소를 그대로 두자는 여론이 높았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2년 뒤인 2021년 8월12일 한국을 방문한 카자흐스탄의 토카예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의 홍범도 장군의 유해 송환 요청에 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조진웅 국민특사, 우원식 홍범도기념사업회 이사장,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이 유해 송환을 위해 파견됐습니다. 홍 장군의 유해는 8월15일 한국으로 송환되어 대전의 국립현충원에 모셔졌고, 키질로르다 중앙공동묘지에는 홍범도 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유해 송환이 완료된 지 3년이 지난 2024년 10월9일, 사진작가 김동우씨가 김 레프 니콜라예비치 당시 카자흐스탄 홍범도 기념사업회장을 만나 철제 묘비의 행방을 물었고, 김 레프 니콜라예비치 회장은 자신이 보관 중이던 묘비를 김동우 작가에게 보여주었고, 이를 한국에 기증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국회는 10월11일 “고려인 원로 김례프 선생이 홍범도 장군 묘비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에 기증하기로 했다”고 발표하고 “이는 홍 장군 묘비의 원본으로, 김례프 선생이 30여년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가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한 우원식 국회의장의 카자흐스탄 방문을 맞아 기증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10월22일 카자흐스탄을 공식 방문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이 철제 묘비를 기증받았고, 귀국하자마자 이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에 전달, 지금까지 기념사업회가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철제 묘비는 돌판의 앞면과 뒷면에 철판을 대어 묘비로 사용했던 것인데, 이번에 재발견되어 한국에 전달된 철제 묘비는 그 앞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전달된 철판 묘비의 네 귀퉁이에는 철판을 돌에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또 유준 화백의 <홍범도27>의 묘비에도 이 구멍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준 화백이 이 철제 묘비를 직접, 혹은 사진으로 자세히 관찰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철비의 뒷면은 아직 발견되지 못했지만, 홍범도 장군을 오래 연구해 온 반병률 선생은 이 묘비의 뒷면에 다음과 같은 예언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의 일흠(이름)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
홍범도 장군 사후에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이 예언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jc, 2025/2/11)
'유준2025길-홍범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준2025홍범도] 19. 범도의 사람들 (0) | 2025.02.12 |
---|---|
[유준2025홍범도] 17. 범도의 가족 (0) | 2025.02.10 |
[유준2025홍범도] 16. 범도의 응시 (0) | 2025.02.09 |
[유준2025홍범도] 15. 금강산 신계사 (0) | 2025.02.08 |
[유준2025홍범도] 14. 범도의 귀환(2024) (0) | 2025.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