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느끼지만 도서관 스탭은 친절합니다. 일본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최승희 공연 취재를 위해 일본 전역의 약 80개 이상의 도서관과 기록보관소를 다녔습니다만, 친절하지 않은 사서와 기록관리사는 열 명에 한 명 정도일까요? 그 한 명도 아마 그날 컨디션이 안 좋았을 겁니다. 혹은 그리 무뚝뚝했던 것이 그(녀)로서는 최대한 친절한 모습이었을 수도 있고요.
도서관을 방문하면 대체로 3단계를 거칩니다. 우선 도서관 맨 앞의 종합 안내데스크로 가서 방문 목적을 말합니다. 그냥 “리서치 지원 데스크가 어디죠?”하고 물으면 그만이지만, 저는 일부러 많이 말합니다. 무용가 최승희가 누구이며, 언제 활동했고, 얼마나 예뻤으며, 일본인 스승에게서 배웠는데 춤을 기가 막히게 잘 추던 사람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는 꼭 사진을 보여줍니다. 제 스크랩북에는 잘 인화된 최승희 선생의 사진이 여러 장 있습니다. 그분들이 가장 주의 깊게 보는 사진을 기억했다가 그 사진을 꼭 보여줍니다. 백중구십구는 감탄하면서 “그러냐”고 맞장구를 칩니다. 그리고는 비로소 “그래서?”하고 묻습니다.
그럼 인제 내 이야기를 하죠. 이 무용가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던 분인데, 그 시작이 일본이었고, 그래서 일본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공연했던 기록을 찾고 있는데, 여기서도 공연을 하셨다고 해서, 그분 기록을 찾으러 왔어요, 하고 말해줍니다. 그럼 다시 한 번 감탄. 이때가 제일 보람 있습니다.^^ 내가 마치 최승희의 전도사가 된 기분입니다.
사실 종합안내자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를 어디로 가라고 말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런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나를 직접 데리고 연구지원 데스크로 가서, 내가 한 말을, 자기가 이해한대로, 또박또박 전달합니다. 그리고 나서도 그 자리를 맴돌면서 스탭들이 제대로 안내하는지 지켜봅니다. 저는 중간 중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활짝 웃으면서 고맙다고 합니다.
리서치 지원 데스크의 직원들은 대개 3-4명인데 모두 사서나 기록관리사는 아닌 듯하고 일반 직원이나 알바생도 포함되어 있는 듯합니다. 내가 본격적으로 리서치 내용을 요약하고, 어떤 것이 필요한지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면, 그들이 모두 귀 기울여 듣습니다. 마치 외국어 리스닝 연습하는 사람들처럼 말이죠.
제가 필요한 것은 세 가지가 기본입니다. 신문, 사진, 지도입니다. 즉, 공연을 보도한 지역 신문과 공연이 있었던 극장 사진, 그리고 그 극장의 위치를 보여주는 옛 지도와 오늘날의 지도입니다. 신문은 공연의 일시와 장소를 알려주기에 가장 먼저 살펴야 합니다. 사서들은 자기네 도서관에 어떤 신문들이 소장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금방 찾아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방 도서관의 신문 코너로 안내합니다. 그냥 여기저기로 가라고 말해 주는 게 아니라, 꼭 데려가 줍니다. 제가 어리버리하게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신문담당자에게 다시 한 번 내 설명을 전합니다.
저는 옆에서 그들이 나누는 일본어 대화를 마치 다 이해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거나, 때때로 ‘맞아요’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줍니다. 사실 하도 들으니까 지금은 저도 일본어를 조금씩 섞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1935년을 ‘쇼와주넨’이라고 한다든지, 극장을 ‘게키조’, 공회당을 ‘고카이도’라고 말해줍니다. 그렇게 한두 마디 할 뿐인데도, 이분들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어주고, 이때부터는 마치 모두 같은 최승희 리서치 팀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저는 끊임없이 고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분들은 내가 착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더 친절하게 대접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신문 코너로 안내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 리서치 지원 스탭을 저는 붙잡습니다. 그리고는 사진과 지도도 필요하다고 얘기해 줍니다. 사전조사를 통해서 극장 이름을 알고 있으면 “최승희 선생이 모리오카의 현립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셨다더라”면서, 스크랩북을 펼쳐서 그 기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이 극장의 당시 사진과 이 극장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도 필요하다”고 말해 줍니다. 그래야 내가 신문 보는 동안 이분들이 극장 정보를 조사할 수 있습니다.
