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도쿄 데뷔공연의 3부 2번째 연목은 <포엠>이다. 프로그램에서는 <포엠>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소개했다.
13. 포엠(ポエム), 스쿠리아빈, 찬조출연 이시이 바쿠(石井漠)
프로그램의 해설에는 <포엠>의 안무자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6-1962)의 작품일 것이다. 최승희도 <리릭포엠(リリツク·ポエム, 1935)>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는 1935년 10월22일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제2회 신작무용발표회에서였다.
그밖에도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의 작품들 중에는 제목이 비슷한 것이 적지 않다.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와 <포엠>과 <마스크>는 최승희의 <우리의 캐리커처>, <리릭포엠>, <봉산탈> 등과 제목이 비슷하다. 최승희의 작품 활동에 대한 스승 이시이 바쿠의 영향이 여러 수준과 측면에서 관찰되지만, 작품의 제목에서도 영향력을 읽을 수 있다.
제목이 유사하다고 해서 작품 자체가 유사한 것은 아니다. 음악과 의상과 안무가 전혀 다른 작품들이지만, 제목만 보면 짝을 이루는 작품들이 꽤 많을 뿐이다. 스승의 작품 제목들이 제자의 창작 발상에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고, 최승희도 그런 영향을 숨기지 않았다.
이시이 바쿠의 <포엠>은 최승희 데뷔공연 전에 발표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바쿠팜플렛(漠のパンフレット)> 1집(1927년 7월)과 4집(1930년 7월)>에 수록된 이시이 바쿠의 작품 목록에도 <포엠>이라는 작품은 없었다. <바쿠팜플렛>은 8집(1935년)까지 출판되었으므로 조사가 더 필요하지만, <체념(あきらめ)>과 마찬가지로 <포엠>도 이시이 바쿠의 초기 작품일 것이므로, 1-4집의 작품 목록에 수록되지 않았다면, 그 이후에 창작된 작품일 가능성은 낮다.
<포엠>이 이시이 바쿠의 초기 작품이라는 것은 제목 때문이다. “포엠(ポエム)”이란 “시(詩)”라는 뜻이고, 이는 이시이 바쿠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 1886-1965)과 함께 “무용시(舞踊詩)”운동을 시작했었던 1916년 전후의 작품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무용시(舞踊詩)라는 용어를 먼저 사용한 것은 이시이 바쿠가 아니라 야마다 코사쿠였다. 그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14년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조직했을 때, 이시이 바쿠는 데이고쿠 가극부의 죠반니 로시 단장과 갈등을 빚고 가극부에서 해고당한 터였다.
이시이 바쿠는 1914년 데이고쿠 가극부의 동창생 무라카미 키쿠오(村上菊尾, 1893-1982)의 소개로 야마다 코사쿠를 소개받았고, 그의 연습실에서 무용시 운동을 시작했다. 이때 야마다 코사쿠가 “무용”이라는 말 대신 “무용시”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이시이 바쿠는 <나의 얼굴(1940)>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지금의 야마다 부인이 당시 데이고쿠 가극부 동기생이었던 관계로, 야마다 선생에게 소개해 줄 것을 구했고, 이사도라 던컨, 사카로프, 니진스키, 달크로즈 같은 훌륭한 이야기들에 나는 완전히 푹 빠져버렸다. 나는 곧 야마다 선생의 연습장에 다니게 되었고, 선생과 협력하여 일본에 새로운 무용 운동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상담이 결정되었다. ...
“... 우리들은 먼저 달크로즈의 메소드부터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 무용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무용시'로 바꾸고, 우리들의 이상이 너무나도 막막했기 때문에 내 이름까지 '바쿠(漠)'라고 고쳐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로부터 서양 무용가들의 활동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자신의 무용 개념이 그들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의 도움을 받으면서 배고픔을 참아가면서 연습에 전념했다고 한다.
