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 2부의 4번째 연목은 <에헤야 노아라>이다. 프로그램에는 이 작품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9. 에헤야 노아라(エヘヤ·ノアラ), 조선의 옛곡을 시노하라 마사오(篠原正雄)가 편곡, 최승희
제목과 반주음악 편곡자, 출연자만 제시할 뿐 해설이 없다. 해설을 생략한 것은 1부의 <희망을 안고서>에 이어 두 번째이다. 3부에서도 이시이 바쿠가 실연한 <포엠>에 해설이 없다. 세 작품은 공통점은 이시이무용단의 공연에서 이미 여러 차례 상연되었다는 것이다. 관객들에게 익숙한 작품에는 해설을 붙이지 않은 것이다.
<에헤야 노아라>가 일본에서 초연된 것은 1933년 5월20일 잡지사 <레이조카이(令女界)>의 주최로 일본청년관에서 열린 <근대여류무용대회>였다. 이 대회에는 이시이무용단 대표로 이시이 미도리가 참가하기로 되었으나, 미도리가 대회를 앞두고 급성 늑막염을 앓는 바람에, 이시이 바쿠는 그의 대타로 최승희가 대회에 참가하도록 했다. 최승희는 창작품 중에서 현대무용 <엘레지>와 조선무용 <에헤야 노아라>를 발표했다.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시기는 1933년 3월3일부터 5월20일 사이로 알려져 있다.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이에 최초로 발표한 것이 사라사테의 「안달루시안 로맨스」를 반주로 만들어진 듀엣 「희망을 안고서」이고, 이어서 만들어진 것이 조선 고곡에 의해 조선 고유의 갓을 쓰고 춤추는 「에헤야 노아라」입니다. 모두 이시이 선생님의 신작 발표회에서 처음으로 발표해 다행히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조선의 여성잡지 <신여성> 1934년 5월호는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가 1933년 히비야공회당에서 재발표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1933년 5월(일본청년관)과 11월(히비야공회당)에 이어 1934년 9월(일본청년관)에 일본에서는 적어도 3번째 공연인 셈이다.
그런데 이 잡지는 또 <에헤야 노아라>가 1931년의 작품이라고 서술했다. 뜻밖이다. 이 작품은 흔히 1933년 5월에 초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카시마 유자부로(高嶋雄三郞)의 평전 <최승희(1981[1959]: 118)>도 <에헤야 노아라>가 1931년 서울에서 초연됐다고 서술했다. 그러니 <신여성>의 보도를 오보로 치부할 수 없고, 조사를 진행해야 했다. 1931년 최승희가 신작을 발표한 공연은 6회였고, 각 공연에서 발표된 신작들은 다음과 같다.
(1) 1월10-12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3회 발표회>의 신작: <그들의 로맨스>, <향토무용, 농촌소녀>, <광상곡>, <그들의 행진> 등 4개 작품.
(2) 2월7일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된 <제2회 무용 발표회>의 신작: <방랑인의 설움>.
(3) 1931년 3월8일 예산극장에서 신명유치원 후원을 위한 예산공연의 신작: <가비(歌悲)>, <어린 용자(勇者)>, <유희>, <흙을 그리워하는 무리들> 등 4개 작품.
(4) 5월 1-3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3회 신작무용 발표회>의 신작: <어린이무용, 나는?>, <우리의 캐리커처>, <찌고이넬와이젠>, <남양의 밤>, <비가(悲歌)>, <봄을 타고 가는 시악씨들>, <생, 약동>, <황야에 서서>, <어린이무용, 앞으로 앞으로>, <겁내지 말자> 등 10개 작품.
(5) 9월1-3일 단성사에서 열린 <신작무용 발표회>의 신작: <세계의 노래>, <자유인의 춤>, <토인 애사>,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인조인간>, <영혼의 절규>, <철과같은 사랑>, <고난의 길>, <이국의 밤>, <폭풍우>, <십자가>, <건설자> 등 12개 작품.
(6) 10월23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던 양현여학교 후원공연의 신작: <번외, 향토무용>.
이 6회의 공연에서 발표된 신작무용은 모두 32개였는데, 여기에 <에헤야 노아라>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에헤야 노아라>를 다른 제목으로 발표했다는 뜻이겠는데, 위의 32개 작품 중 어떤 것이 <에헤야 노아라>였을까?