신문을 읽고 필요한 부분을 다 프린트하고 나면, 다시 리서치 데스크로 갑니다. 그러면 그 3-4명의 스탭 분들이 다른 일거리를 제쳐놓고서 다들 이 극장을 찾는데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120년 전부터 80년 전의 사진까지 줄줄이 찾아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에는 극장이나 공회당 옆에다 포스트잇으로 표시까지 해 놓습니다. 제가 할 일은 끊임없이 고맙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는 그 사진과 지도를 복사합니다.
그래도 복사는 꼭 제가 합니다. 돈을 내야하기도 하지만, 저는 지도와 사진을 칼라로 복사합니다. 그래야 해상도가 유지되는 것 같거든요. 옆에서 보고 있는 스탭들이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살짝 짓습니다. 무엇하러 흑백 자료를 칼러 복사하느냐는 것이지요. 저는 귀찮아하지 않고 ‘경험상’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그래도 완전히 납득된 표정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내 리서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기계적으로 제 요구사항만 들어주는 게 아니라, 그런 연구라면 이런 자료도 있다면서 제 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살펴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두터운 옛날 책들의 갈피갈피에 꽂아놓은 표식지를 열어가면서 하나하나 설명해 줍니다.
아오모리에서도 그랬습니다. 최승희 선생이 여기서 공연했다는 증거는 포스터 한 장 밖에 없고, 그나마 연도가 특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게 몇 년도였는지 찾아야 하고, 그밖에도 공연을 몇 번이나 더 했었는지도 찾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이가 좀 지긋하신 사서 분이 모리오카의 연감 두 권을 꺼내놓으셨습니다. 연감은 보통 그 지역에 대한 것을 시시콜콜 적어놓기 때문에 문화예술도 꼭 한 챕터 들어갑니다. 거기에는 문학에 대한 것이 가장 많고, 연극이나 영화, 음악이나 그림에 관한 서술도 꽤 많지만, 아오모리의 연감에는 무용도 하나의 절로 다루어져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최승희 선생이 1936년에 두 번, 1937년에 한 번, 합쳐서 세 번이나 공연을 하셨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신문 조사를 통해 저는 2번의 공연을 찾았을 뿐이었는데, 그 사서분이 세 번째 공연을 찾아주신 것이지요.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이 분이 더 놀라십니다. 최승희가 시의 연감에 등재될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항상 ‘오냐오냐’ 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의 저작권 보호법이 엄격한 데, 그 점에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한 작품의 절반 이상을 복사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책이든, 논문이든 마찬가지이고, 심지어는 지도 한 장도 절반만 복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사한 자료는 일일이 서지정보와 함께 복사신청서에 기록하게 하고, 복사를 다 하고나면 그것이 신청서에 기록된 대로 복사되었는지 검수합니다.
그리고 한 자료를 두 번 복사하지 못합니다. 파지가 나면, 그 파지까지 수거합니다. 그리고 그 파지 복사하는 데 들어간 복사비는 환불해 줍니다. 환불 액수는 10엔 20엔이 대부분이고, 100엔을 넘을 때가 없지만, 꼼꼼하게 챙겨서 검수할 것은 하고 계산할 것은 계산합니다.
그런데 저를 돕고 싶은 마음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옛날 극장의 오늘날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를 복사하는데, 그 지도가 오른쪽과 왼쪽 면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규정상 저는 그중 한 면만 복사해야 합니다. 대개는 극장이 있는 면을 복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그 도시 전체에서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수년 전 후쿠이 도서관의 사서분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셨습니다. 지도책은 매년 업데이트하지만 잇단 해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2018년 지도책에서 왼쪽 면, 2019년 지도책에서는 오른쪽 면을 복사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서로 다른 책의 같은 지도를 반반씩 복사하게 되면,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제가 필요한 것을 완벽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암튼, 제가 몰랐던 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발굴해 주신 모리오카와 아오모리 현립 도서관의 리서치 지원 데스크의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jc, 202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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