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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이야기

[마르세유1939공연] 6. 최승희의 경향성

경성 시절 최승희가 안막과 결혼한 후 그의 현대무용 작품의 경향성이 강화되었다고 서술한 문헌이 적지 않다. 예컨대 윤치호는 1932130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30일 토요일, 매우 추움. 아내와 매리와 함께 공회당에 공연-무용과 단막 희극-을 보러갔다. 만주에서 고통 받는 조선인 구호모금을 위해 기자협회 철필구락부가 주최한 행사였다.

 

 

무용가인 최승희양과 그의 무용단이 자신들을 모티브로 한 제목으로 일련의 무언극을 보여 주었다. (1) 종교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Religion) (2) 땅에 굶주린 자(Land-hunger) (3) 거친 길(Rough roads) (4) 슬픈 노래(Sad note) (5) 두려움 없는 진보(Advance without fear). 이 모든 프로그램은 정신과 행동에 있어서 공산주의적(Bolshevic)이었다. 불쌍한 여인들, 그들은 공산주의(Bolshevism)가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생각했을까?”

 

이런 관찰은 최승희가 프로레타리아 문사 안막과 결혼하면서 그의 영향으로 춤까지 급격하게 좌경화되었다는 평가를 낳기도 했다. 이 같은 경향성을 조롱하기 위해 최승희의 작품을 주먹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남편 안막의 영향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백철(白鐵, 1908-1985)1978120일자 <중앙일보>에 게재한 칼럼에서 최승희의 춤을 주먹춤이라고 회상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무용이라 해서 마구 주먹을 휘두르는 동작의 되풀이에 불과하여 너무 단순한 직선적인 표현이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백철이 대표적인 예로 든 주먹춤은 1931110-12일 단성사에서 개최된 제3회 공연에서 공연된 <그들의 행진>이었다. 1931111일의 <동아일보(5)>에 실린 <그들의 행진곡>의 사진을 보면, 과연 6명의 무용수들이 두 주먹을 쥐고 휘두르는 모습이 찍혀 있다.

 

이 발표회에 즈음하여 최승희는 19312월호의 <삼천리(12)>공연무대에 서서라는 글을 기고한 바 있었고, 여기에서 부르조아는 성적 의미로 레뷰를 좋아하지만, 우리는 프로레타리아의 감흥을 무용화하여 그것을 보기를 요구한다고 서술한 바 있다.

 

문제는 <그들의 행진곡> 등을 포함한 주먹춤작품들이 발표된 제3회 발표회는 최승희가 결혼(19315)이나 안막과의 첫 만남(19312)보다 더 전의 일이었다는 점이다. 최승희의 경성 시절의 주먹춤이 남편 안막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안막을 만나기 전에 최승희의 매니저를 자처한 것은 큰오빠 최승일이었다. 그도 역시 사회주의자였고 1922년 무산계급 해방문화를 목표로 결성된 <염군사>의 창립멤버였다. <염군사>1925<파스큘라>가 통합되어 카프(KAPF)로 진화했고, 최승일은 카프의 멤버였다.

 

그러나 최승일도 최승희의 경성시절(1929-1933)의 무용작품에 경향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례로 최승일은 경향성 강한 작품들보다 <인도인의 비애(Indian Lament)>를 가장 감명 깊은 작품이라며 격려한 바 있었다. <최승희의 자서전(1937:53)>에서 최승일은 이렇게 말했다.

 

, 생각나니? 깊은 밤 고요한 방에 너는 내 앞에서 크라이슬러의 인디안 라멘트를 눈물을 흘려가면서 안무하던 것을 말이야. 우리는 그날 밤에 러시아로 가려던 정열을 <인디안 라멘트> 멜로디 위에 얹었었다.”

 

 

이는 최승일이 1926년 이래 카프에서 탈퇴, 생활인이 되었고, 안막도 결혼 이후 자신의 문필운동을 접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사회주의 문예운동에 대한 정열이 가장 강했을 때도 최승희의 무용작품에 영향을 주려고 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승희의 무용작품에서 경향성이 강한 작품이 발견되거나, 시간이 갈수록 경향성이 약해지고 민족성이 강화되는 추세가 관찰된다면, 이는 최승희의 인식 내용과 그 변화를 반영한 것이지, 형제나 남편의 영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최승희는 당대 최고의 스승 이시이 바쿠로부터 창작 훈련을 받은 독립적인 창작 예술가였지, 스크립트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연기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jc, 2023/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