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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1934공연

[도쿄1934공연] 24. 공연3부(12) <바루타의 여인>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 3부의 첫 작품은 <바루타의 여인(バルタの)>이다. 프로그램에는 <바루타의 여인>이 다음과 같이 해설되어 있다.

 

12. 바루타의 여인(バルタの), 크라이슬러 편곡, 최승희

인도의 미망인 바루타, ()의 그늘에서 평생을 외로워야 한다. 하지만 현세에 대한 절절한 집착, 그리고 슬픈 체념.

 

 

<바루타의 여인>은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의 연목 중에서 리서치가 가장 어려운 작품이었다. 이 짧은 작품 해설을 읽으면서 이해되는 것보다 의문점이 더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1) “바루타가 누구였는지, (2) 왜 반주음악의 작곡자 대신 편곡자만 밝혔는지, (3) 어째서 인도이야기가 나온 것인지, (4) ()이라는 말이 등장한 이유가 무엇인지, (5) ‘집착체념이라는 상반된 언어가 왜 한 문장에 나란히 등장했는지, 등이 궁금했다. 최승희의 <바루타의 여인>을 이해하기 시작하려면 이 의문들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 바루타와 (3) 인도는 쉽게 조사됐다. 불경 <현우경(賢愚經)>의 제3권 제20편의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아사세왕수결경(阿闍世王授決經)> 1권의 <빈자일등(貧者一燈)>편에 여인이 부처님께 등불 공양하는 고사가 나오는데, 두 문헌의 이야기를 종합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가 왕의 초청을 받아 왕궁에서 설법을 마치고 기원정사(祇園精舍)로 돌아갈 때 왕은 궁문에서 기원정사까지 등을 설치하고, 불을 밝힐 삼기름(麻油膏)100()이나 공양했다. 인근 동네에 난타(難陀)라는 가난한 여인도 등불 하나를 더했다. 문헌에 따라서는 난타가 온종일 구걸해 2전을 얻었다고도 하고, 혹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다고도 했다. 그 돈으로 등불 밝힐 기름을 사러 가자, 사연을 들은 기름집 주인은 2전에 2홉인 기름을 3홉이나 주었다.

 

 

날이 밝으면서 다른 등불은 기름이 떨어져 꺼졌지만 난타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고 유난히 밝게 타올랐다. 부처님의 제자 목련(目連)존자가 난타의 등불을 끄려고 해도 꺼지지 않았다. 석가모니는 난타 여인의 정성을 칭찬하고 세월이 지나면 그녀가 부처가 되어 수미등광여래(須彌燈光如來)라고 불릴 것이라면서, 출가를 원하는 난타를 비구니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빈궁하고 고독했던 인도여인의 이름은 한국어로는 난타(難陀), 중국어로는 난투오(難陀), 힌두어로는 난드(नंद ), 영문 번역은 난다(Nanda)였다. 그런데 1986513일자 <동아일보(10)>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이 빈녀난타의 고사가 인용되었는데, 그녀의 이름이 바루다로 소개되었다. 아마도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난타가 바루타로 불리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인도의 가난하고 외로운 여인 바루타=난타의 의문은 해결되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바루타의 여인>의 반주음악을 편곡한 사람이 크라이슬러라고 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프리드리히 프릿츠 크라이슬러(Friedrich "Fritz" Kreisler, 18751962)를 가리킨다. 그런데 크라이슬러가 누가 작곡한 어떤 곳을 편곡했다는 말일까?

 

약간의 조사 끝에 그것이 안토닌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 1841-1904)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G장조(작품번호 100)의 제2악장 G단조의 라르게토(Larghetto)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음악은 드보르작이 1893년 뉴욕시 체재시절에 작곡한 실내악이다.

 

 

드보르작이 이 소나티나를 작곡한 것은 그가 일정기간 방문해 거주했던 미네소타주 미네하하폴즈(Minnehaha, Minneapolis, Minesota)에서 뉴욕시로 돌아은 직후였는데, 미네하하폴즈에서 그가 접했던 인디언 음악의 선율이 강하게 연상되는 느리지만 차분한 곡이다.

