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은 신문이나 잡지에 의해 적극적으로 취재되거나 보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연 전에는 홍보기사와 광고문이 적지 않게 게재되었고, 최승희 자신도 “공연에 즈음”한 감상을 밝힌 기고문이 발견되지만, 정작 공연 직후에는 이를 평가한 기사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후 한 달후 [문예(文藝)]지 1934년 11월호에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의 공연 감상문, “조선무희 최승희”가 실렸는데, 이 글의 폭발력이 매우 컸다. 공연감상문이라기 보다는 최승희와 그의 조선무용에 대한 소개와 추천의 글인데, 이 글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일본일 좌담회(日本一座談會)’라는 것을 [모던일본(モダン日本)]이 개최했을 때, 여류 신진 무용가 중에 일본 제일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나는 서양무용에서는 최승희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 나는 아무 주저도 없이 최승희가 일본 제일이라고 대답하였다. 내가 그렇게 밀하기에 족할 만한 것을 최승희가 가지고 있다. ... 첫 번 째는 훌륭한 체구이다. 그의 무용의 거대성이다. 힘이다. 그런데 또한 한창 춤추기 좋은 연령이다. 또한 그의 독특한 민족적 냄새다.”
최승희가 일본최고의 근대무용가로 꼽은 이 글은 향후 최승희를 소개하는 데에 빠짐없이 인용되었다. “일본의 대문호 카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 최고의 서양무용가로 꼽은 최승희”라는 문구는 신문이나 잡지 기사는 물론, 최승희가 발행한 [최승희 팜플렛]에도 빠짐없이 등장했다.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이 문장 덕분에 최승희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은 “조선 유일의 무용가”이자 “일본 최고의 무용가”로 자리매겨진 것이다.
오사카시 키타구(北区) 고노하나마치(此花町)에서 의사 카와바타 에이키치(川端栄吉)의 장남으로 태어난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1901-6년 사이에 부모를 여의고 니시나리군(西成郡) 도요사토무라(豊里村, 지금의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를 거쳐 미시마군(三島郡) 도요카와무라(豊川村, 지금의 이바라키시)로 옮겨 조부모와 생활했다. 1909년에는 누나 와카코(芳子)가 사망했고, 1914년까지는 조부모도 사망해 혈혈단신이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도요카와 소학교(1906년)와 오사카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이바라키 고등학교, 1912년)에 입학했고, 독서에 탐닉하고 작가에 뜻을 두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케이한(京板)신보]에 단편소설,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1917년 도쿄 제1고등학교 영문과(1917년)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1920)했다가 국문과(=일문과)로 전과했다. [신사조(新思潮)]에 기고한 “초혼제일경(招魂祭一景)”이 기쿠치 칸(菊池寛, 1888-1948)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文藝春秋)]의 동인으로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12년간(1935-1948)이나 퇴고를 계속하며 심혈을 기울였던 [설국(雪國)]이 계기가 되어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이 이전에도 문예간담회상(1937년, 설국)과 키쿠치칸상(1944년과 1958년, 고향, 석양), 예술원상(1952년, 천마리의 종이학), 노마 문예상(1954년, 산소리), 마이니치 출판문화상(1962, 잠든 미녀)을 수상할 만큼 빼어난 문장력을 보였다. [문예]지에 “무희 최승희론”을 기고했던 1934년에도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이미 일본의 대표작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더구나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창작 초기에 무용과 무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최승희의 무용을 관람하기 전에 그는 이미 무희가 등장하는 소설을 12편이나 집필했다.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 1926)], [윤방의 무도(閏房の舞蹈, 1929)], [용자여풍속(踊子旅風俗, 1929)], [수족관의 용자(水族館の踊子, 1930)], [귀태의 죽음과 용자(鬼態の死설と踊子, 1930)], [닭과 용자(鷄と踊子, 1930)], [폴란드의 용자(ポオランドの踊子, 1930)], [무용(舞踊, 1931)], [무용화(舞踊化, 1931)], [용자와 이국인의 어머니(踊子と異國人の母, 1932)], [무용회의 밤(舞踊會の夜, 1932)] 등이 그것이다.
