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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1934공연

[도쿄1934공연] 20. 공연2부(8) <영산무>

최승희 도쿄 데뷔공연의 2부 두 번째 작품은 <영산무(靈山)>이다. 2부는 5작품이 모두 조선무용이었다. 그중 첫 번째로 발표한 <영산무>에 대한 프로그램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8. 영산무(靈山), 조선고전, 카이 후지코(甲斐富士子), 김민자(金敏子), 카도 에미코(加土惠美子), 세속의 먼지와는 멀리 떨어진 환상의 영산에서 함께 춤추는 아름다운 사람들. 조선고전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은 것.

 

 

3인무 <영산무>의 반주음악이 조선고전이라고 명시됐는데, 이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이었다. <영산회상>은 조선 초기부터 널리 연주되던 불교음악이다. 제목을 해석하면 신령한 산에서 모인 모습이라는 뜻이겠는데, ‘신령한 산이란 불교의 영취산(靈鷲山)을 가리킨다.

 

불경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따르면, 부처님이 설법 중에 말을 끊고 연꽃을 들어보이자 다른 이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제자 가섭(迦葉)이 그 뜻을 알아듣고 빙그레 웃었다다. 염화시중(坫華示衆) 혹은 염화미소(拈華微笑) 고사의 발상지가 바로 이 영취산이다.

 

 

가섭이 알아들은 부처님의 설법은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고 피지만 잎도 꽃도 더럽혀지지 않고 청정함을 그대로 유지한다. 사람의 마음도 원래 청정하여 연꽃과 같이 비록 나쁜 환경 속에 처해 있어도 그 본성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 세조 때의 음악을 모아서 편찬한 악보집 <대악후보(大樂後譜, 1759)> 6권에 따르면 성악곡이던 시절의 <영산회상>의 가사는 영산회상 불보살(靈山會相 佛菩薩)>의 일곱 글자였음이 밝혀졌다. 성종 때에 발간된 <악학궤범(1493)> 5권에는 처용무(處容舞)>의 배경음악으로 영산회상>이 사용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규경(李圭景)<구라출사금자보(歐邏鐵絲琴子譜)>와 서유구(徐有渠)<유예지(遊藝志)>에 따르면 <영산회상>은 가사를 잃었고, 원래의 곡인 (1)상영산(상영산)에 이어서, (2)중영산과 (3)잔영산, (4)가락더리, (5)삼현도드리, (6)하현도드리, (7)염불도드리, (8)타령, (9)군악이 덧붙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 (10) 계면가락도드리, (11) 양청(兩淸), (12) 우조가락도드리가 붙여져서, 오늘날의 <영산회상>12곡이 잇달아 연주되는 모음곡이 되었다.

 

 

최승희의 <영산무>의 반주음악은 이중 <상영산(上靈山)>일 가능성이 높다. 이 곡이 <영산회상>의 원조이기도 하고, 전체의 메인 멜로디이기 때문이다. <상영산>도 연주시간이 10분 이상이기 때문에, 전곡을 사용할 수는 없었고, 주제 멜로디를 중심으로 편곡되었을 것이다.

 

 

<상영산> 연주에는 현악기 거문고와 가야금, 양금을 중심으로 관악기 세피리, 대금, 단소와 타악기 장구가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에서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외에는 장구가 사용되었을 뿐이므로, 배경음악은 양악으로 편곡되었거나, 아니면 축음기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이 <영산무>의 일본 초연이었지만, 전체 초연은 193021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던 <1회무용발표회>였다.

 

데뷔공연 후 <영산무>에 대한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미 돌풍을 일으킨 <에헤야 노아라>와 새로 관심을 모은 <승무><검무>에 눌려 <영산무>는 비평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영산무>가 호평을 받지 못한 것은 조선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문과 잡지에 보도된 평론들은 <인도인의 비애><사랑의 춤>, <오리엔탈><마주르카> 등의 현대무용에 대한 감상이나 평론이 있었지만 <영산무>에 대해 언급한 글은 단 한편도 없었다. 이후 최승희는 19333월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영산무>를 조선에서 다시 공연하지 않았다.

 

 

기대를 받았던 <영산무>가 조선에서 외면 받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조선의 관객들에게 충분한 호소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일본유학을 통해 연마한 것은 서양식 근대무용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재와 의상을 조선의 전통에서 찾기는 했으나 그것이 조선무용 작품으로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영산무>에 최승희 선생이 직접 출연하지 않고 그의 제자 2-3명이 출연했던 것도 이 작품이 널리 알려지거나 호평을 받지 못했던 원인이었을 수 있다. 193021<영산무>가 경성공회당에서 조선 초연되었을 때에는 조영애(趙英愛)와 노갑순(盧甲順)에 의해 발표되었고, 19349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일본 초연되었을 때에도 카이 후지코(甲斐富士子), 김민자(金敏子), 가토 에미토(加土惠美子)에 의해 공연되었다.

 

 

최승희 무용 공연, 특히 그의 초기 공연에서는 모든 시선이 최승희 본인에게 집중되었으므로, 그가 직접 출연하지 않은 작품에는 세간의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jc, 2024/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