<에헤야 노아라>는 ‘조선무용’이자 '남성역‘의 ‘독무’였으므로, ‘현대무용’과 ‘여성역,’ ‘중무’와 ‘군무’를 제외하면 단 1개의 작품이 남는다. 그것은 1931년 5월1-3일 단성사 공연에서 최승희의 독무로 초연되었던 <우리의 캐리커처>이다.
필자가 <우리의 캐리커처(1931)을 <에헤야 노아라(1933)>의 원형, 또는 전신으로 보는 것은, 이 작품이 이시이 바쿠의 작품 <캐리캐처(カリカチュア, 1926)>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는 1926년 3월 경성공연을 단행한 직후에 창작되었다. 강이향(1993:52)에 따르면 이시이 바쿠는 경성역 앞을 배회하는 한 조선 노인의 굼뜬 모습과 넋이 나간 듯한 표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조선 공연을 마치고 도쿄의 무사시사카이(武藏境)로 돌아가자마자, 이 조선 노인을 소재로 작품을 안무했다.
제목을 <캐리커처>라고 붙인 것은 그 조선 노인의 모습과 표정을 과장해서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이시이 바쿠는 한복 두루마기 차림으로 춤을 추었는데, 조선인 노인을 희화화한 <캐리커처>가 조선인 정서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시이 바쿠는 이내 <캐리커처>의 제목을 <실념(失念)>으로 바꾸었고, 적어도 1940년까지는 이를 계속 상연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의 <실념>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코믹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그다지 많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시이 무용단이 1940년 12월15일 도쿄의 칸다(神田) 소재 공립강당에서 개최한 “보호아동의 밤” 공연의 프로그램에, <실념>은 10개 작품 중 4번째 작품으로 실려 있었다.
프로그램의 작품 설명 난에는 “자기 자신의 생활의 캐리커처”라고만 간단히 서술되어 있어, <실념>이 조선 노인을 소재로 창작되었다는 연원도 밝히지 않았고, 작품 의상도 정식 한복이 아니라 한복의 흉내를 내어 대충 만든 의상으로 보인다.
최승희도 조선인 노인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스승의 <캐리커처>를 불쾌하게 여겼다. 이에 대해 최승일은 <최승희 자서전(1937, 56-57쪽)>에 실린 “누이에게 주는 편지”에서, 최승희가 <우리의 캐리커처>라는 작품을 창작할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언제인가 나와 너는 석정막씨의 <캐리커처>라는 제목으로 조선 옷을 입고 추는 춤을 보고서 대단히 불유쾌하게 생각하여, 곧 이기세씨와 의논하야 가야금 산조 진양 중모리에다가 안무하야 <우리들의 캐리커처>라는 제목으로 너로서는 처음으로 <조선리듬>에 춤을 추지 아니하였느냐. 그때 일반의 평판도 좋았지마는 나는 그때 ‘너는 조선의 딸이다’하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즉, 최승희의 <우리의 캐리커처(1931)>는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1926)>를 반박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었다. 굼뜨고 정신 나간 듯한 표정의 조선인 노인 대신, 흥겹고 활발한 조선인 중년을 묘사한 것이다. 최승희는 1931년 5월 <우리의 캐리커처>를 단성사에서 발표했는데, 최승일의 서술에 따르면 조선 공연에서 이 작품에 대한 호응이 높았다고 한다.
1933년 3월, 최승희는 다시 도쿄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 문하에 들어갔고, 2달 만에 무대 출연의 기회를 갖게 됐다. 5월20일의 <근대여류무용가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시이무용단을 대표해 이시이 미도리가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그가 급성 늑막염 진단을 받는 바람에,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를 대타로 지명해 대회에 참가하도록 지시했다.
