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 화백의 <홍범도>전에는 호랑이와 매가 자주 등장합니다.
눈 내리는 벌판에서 화승총 한 자루로 호랑이와 대결하는 <홍범도7(2024)>도 있고, 높은 언덕에서 호랑이가 달리는 기차를 내려다보는 <홍범도19(2024)>도 있습니다.
백두산 천지를 내려다보면서 활강하는 장산곶 매를 그린 <홍범도6(2024)>과 손에 총을 든 홍범도가 비상하는 매를 올려다보는 <홍범도20(2024)>도 있습니다. 모두 홍범도 장군을 호랑이와 매로 형상화한 작품들입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조선인들 중에는 친일파가 많았죠. 생계형도 있었지만 출세형도 적지 않았습니다. 출세형 친일파를 부역자라고 부릅니다. 단지 먹고 살기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던져주는 제한적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일제에 부역한 인간들입니다.
이런 출세형 부역자들이 주장했던 위계적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일본인을 주인으로 떠받들면서, 자신은 일본인에 충성하는 우마(牛馬)같은 존재이며, 다른 대부분의 조선인 민중을 개와 돼지(犬豚)로 보았던 것이었지요.
물론 이는 일본인들이 만든 정형화입니다. 2004년부터 통용되기 시작한 일본 지폐 1만엔권을 일본인들은 ‘유키치’라고 부릅니다. 한국에서 5만원권을 ‘신사임당’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죠.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은 일본의 초기 계몽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과 조선인을 우습게 알기로 정평이 난 인물입니다. 조선을 미개한 야만국이라고 불렀고,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인을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으며 “조선인의 완고 무식함은 남양의 미개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주장했죠.
후쿠자와 유키치는 중국인을 더욱 폄하했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지지(時事)신보>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인은 장구벌레, 개돼지, 거지, 오합산적”이라고 막말을 했고, “서울에 주둔 중인 청국병을 몰살하라”고 주문했습니다.
충북대 사학과의 신영우 교수는 <지지신보>에 난 후쿠자와 유키치의 칼럼을 정훈교재로 사용했던 일본군이 벌레와 짐승을 죽이는데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인들의 민족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친일 부역자들입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지원서에 혈서를 동봉한 사실이 발견됐습니다만,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와 함께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이라고 쓴 지원서의 내용도 공개됐습니다.
대표적인 친일부역자 박정희는 자신의 일본제국의 “개와 말(犬馬)”처럼 충성을 다하겠다고 한 것인데, 이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민족분류법을 받아들여 일본인들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함이었겠지요. 연령 제한을 포함한 여러 부적격 요인에도 불구하고 이 혈서와 지원서는 받아들여졌고,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가 되어 중국인과 조선인을 탄압합니다.
박정희의 혈서를 보도한 것이 1939년 3월31일치 <만주신문(7면)>입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카자흐스탄 키질로르다로 강제이주 당한 지 2년만이죠. 범과 매가 사라진 조선과 만주에서 개와 말을 자처하는 박정희 같은 인간들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죠.
한때 인왕산이나 지리산을 비롯해 한반도 전역에 서식했던 조선범은 지금은 백두산 일대를 제외하고는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만, 장산곶 매는 백기완의 <장산곶매 이야기>, 황석영의 <장길산> 등에 의해 부활했습니다. 장산곶매는 한국 현대사를 통해 외세-기득권층에 맞서 싸우는 민중의 표상이자 대변자로 자리매겨졌지요.
유준 화백이 홍범도 장군을 장산곶매와 함께 그린 것도 바로 그런 자리매김의 일환이라고 생각되는군요. (jc, 20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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