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일본에서는 [The Japan Advertiser]라는 영어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1890년에 미국인 로버트 메이클레존(Robert Meiclejohn)에 의해 요코하마에서 창간되었으나 1913년 본사를 도쿄로 옮겨 발행되다가, 1940년 일제의 언론 통폐합으로 [The Japan Times]에 흡수된 신문이다. 합병 후의 신문 이름은 [The Japan Times and Advertizer]로 개칭됐으나, 1943년에 [Nippon Times]로 개명되었다가 1956년에 다시 [The Japan Times]의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1935년 2월10일자 [The Japan Advertiser]는 최승희 소개 기사를 게재했다.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 이후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이지만, 그녀의 명성이 급속히 높아지자 특별취재와 인터뷰를 병행해 작성한 기사를 낸 것이다. 하지만 이 기사에는 과장과 오보가 섞여 있었다. 이 기사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최승희는 항상 춤추기를 원했다.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것은 바랄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한국의 게이샤인 기생들의 춤은 한계가 분명했고 농부들은 축제 때에 춤을 곧잘 추었지만 최승희는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었고, 그들의 춤을 보면서 내가 하면 저들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녀의 가족은 최승희의 그런 야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의 연예인은 하층민의 직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는 이 야심찬 어린 소녀를 무용의 길로 이끌어 줄 선생님도 없었다. 그녀의 무용 경력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난 것처럼 보였다.“
최승희가 날때부터 춤추기를 원했다는 보도는 근거가 없는 기자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내용은 그런대로 후일의 상황이나 의견을 앞당겨 보도한 것으로 완전한 오보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기사는 최승희가 무용에 입문하게 된 사정과 도쿄 무용유학 과정, 그리고 경성에 돌아가 무용연구소를 설립해 공연활동을 했던 사실을 보도했고, 마침내 도쿄에 돌아와 이시이무용단에 재입단, 1934년 9월20일 도쿄 데뷔공연을 가졌던 과정을 다고 간략하게 보도했다. 이 시기에 대한 최승희에 대한 서술 중에서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이시이 무용단에 다시 합류한) 오늘날 최승희는 서양 무용의 가장 뛰어난 선생의 한명이 되었다. 이시이 선생은 마리 비크만 스타일의 무용을 선호했으나 최승희는 하랄트 크로이츠베르크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고대 한국무용에 대한 그녀의 해석이 치밀하고, 깔끔한 리듬을 강조한데서 그 영향을 읽어볼 수 있다.”
이시이 바쿠가 마리 비크만의 애호가라거나 최승희가 하랄트 크로이츠베르크의 숭배자라는 내용은 아마도 최승희 인터뷰에서 나온 발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어서 기사는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에 대해 언급했다.
“최승희는 이시이 무용단원으로 여러 번 다양한 프로그램에 등장해 춤을 추었지만, 개인 공연은 한번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공연이 워낙 성공적이어서 관객들은 어째서 그녀가 더 자주 일반 대중 공연을 하지 않는지를 궁금해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무용에 만족하지 않고 있으며 더 많은 훈련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기사는 최승희가 “개인 공연은 한 번 했을 뿐”이지만 “그 공연이 워낙 성공적”이었다고 전했다. 이를 통해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이 관객 동원과 비평의 양면에서 성공적이었음을 암시했다. 더구나 “관객들이 더 자주 대중 공연을 요구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최승희의 지명도와 인기가 상승하고 있다고 보도한 것이다.
기사는 또 최승희가 “조선의 유일한 무용가”이며, 그녀의 “목표와 야망은 조선 고대의 무용을 부활시키고 재창조하는 것”이고, 나아가 “새로운 조선무용을 가지고 유럽과 아메리카의 무대에 서는 것”이라고 서술했다. 이 역시 최승희 인터뷰에서 나온 내용일 것이다. 이어서 기사는 최승희의 연구방식과 무용공연을 준비하는 방식도 소개했다.
“이 젊은 무용가는 토쿄에서 열리는 다양한 공연에도 참석하는데, 이는 다른 무용가들의 춤, 심지어 그녀의 춤과는 완전히 다른 유파의 춤을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무언가 배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한 무대 의상을 스스로 제작하고 무대 장치와 조명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다른 연극이나 무용작품들이 그녀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것이다. 최승희는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여성 무용가들은 연습과 훈련에 매우 열심이며 인기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끝으로 기사는 최승희의 사생활에 대한 내용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올해 22세인 최승희는 키가 크고 날씬하지만, 식이요법이나 체중조절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한국음식과 일본음식과 서양음식을 다 같이 좋아하며 그 세 종류의 음식을 모두 많이 먹는다고 한다. 그녀는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마시지는 않지만 이따금씩 담배는 더러 피운다.”
1935년 2월10일 현재 최승희가 22세라고 밝힌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최승희의 양력 생년월일은 1912년 2월11일이기 때문에, 인터뷰가 며칠만 늦게 이뤄졌거나, 혹은 기사가 하루만 늦게 게재됐다면, 그녀의 나이를 23세라고 써야했을 것이다.
또 최승희가 술을 마시지 못하지만 담배는 즐긴다는 사실은 다른 문헌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내용이다. 다만, 필자는 최승희의 파리 공연을 취재하던 중, 프랑스의 화보잡지에 최승희가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 실린 것을 발견한 바 있었다.
이어서 기사는 최승희의 신상에 대한 오보를 냈다. 그녀의 결혼에 대한 내용이었다.
“(최승희는) 미혼이며 “한동안은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터뷰가 있던 날 저녁 늦게 우리가 튀김 요리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을 때 그녀는 요리사를 볼 수 있게 자기와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 “왜냐하면 곧 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최고의 여자 무용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의 소원을 이루게 된 모양이다.“
1931년 5월에 결혼한 최승희는 딸도 있는 유부녀였다. 그런 그녀를 “미혼(not married)”라고 소개하고, 인용부호까지 사용해 가면서 “한동안은 아직” 결혼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전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더구나 튀김요리 식당에서 최승희가 요리하는 것을 볼 수 있게 자리를 바꿔달라면서 ‘곧 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구체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내용이어서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는 실제상황이 아닌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심하게 의역한 것이다. 원문은 “Stage door Johnnies, make of that what you will!”이다. Stage door Johnny는 여배우를 쫓아다니는 남자(들)이다. 그들에게 하는 말이다. “당신들 좋은 대로 멋대로 해석해도 괜찮을 것 같군!”
이 같은 은어 표현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기자는 미국식 속어/은어에 능통한 미국인이거나, 일본인이더라도 원어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jc, 2024/8/30)
'도쿄1934공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東京1934公演】 34. [The Japan Advertiser]の誤報 (0) | 2024.09.04 |
---|---|
[東京1934公演] 33.公演評価(5) [三千里]の具王三 (0) | 2024.09.04 |
[도쿄1934공연] 33. 공연평(5) [삼천리]의 구왕삼 (4) | 2024.09.04 |
【東京1934公演】 32.公演評(4) 「文芸」の川端康成 (0) | 2024.09.04 |
[도쿄1934공연] 32. 공연평(4) [문예]의 카와바타 야스나리 (6) | 2024.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