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 직후, 이시이무용단은 조선 순회공연을 떠났다. 경성에서는 1934년 10월28-29일 이틀 동안 공연을 열었는데, 최승희의 안무작품은 모두 5개 연목으로, 28일의 공연에서는 [습작], [에헤야 노아라], [검무], 29일에는 [희망을 안고서]와 [승무]가 상연되었다.
사진작가 구왕삼(具王三, 1909-1977)은 두 공연을 모두 관람하고 자신의 감상을 [삼천리] 1935년 1월호에 기고했다. 그는 글의 첫머리에서 조선의 무용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유독 무용분야는, 역사적 유산이 극히 빈약하고, 생활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채, 무용에 대한 인습적 기괴한 악관념으로 인하야, 조선의 무용은 오랫동안 수난기를 당하야 ... 아직 조선은 민속무용이나 고전무용이 다 같이 황폐한 광야가 가로 놓여있을 뿐이다.”
문장이 그리 깔끔하지는 않지만, 조선의 무용에 대한 구왕삼의 인식이 최승희의 그것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구왕삼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용계에 투신한 최승희를 다음과 같이 치하했다.
“이 같이 특수한 지대에 처한 오늘 조선 무용계에 무용을 위해 생명을 바치고 조선의 생활감정에서 일편의 반영의 줄기를 잡아 조선무용을 재건설하고 무용의 역사적 유산물을 계승하여 나갈 유일한 무용가 최승희씨의 존재는 금후 조선 무용계에 한 큰 자극이 될 것이며, 충동이 될 줄 믿는 동시에 최승희씨는 무용가로써 갖출 헌신이나 기술적 성숙이나 예술적 사상과 매혹적인 예풍은 무용가로써 다 갖춘 유복한 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어서 구왕삼은 최승희의 무용작품에 대한 감상을 서술했는데, 우선 [습작]에 대한 그의 감상은 다음과 같았다.
“[습작]은 무음악적 무용으로 타주악기의 음향작용에 의하야 표현하는 동작을 뵈여주는 무용인데 『습작』에서 가장 강하게 보여주는 것은 사상과 육체의 친밀적 소화로서 고민의 강음적 태도는 무용미 이상 극적 요소를 집중시켜 무용의 본격적 핵심을 위촉하게 되었다. 무용은 참으로 육체의 예술임을 깨닫게 되며 이 육체를 무시해서는 예술적 표현이 없다는 것을 당야 최승희씨의 무음악적 작용으로 표현되는 육맥(肉脈)을 보고 한층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경성 공연에서는 최승희가 [습작]의 독무만 상연했으므로 A와 B의 구별은 하지 않았지만, 도쿄 데뷔공연의 [습작A]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는 [습작A]를 통해 음악으로부터 독립적인 무용동작이 몸의 운동 자체만으로도 미적 정조를 전달할 수 있음을 보이려 했는데, 적어도 구왕삼에게는 이러한 정조가 잘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무용은 참으로 육체의 예술”이며 “육체(의 동작)을 무시해서는 예술적 표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왕삼은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비판했다.
“『에헤라 노아라』는 제일로 음악의 효과가 몹시 치명상을 당하게 되어 참으로 불쾌하였다. 양악의 바이올린과 조선의 장구와 합주한 음악으로 무용을 하게 되는데 장구의 장단이 몹시 강음적인 음향에 바이올린은 D선 중심을 많이 사용하여 음량이 몹시 약하여 조화가 되지 않은 점으로 보나 또는 음악적 가치성을 보아 무용반주로는 너무나 빈약하여 이 무용에 대하야 입체적으로 보조를 같이 하지 못하였다. (이것도 이시이 바쿠의 말에 의하면 불과 수 시간 내에 합주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즉, [에헤야 노아라]의 반주음악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것인데, 구왕삼은 “양악의 바이올린과 조선의 장고”가 합주된 것이 “효과가 너무나 빈약하여 이 무용에 대하여 입체적으로 보조를 같이 하지를 못”했다면서, 거기에는 합주의 연습부족도 원인의 하나였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에헤야 노아라]의 안무에 대해서는 구왕삼도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무용 전체의 의상이나 안무에 대하여서는 신선미를 띄고 순조선적 감정에서 『팔』과 『어깨』의 동작을 많이 사용하는 점과 자연스런 안무적 수완은 조선재래 민속무용을 중심으로 한 낙천적 태도로써 조선 특수한 팔과 어깨의 동작법과 표현법으로 된 무용이다.