그런데, 야마다 코사쿠가 “무용시”라는 말을 창안한 것은 러시아 음악가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Alexander Nikolayevich Scriabin, 1872-1915) 덕분이었다. 스크리아빈은 자신의 작품, 특히 피아노 소품에 <시(Poème)>라는 이름을 붙이곤 했다. 이는 자신의 짧은 작품들이 문학으로 말하자면 ‘산문’에 상대되는 ‘시’와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야마다 코사쿠는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시” 작품들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가 자신의 작품을 “시”로 인식하는 방식에 더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1914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에도 지중해와 인도양을 건너는 여객선을 타지 않고, 일부러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대륙횡단열차를 탄 것도 스크리아빈의 연주회를 더 관람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스크리아빈은 1903년부터 1914년까지 작곡한 15개 이상의 피아노 소품에 ‘시’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런데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에서 발표된 이시이 바쿠의 <포엠>에는 부제가 붙어있지 않았다. 이는 배경음악이었던 스크리아빈의 원곡에 부제가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시”는 모두 15작품의 20개 곡이었다. (5개 작품 안에는 각각 2개의 곡이 포함되어 있엇기 때문이다.)
부제가 붙은 작품은 <비극의 시(Poème tragique, Op.34, 1903)>, <사탄의 시(Poème satanique, Op.36, 1903)>, <환상의 시(Poème fantasque, Op.45#2, 1904)>, <날개달린 시(Poème ailé, Op.51#3, 1906)>, <나른한 시(Poème languide, Op.52#3, 1907)>, <시-마스크(Poème-Masque, Op63#1, 1912)>, <시-낯섬(Poème-Étrangeté, Op.63#2, 1912)>, <시-환상(Poème-Fantastique, Op.71#1, 1914), <시-꿈(Poème-En rêvant, Op.71#2, 1914)>, <시-불꽃을 향해(Poème-Vers la flamme), Op.72, 1914) 등 모두 10곡이다.
다른 10곡은 “시”라고만 불렸고 부제는 없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의 무용 <포엠>은 아마도 부제가 없는 10곡 중의 한 곡을 반주음악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곡이었는지는 알아낼 방법이 없는 셈이다.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의 피아노곡도 자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젊은 판과 님프(1924)>가 그중 하나였다.
야마다 코사쿠는 베를린 체재 중이던 1912년 12월, 러시아 무용가 니진스키의 무용공연을 관람했는데, 특히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Prélude à l'après-midi d'un faune, 1894)>을 무용화한 작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관람했다고 한다.
귀국 후 1915년 7월 야마다 코사쿠는 니진스키의 무용작품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5개의 피아노곡을 작곡했고, 제목을 <젊은 켄타울-5개의 시(若きケンタウル―5つのポエム)>라고 붙였다. 작곡 당시 표지에 “무용곡 발레(舞踊曲Ballet)”라고 표기했지만, 1915년 11월11일의 피아노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무용시”라는 명칭으로 작품을 소개했다.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의 이 작품을 이용해서 무용시를 안무하고 제목을 <젊은 판과 님프(若きパンとニンフ)>이라고 붙였다. 이 작품은 1916년 9월 우치노마루(內の丸)의 보험협회 강당에서 열린 <신극장 제3회공연>에서 초연됐다. <유모레스크(ユーモレスク)>와 <파란 불꽃(青い焔)>과 함께였다.
야마다 코사쿠의 피아노곡 <젊은 켄타우로스-5개의 포엠>의 연주 시간은 1번곡이 1분26초, 2번곡이 39초, 3번곡이 47초, 4번곡이 49초, 5번곡의 51초로, 전곡이 4분32초이다. 이시이 바쿠가 5곡을 모두 사용했다면 다소 긴 작품이 되었을 것이고, 혹은 그중 몇 곡만 선택해서 편곡한 음악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야마다 코사쿠와 이시이 바쿠가 협업으로 창작한 무용 작품들에 대한 관객과 언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야마다 코사쿠는 이내 뉴욕으로 잠시 활동의 무대를 옮겼고, 이시이 바쿠는 1916년 10월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무용강사로 부임해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요컨대,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에서 상연된 이시이 바쿠의 <포엠>은 1910년대 후반, 무용시 운동의 초창기에 창작된 작품의 하나일 것이다.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선구자이던 시절의 작품을 제자의 데뷔공연에서 재상연한 이시이 바쿠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주위의 평가에 연련하지 말고 자신의 뜻을 밀고 나라가는 것이었으리라. (jc, 202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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