[문예]지에 “무희 최승희론”을 발표하고난 직후에도 [고향의 춤(故鄕の踊, 1934)]과 [무희의 내력(舞姬の歷, 1935)]을 발표했고, 그의 대표작인 [설국(雪國, 1935)]과 [무희(舞姬, 1950)]의 여주인공도 춤추는 게이샤거나 무희이다.
이같은 작품 경력 때문에라도 카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승희를 “일본일의 무용가”라고 선언했을 때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고, 최승희는 이 평가를 자신의 공연활동 홍보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최승희 일본일 무용가”라는 선언은 그 자체가 충격적이면서도 반론의 여지가 없는 선언이었지만, 그것은 주관적인 평가는 아니었다. 앞의 인용문에 나오듯이, “큰 체구와 젊은 나이, 그리고 민족적 냄새”가 그 이유로 들었다. 나이와 몸매는 당시의 평론가라면 누구나 지적하곤 했던 것이지만, “최승희가 일본일의 무용가인 이유로 민족적 냄새”를 든 것은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독특한 지적이었다.
그리고 이 지적은 최승희의 도쿄데뷔공연보다 이른 시기에 가진 생각이었다. 즉 1933년 5월 최승희가 잡지 [영녀계] 주최의 근대여류무용대회에 출품했던 [에헤야 노아라]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최승희가 다시 내지(內地j에 와서 이시이 바쿠(石井漠)씨 문하에 돌아와서 가진 첫 무대는 「레이조카이(令女界)」 주최 여류무용대회였다. 이 대회는 젊은 여류무용가의 거의 전부를 모았다. 최승희는 [에헤야노아라]와 [엘레지1]을 춤추었다. [에헤야 노아라]는 그가 내지에서 처음 추는 조선무용이었다. 내가 그를 본 것이 최초인 그날에 수십의 무용 가운데 나에게 가장 강한 감명을 주었다.”
그는 [에헤야 노아라]와 같은 무용작품을 더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그래서 [모던일본] 잡지의 조선인 사장 마해송(馬海松)을 통해 청탁까지 했고, 마침내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승낙아래 최승희가 도쿄데뷔 공연을 개최함으로써 조선무용을 더 볼 수 있게되어 “나로서는 숙원이 풀어져서 즐거웠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최승희의 도쿄 제1회발표회를 관람하면서도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관심은 2부의 조선무용에 집중되었다. 그는 최승희의 신무용, 즉 현대무용도 강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의 조선무용에는 홀딱 반했다고 고백했다.
“신무용 작품에는 [에레지1], [인도인의 비애], [황야를 가다], [폐허의 자취] 등을 나는 보았으나 ... 미완성의 정열이다. 밝은 [희망을 안고서]라든지, 조화된 [로망스의 전망], 움직이는 시스템의 [습작]은 더군다나 시작품이다.
“그런데 [검무], [에헤야 노아라], [승무] 등의 조선무용이고 보면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 통달하고 자유로우며 교묘해서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다. ...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일본의 서양무용가에게 민족의 전통에 뿌리박은 강력함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최승희의 현대무용은 미완성이고 이제 시작하는 단계이지만, 조선무용은 최승희가 이미 “통달하고 자유롭고 교묘”해서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단계에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의 신무용가들도 최승희의 예를 본받아서 “민족의 전통에 뿌리박은 강력함을” 배워야 할 것이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와 함께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에헤야 노아라]가 “일본의 [가츠보레(かつぽれ)]와 같이 술자리의 여흥으로 추는 춤으로, 그녀의 아버지의 그 춤을 보고 창작한 것”이라면서, 최승희의 조선무용을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물론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그대로 춤추는 것은 아니다. 옛날 것을 새롭게 하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고 없어진 것을 재생케 하는 등, 자기 스스로 창작하는 것이 생명이다.”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무희 최승희론”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가 이시이 바쿠에 이어 최승희와 그녀의 조선무용을 가장 깊숙하게 이해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jc, 202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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