“뒷짐을 지고 비틀거리는 자태이라던지 고개를 간들간들거리는 동작은 조선 고전적 민풍의 특이한 자태의 일장을 풍자한 감을 충분히 표현하였으며 원만한 ”테크닉“에서 움직이는 ‘어깨’의 회원적(回圓的) 동작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보지 못할 조선 독특한 무용의 형태를 답습하는 일방 고전무용의 ‘리듬’ 속에서 신선한 일경지를 개척한 점이 보인다.”
구왕삼은 [에헤야 노아라]의 안무를 극찬한 후에 또 다시 조선무용 반주음악의 빈약함을 지적하면서, 향후 조선의 작곡가와 연주자들이 많이 나와서 조선무용의 반주음악을 담당해 주기를 희망했다.
“나는 이 『에헤라 노아라』를 보고 무엇보다도 무용은 무용을 위하야 작곡된 악곡이 필요하며 무용악에 의하여 창생된 무용이야 얼마나 원만한 예술적 무용을 창작할 것인가 할 때, 우리에게 최승희씨의 예술발전을 도와주고 조선무용의 재건을 위하야 수완있는 작곡가가 없음을 심히 유감으로 느끼는 바이다. 작곡가와 연출가와의 협력에 의하여 창조된 무용이 순정한 조선의 감정에서 표현한 줄 믿는 바다. 빈약한 조선무용의 금후 발전을 위하여 이를 도와줄 음악이 똑똑하지 못한 이 처지이니 직접 당하는 최씨 자신의 쓰라린 마음이야 여북하겠는가.”
한편, [검무]에 대하여 구왕삼은 무용의상의 고증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했다.
“최씨는 이 검무의 본통의 의의를 재현하여 보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먼저 검무의 의상이 고전적 기분을 유실한 것 같으며 그 색채에도 다소 두뇌를 썼으면 한다. 그리고 장군의 관(=모자)은 어느 시대의 역사적 배경에서 고안한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조선의 검무로써 가질 관으로 그 모형이 불만이다. 물론 새로운 표현으로써 새로운 각도를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 같으나 의상과 관의 조화가 미장(美將) 황창(黃冒)을 상징할 장중한 맛이 없는 감을 주게 하였다.”
즉, [검무]가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용이면서도 의상은 고대의 복장으로 인식되기 어려우며, 특히 관모(官帽)는 신라의 것이나 조선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불만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검무]의 동작에 대한 비판도 제기했다.
““검무는 자유스럽게 회전할 수 있는 두 개의 칼로써 타주악기(大鼓)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전체적으로 비교적 손과 팔 동작을 중심으로 구사하는 무용인데도, 변화가 너무 적고 또한 상체와 팔의 유동(流動)이 없어 딱딱한 맛이 나며, 표정도 유연한 표정을 많이 쓰게 되었다. 좀더 내면적 구성이 웅장하며 변화성이 풍부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즉, 동작의 변화가 적고, 특히 상체의 변화가 별로 없어서 딱딱한 느낌을 줄 뿐 아니라, 얼굴 표정도 좀 더 유연하게 가지기를 주문했다. 즉, “내면적 구성이 웅장”하고 “변화성이 풍부”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구왕삼은 첫날의 검무보다 둘째날의 검무가 리듬이 명확하고, 몸동착도 강력하여 더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검무]의 반주음악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검무도 역시 음악적 반주로는 평철판(平鐵板)의 타격악기의 음향과 반복적으로 타주하는 강성적(强聲的)인 대고의 북소리에서 무용하게 되었는데, 이 박자적인 북소리에 맛추어 하지(下枝)의 방축(放蹴)적 동작과 발의 박자는 강조한 맛이 났으며, 동작의 선 하나하나 마다 조선무용의 예풍을 표현하기에 많은 고심을 쌓은 것이 무겁게 인상에 남게 되었다.”
즉, [검무]의 반주로 평철판(심벌즈?)과 북을 사용했는데, 이 두 타악기의 박자와 하체의 움직임이 잘 맞았고, “동작의 선 하나하나가 조선무용의 예풍을 표현하기에 많은 고심”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했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구왕삼은 “자신의 지적은 비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최승희의 무용을 보고 소감”을 말한 것뿐이며, “이시이무용단 일행 중에서 어느 면으로나 가장 우수한 천품과 천체를 타고난 우리의 무용가 최승희에 대하여 찬사를 다할 바가 없다”고 치하했다. (jc, 202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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