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 제3부의 3번째 작품의 제목은 <습작>이었고, “동작의 시스템”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프로그램은 <습작>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4. 습작(習作), 움직임의 시스템 (動きのシステム)
A. ... 타악기 반주, 최승희
B. ... 무음악, 최승희, 시바노 히사코(柴野久子)
얼른 보면 <습작>이라는 제목은 성의가 없어 보인다. 정식으로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연습 삼아 만든 작품이라는 뜻이라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습작이라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최승희가 이 두 개의 <습작>에 직접 출연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을 연습한 작품인가, 가 중요하다. 최승희는 제목조차 따로 붙이지 않고, A와 B라고만 표기한 이 작품들로 무엇을 연습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이 작품들을 관람하는 관객들에게 어떤 인식 혹은 감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일까?
첫째는 반주의 색다른 방법이다. <습작A>는 타악기 반주, <습작B>는 반주음악이 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중세나 근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무용작품이 반주음악을 배경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히 새로운 시도였고, 이를 데뷔공연에서 상연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무음악 무용과 타악기 반주 작품은 최승희가 처음으로 시도, 혹은 연습한 것은 아니다. 스승 이시이 바쿠는 일찍이 1926년 무사시노 시절 무음악 무용을 안무한 적이 있다. 그도 역시 이를 <습작1>과 <습작2>와 같이 연습 작품임을 표시했는가 하면, <군무(群舞)>라는 작품도 무음악 무용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시이 바쿠의 무음악 무용작품들은 아무 음악이 없는 것은 아니라 작품 중에 필요할 때마다 징소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시이 바쿠의 무음악 무용으로 당대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으로 <식욕을 돋우다(食慾をそヽる, 1927)>가 있다. 이시이 바쿠가 지유가오카(自由ガ丘)로 옮기기 전, 무사시사카이(武藏境)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했을 당시, 그는 매일 전철을 타고 나가 신주쿠(新宿)역 앞의 커피숍 <도쿄빵(東京パン)>에 들르는 습관이 있었다.
하루는 커피향이 매혹적인 이 커피숍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와 토스트빵의 세트메뉴를 주문하고, 창밖으로 역에서 밀려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이시이 바쿠는 레인코트에 중절모자를 쓴 회사원 같은 중년 남자가 종업원을 찾다가, 이시이 바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허둥지둥 정 반대편의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애써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남자의 유머러스한 태도와 동작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시이 바쿠는 급히 커피숍을 나서 전철을 타고 연구소로 돌아와 그 남자의 모습을 무용으로 안무했다. 다음은 이시이 바쿠가 자신의 저서 <춤추는 바보(1955:44-49)>에 서술한 내용이다.
“이윽고 내 마음속에 어렴풋이 떠오른 이상한 동작마저도 나로서는 아직 체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것이 대단한 기쁨이 되어 내 마음 속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연구생을 연습실로 데리고 나가 그 움직임을 정리했다. 그리고 30분 정도 만에 무용 데생이 완성되었는데, 반주 음악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음악을 떠올려보아도 이에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나는 2층 서재로 뛰어 들어갔다.
“도코노마(床の間) 위에는 한 대만 골동품점에서 발굴한 목탁이 있었다. 소형의 크고 작은 두 개의 목어이다. 두드려 보니 견딜 수 없이 기쁜 소리를 내어 빨리 연습장으로 가지고 가서 무용과 함께 보기로 했다. 그리고 2시간 정도 안에 목어의 반주에 의한 무용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나의 숙망이었던 음악 없는 무용, 즉 무음악 무용의 탄생을 비로소 이곳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이시이 바쿠의 무음악 무용의 걸작 <식욕을 돋우다>가 탄생한 과정이었다. 초기의 일본 신무용가들은 어째서 무음악 무용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동작으로서의 무용과 소리로서의 음악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였다.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고대와 중세의 무용은 음악을 필수적인 요소로 구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용이 없는 음악은 있었지만, 음악이 없는 무용이 없었다는 비대칭적인 사실 때문에, 마치 무용이 음악에 종속되는 듯한 인식이 팽배해졌다.
무용과 음악과의 관계는 언어의 요소를 고려하면 더욱 복잡해진다. 음악은 가사라는 언어로 의미가 확장되면서도 그 의미가 고정되는 경향이 있다. 무용도 마찬가지이다. 언어로 제목을 정하고, 그 내용을 말로 해설함으로써 동작의 의미를 명확하게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의미나 감성을 고정시키기도 한다.
이시이 바쿠 등의 신무용가들은 동작으로서의 무용이 언어와 음악으로부터 독립적인 표현 양식으로 인식되고 실천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언어와 음악이 없는 동작으로서의 무용이 그 자체로 사람의 정서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것이 전달하는 감성적 영향은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 시도된 것이 바로 제목도 없고, 해설도 없는 무음악 무용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음악과 언어로부터 독립된 무용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무용가가 무언가 표현할 정서를 표현하면 그것을 보는 관객들에게도 수동적 수용이 아닌 능동적인 감성적 이해를 가질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이시이 바쿠는 <나의 얼굴(1940:144)>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신무용의 정신은 오늘날에는 확고한 이해 위에 실천의 단계를 구축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용자 자신의 문제만큼이나 무용관객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용가가 기법을 완성하는 동시에 관객도 또한 완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던져진 영혼과 이것을 받아 파악하는 영혼과 모든 예술에 이 두 영혼의 교류는 필요하지 않을까. 무용이 육체의 말로서 완성되어 감과 동시에, 이것을 읽는 사람도 또한 완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타악기 반주는 무음악 무용의 변형이자 대안이기도 하다.
이시이 바쿠의 연습 작품에서도 징이나 목탁 등의 타악기가 시도된 바 있었다. 타악기 반주에 있어서는 최승희가 스승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조선의 악기 중에는 타악기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장구와 북, 징과 꽹과리가 그것이다.
이 네 가지 타악기는 각각을 따로 연주하거나, 혹은 북과 장구, 장구와 꽹과리, 혹은 두 대의 장구나 두 대의 꽹과리처럼 부분적인 조합으로 연주하거나, 더 나아가 네 가지 타악기를 한꺼번에 연주하는 경우, 각각이 독특한 소리와 박자를 내어 준다.
타악기 반주는 멜로디와 가사가 없이 장단과 박자만으로 무용을 보충해 줌으로써 몸짓으로서의 무용동작을 인도하고 지도하고 뒷받침하면서도, 그 몸동작이 줄 수 있는 의미와 감성을 고정시키지 않고 자유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물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의 연주동작은 그 자체가 춤으로 이해되면서, 독특한 정조와 감흥을 선사하기도 한다.
스승 이시이 바쿠는 무음악 무용과 타악기 반주를 실험하면서 무용과 음악과 언어의 관계를 잘 정립했고, 일단 무용동작의 독자성을 확실히 인지하면서 연주하는 단계에 이른 후에는 이내 무음악 무용과 타악기 반주를 포기하거나 최소한으로 줄였던 반면, 최승희는 무음악 무용을 재차 시도한 적은 없더라도, 타악기 반주의 무용은 계속했고, 오히려 더욱 발전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예컨대, 최승희가 1938-1940년의 3년간 세계순회공연을 단행할 때에도 민속음악, 고전음악, 궁정음악 등과 함께 타악기 반주를 활발하게 활용했다. 1939년 1월31일의 파리 살플레옐 극장 공연에서만도 발표한 13개 작품 중에서 <천하대장군>, <신노불심로>, <유랑예인>, <검무>의 네 작품이 타악기 반주에 맞춘 작품이었던 것이다. (jc, 202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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