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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3차캠페인

[연해주3차캠페인] 4. 최재형 선생 미스터리

연해주 민족학교 후원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우수리스크를 공부하다 보니 최재형 선생이 자동적으로 연결됩니다. 코르시카 하면 나폴레옹이, 고창 하면 전봉준이 연상되듯이 말이죠.

 

그러나 코르시카의 나폴레옹이나 고창의 정봉준과는 달리 우수리스크의 최재형은 아직 미스터리입니다. 1860년에 태어나 1920년에 돌아가신 최재형 선생을 만나본 적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헌에 나타난 그의 행적은 놀랍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제 관심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최재형 선생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초청받았다는 점입니다. 1896514일에 열린 이 대관식에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과 스페인과 터키를 포함해 40여개국의 사절들이 각국 수반을 대신하거나 직접 참석했습니다.

 

이 대관식에는 대한제국의 고종을 대신해 민영환, 일본 텐노를 대신해 후시미 사다나루 왕자가 참석했습니다. 그런 대관식에 최재형 선생이 연해주 대표로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연해주에서 최재형 선생의 위상이 도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고종과 텐노의 사절과 나란히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초청을 받았던 것일까요?

 

 

혼란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그의 사망에 대한 문헌의 기록들이 서로 엇갈립니다. 심지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최재형 항목에서는 같은 글에 서로 다른 설명이 나옵니다.

 

그의 생애를 서술한 절에서는 “(최재형이) 19204월초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애 대해 재러한인독립군 부대를 총집결하고 사단장이 되어 러시아 적군과 함께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김이직, 황경섭, 엄주필 등과 함께 체포되어, 헤이룽장성의 일본헌병본부로 압송되는 도중 탈출했으나, 니콜스크시 남쪽 군사경계선 근처에서 일본군 추격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서술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을 설명한 같은 글에서는 “1920년 러시아의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고 서술했습니다.

 

 

일본군 추격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설명과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설명은 서로 다른 내용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같은 글에서 서로 다른 설명이 제공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최재형 선생은 196231일 건국훈장에 추서되었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정부가 수립된 지 다시 15년이나 더 지나서야 그에게 서훈을 추서했다는 것도 의문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1949년에 건국훈장(대한민국장)을 받은 사람은 이승만과 그 밑에서 국무총리를 한 이시영 밖에 없더군요.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하와이로 도망간 다음에야 김좌진과 이준, 김구와 안창호 선생 등 17명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됐습니다.

 

 

그런데 최재형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이 아니라 독립장으로, 서훈순위가 3등급입니다.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초청받을 만큼 사회적 지위를 가졌고 스스로 일군 막대한 부를 가졌으나 이를 모두 독립운동과 동포권익운동에 사용했던 인물,

 

결국 일본군과 전투 중에 전사했거나, 혹은 체포되어 총살당했던 인물이, 그의 희생을 발판으로 해방되고 건국된 대한민국으로부터 이렇게 홀대를 받아도 되는 것일까요?

 

그중 분노까지 일었던 것은 대한민국이 최재형 선생의 가족을 2004년까지 방기했다는 것입니다.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극진히 보살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최재형 선생의 가족은 해방이 되고 나서도 60년 동안 아예 잊혀져서 갖은 고생을 했던 것입니다.

 

 

최재형 선생의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은 올해(2023) 814일에야 마련되었습니다. 유골을 발굴하지 못해 우수리스크의 흙 3Kg을 공수했고, 키르기즈스탄 공동묘지에 묻혔던 그의 부인 최 엘레나 페드로브나 여사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해 합장했다고 합니다. 최재형 선생의 사후 103년만입니다.

 

게다가 최재형 선생을 기리기 위해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세워진 고려인 민족학교가 지금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이래도 되는 걸까요? (jc, 2023/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