 

훗날 2악장 라르게토는 <인디언의 비가(Indian Lament)>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특히 프릿츠 크라이슬러가 편곡한 <인디언 비가>가 가장 유명하며, 그중 크라이슬러가 1928년에 녹음한 <인디언 비가> 연주는 명연주로 꼽히면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었다. 이 음반은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를 비롯한 일본 무용계에도 익숙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드보르작이 작곡하고 크라이슬러가 편곡, 연주한 <인디언 비가>인디언은 아시아의 인도 사람이 아니라, 아메리카의 원주민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바루타의 여인은 아시아의 인도 여인이지만, <인디언 비가>의 선율은 인도인으로 오해되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민요가락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최승희가 크라이슬러의 <인디언 비가>를 반주음악으로 무용작품을 창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29125일 찬영회가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개최한 <무용연극영화의 밤>에 참가한 최승희는 도쿄 유학 후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 <인도인의 비애(1929)>를 발표했는데, 이때 프로그램에는 이 작품의 배경음악 작곡자를 드보르작이라고 밝혔다.

 

 

오빠 최승일은 <최승희 자서전(1937:53)>에서 <인도인의 비애>를 처음 안무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생각나니? 깊은 밤 고요한 방에 너는 내 앞에서 크라이슬러의 인디안 라멘트를 눈물을 흘려가면서 안무하던 것을 말이야. 우리는 그날 밤에 러시아로 가려던 정열을 <인디안 라멘트> 멜로디 위에 얹었었다.”

 

러시아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는 최승희가 귀국한 직후인 19298월에서 10월 사이였을 것이다. 최승희는 그해 8월 이시이무용단을 떠나면서 러시아 무용유학을 갈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유학길은 막혔고, 최승희는 192911월 경성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공연활동을 시작했다.

 

 

<인도인의 비애>193021-2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최승희 제1회발표회>에서 1부의 두 번째 작품으로 발표됐고, 1931110일 제3회발표회에서는 2부의 첫 번째 연목으로 발표되었다. <인도인의 비애>는 지방 공연에서도 자주 상연되었는데, 1931217-18일의 부산공연과 221일의 춘천공연에서도 발표됐다.

 

최승희는 <인도인의 비애>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는데, 자신의 처녀작인데다가 안무 의도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삼천리> 19307월호에 실린 예술가의 처녀작이라는 주제로 열린 좌담회에서 최승희는 자신의 초기 작품을 <방아타령><인도인의 비애>, <길군악>의 세 개를 들었고, 그중 <인도인의 비애>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었다.

 

그중에 제일 자신이 잇는 것은 인도인의 비애야요. 이것은 우리네들 사이에- 가령 어린 아가씨나 도련님이나 늙으신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 마음속에 언제든 흐르고 있는 그 슬픔, 비록 자긔 가슴에는 업는 듯 하다가도 언제 한번은 솟고야 마는 그 공통한 슬픔! 일관한 비애 그것을 모든 조선 사람의 가슴 속에서 끄집어내어 표현하려고 한 것이랍니다. 어째서 하필 인도인의 비애라 하셨는가고요? 무얼, 그야 아시면서...”

 

 

작품의 제목을 <인도인의 비애>라고 한 것은 드보르작-크라이슬러의 작품 부제 <인디언 라멘트(Indian Lament)>를 번역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도인의 비애를 무용작품의 주제로 삼은 것은 그야 아시는것 아니냐고 최승희는 반문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착각 때문에 6백년동안 미국 원주민과 인도인들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최승희가 몰랐을 리가 없다. 숙명여학교의 역사와 지리 시간에 충분히 학습했을 것이다. <인도인의 비애><바루타의 여인>을 안무하면서도 문헌조사와 고증을 통해, 미원주민과 인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임을 최승희와 최승일과 안막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희가 크라이슬러의 <인디언 비가><인도인의 비애>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고, <바루타의 여인>의 해설에 인도인 미망인 바루타이야기를 담은 것은, 지리적, 역사적 맥락이 다른 두 이야기에서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 인도인들이 영국의 식민통치 아래서 신음하고 있고, 미인디언은 미국에게 땅과 말과 역사를 빼앗기고 보호구역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이같은 사정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압제에 시달리는 조선 민중에게도 별반 다름이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jc, 2024/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