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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2023취재

[도호쿠2023취재] 10. 모리오카 (4) 산사오도리

춤은 삶의 일부이므로 사람이 사는 곳이면 춤이 있습니다. 춤은 삶을 반영하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특징을 가지게 되지요. 그런데 어떤 지역의 춤은 주목받아 널리 퍼지고 오래 전해지면서 유명해 집니다. 진도의 강강술래라든가, 진주의 교방굿거리춤 등이 그런 것이지요.

 

일본에도 당연히 지역의 춤이 있습니다. 사사라오도리(ささら)는 아카타(秋田) 지역에 전해져온 춤입니다. 원래 사사라는 대나무를 잘라 만든 악기이름인데, 이 악기를 반주로 사용하여 추는 춤이라고 해서 사사라춤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지요.

 

 

아키타 출신의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6-1962)는 일본 현대무용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일본 전통춤인 가부키(歌舞技)와 노(), 서양 발레를 거부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감성을 직접 표현하는 현대무용을 공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춤을 <무용시(舞踊詩)>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시이 바쿠의 무용시는 일본에서는 서양춤으로, 유럽과 미주에서는 일본춤으로 평가되는 바람에 이시이 바쿠 자신도 혼돈되곤 했지요. 그가 아키타에 돌아와 공연을 열었던 어느날, 고향 친구로부터 자네의 춤이 사사라춤을 생각나게 하는군하는 평가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평가조차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시이 바쿠는 이내 그것이 자신의 춤의 근간이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고 자랐던 사사라춤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는 플랫폼이 되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지요.

 

 

이 메시지는 그의 수제자 최승희에게 전달됩니다. 자신의 일본 현대무용 양식을 훌륭하게 익혀낸 최승희에게 자네는 인제 자네 민족 고유의 춤을 추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처음에는 스승의 제안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결국 최승희도 고향 조선의 춤을 현대화하여 안무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탄생된 무용 작품을 조선무용이라고 불렀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일본에서 처음 발표한 조선무용 <에헤야 노아라(1933)>는 그가 어린 시절 보았던 아버지의 춤을 재구성한 작품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승 이시이 바쿠와 제자 최승희는 모두 자신의 뿌리에 기반을 둔 새로운 양식의 무용을 창안했습니다. 이렇게 지역의 춤은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무용가들에게 은근하면서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도호쿠 조사의 첫 취재지 모리오카에도 지역의 춤이 있습니다. 산사오도리(さんさ)입니다. 모리오카의 산사오도리와 아키타의 사사라오도리가 이름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춤 자체도 유사하지 않을까 짐작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키타의 사사라춤은 반주악기가 사사라이지만, 모리오카의 산사춤은 일본식 큰북과 피리, 그리고 육성에 맞춰 추는 춤이었습니다. 그리고 군무인 것은 비슷하지만 대형도 달랐고, 각 무용수의 춤 동작도 달랐습니다.

 

 

산사오도리는 이 지역의 축제로 유명해졌습니다. 매년 81일부터 4일 동안 열리는 <모리오카 산사오도리> 축제는 연인원 1백만명이 참관하는 도호쿠 5대 축제의 하나로 꼽힙니다.

 

모리오카의 산사오도리는 이와테(岩手)현의 이름과도 연관됩니다. 모리오카의 유서 깊은 절, 토켄지(東顕寺)에는 세 개의 바위가 금줄(注連縄, 시메나와)에 묶여 있는데, 지역 주민들은 이 세 바위를 <미츠이시사마(石様)>라고 부르면서 신성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나찰귀(羅刹鬼, 라세츠키)가 주민을 괴롭히자 주민들이 호소했고, 나찰귀가 미츠이시 바위에 묶였습니다. 라세츠키가 뉘우치자 돌아오지 않겠다는 증거를 남기라는 명령을 받고, 미츠이시 바위()에 손자국()을 찍었는데, 지금도 손자국이 찍힌 바위가 미츠이시 신사에 남아 있다는군요.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라세츠키가 마을을 떠나자 주민들은 기쁨에 겨워 춤을 추었는데, 그 춤이 지금까지 전해오는 모리오카 산사오도리라는 것입니다. (jc, 2023/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