스승 이시이 바쿠에게 출품할 작품을 허락받아야 했으므로, 최승희는 현대무용 <엘레지>와 함께 조선무용 <우리의 캐리커처>를 발표하겠다고 신청했다. 이때 이시이 바쿠는 <우리의 캐리커처>의 작품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제목을 바꾸도록 제안했다. 이시이 바쿠는 자전적 에세이집 <나의 얼굴(1940, 33쪽)>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후 3년이 지나 나의 권고로 도쿄에서 제1회 발표를 하게 되었다. 승희의 무용에 특징을 주자는 의미에서, 그 때 빅터(=레코드사)의 용건으로 도쿄에 와 있던 조선무용의 대가 한(성준)씨 밑에서 조선무용의 수법을 속성으로 연습시켰고, 본인이 싫다는 것을 내가 억지로 정리해서, 제목도 <에헤야 노아라>로 명명해 상연한 것인데 예상치 못한 큰 평판이 났고, 그 후 스스로도 자주 조선풍의 무용을 상연하게 되었다. 정말로 본인에게도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시이 바쿠의 이 회상에는 몇 가지 착오가 있지만, 적어도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을 <에헤야 노아라>로 바꾸도록 권고한 것은 이시이 바쿠였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최승희의 작품 제목이 자신의 <캐리커처(1926)>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스승 이시이 바쿠와 제자 최승희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내 <캐리커처>는 이미 제목을 <실념>으로 바꿨지만, 기억하는 관객이나 평론가도 있을지 모르니, 모작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 네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을 바꾸는 것이 어떠냐?”
“그럼 조선에서 흥을 돋우는 감탄사로 쓰이는 <에헤야 노아라>라고 할까요?”
“그게 좋겠다. 앞으로 이 조선무용 제목은 <에헤야 노아라>로 하도록 해라.”
일본인 이시이 바쿠가 “에헤야 노아라”라는 조선식 감탄사를 알고 있었을 리 없다. 따라서 이 제목은 최승희가 제안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엄격한 도제식의 스승-제자 사이에서 최종 결정은 스승이 내린 것으로 기록되는 법이다. 이시이 바쿠가 <에헤야 노아라>의 제목을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고 서술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을 <에헤야 노아라>로 바꾸면서 최승희는 배경 음악도 가야금 산조 진양조 중모리 장단에서 더 빠른 굿거리 장단으로 변경했다. 당시의 상황을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 7-8쪽)>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도련님으로 자라신 아버지는 대단한 미남이셨고, 게다가 술자리도 좋아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예능에도 능하셨는데, 그중에서도 <굿거리춤>을 가장 잘 추셨습니다. 흥에 겨워 아버지가 추시던 “굿거리춤”을 재미있게 바라보면서 어린 나도 어느새 이 춤을 외워버렸습니다.
“나중에 이시이 바쿠 선생님의 작품 발표회에서 ‘네 작품도 하나 발표하지 않겠느냐?’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가장 먼저 아버지의 <굿거리춤>을 떠올렸습니다. 쇠퇴한 조선무용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예술적으로 소생시키고 싶었던 나에게, 조선에서 태어난 무용가인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작품 창작의 기회가 왔을 때 바로 그 춤을 소재로 삼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나의 중요한 레퍼토리 중의 하나인 <굿거리춤>은 결국 아버지가 추셨던 <굿거리춤>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외워버렸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이같은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에헤야 노아라(1933)>의 원작품은 <우리의 캐리커처(1931)>이었고, 이는 스승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1926)>를 반박하기 위해 최승희가 자신의 부친 최준현씨의 굿거리 춤을 회상해 소재로 삼아 창작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창작하는 동안 오빠 최승일과 연극인이자 사업가 이기세의 도움을 받았고, 반주음악으로는 가야금 산조 진양조 중모리 장단을 사용했었다.
1933년 5월 <근대여류무용대회>를 앞두고 작품을 선정하면서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은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의 협의를 통해 <에헤야 노아라>로 개칭되었고, 반주음악도 최승희에 의해 굿거리 장단으로 더 빠르게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1926)>와 최승희의 <우리의 캐리커처(1931)>은 둘 다 제목이 바뀌었다. <캐리커처(1926)>는 <실념(1926)>으로, <우리의 캐리커처(1931)>는 <에헤야 노아라(1933)>로 바뀌었고, 마침내 <에헤야 노아라>는 1934년 9월의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에서 다시 한 번 발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에헤야 노아라>가 최승희가 발표한 최초의 조선무용이라는 서술을 자주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최초의 조선무용은 1931년 1월에 발표한 <영산무>이며, <에헤야 노아라>가 1933년 5월 <근대여류무용대회>에서 발표된 것은 ‘일본 초연’이다. 그리고 <에헤야 노아라>의 원형인 <우리의 캐리커처>의 초연은 1931년 5월의 단성사 공연이었다. (jc, 202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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