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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14학교

[대륙14학교] 34. 배은선 강연-외전 (2) 최승희와 경인선

기록에 나타난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최초의 기차여행은 1922 526일의 숙명여학교 수학여행이었다. 당시 최승희는 만10세로 숙명여학교 1학년생이었다. 1922 529일의 <동아일보(4)>는 이 수학여행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성사립숙명여학교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은 직원15인의 인솔 하에 ... 래인(來仁, 인천을 방문)하여 시가(市街)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築港) 및 기타 여러 곳을 순람(巡覽=차례로 관람)하고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하였다더라.”

 

 

이 기사에는 수학여행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이런 식의 학생 여행은 1910년대부터 수학여행이라고 불렸다. 1914 111일의 <매일신보(3)> 숙명여학교에서는 직원과 생도 일동 89명이 수학여행하기 위하여 지난 (1914 1)10일에 수원으로 내려갔더라.”고 보도했다.

 

위의 두 보도는 숙명여학교의 수학여행지로 인천(1922)과 수원(1914)을 기록했지만 개성(1932)도 잦게 선택되었다. 이 도시들은 모두 숙명여학교가 있는 경성에서 가깝고, 철도로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역사적 유적이나 근대적 산업시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같은 도시 안에서 가까운 곳으로 소풍을 가는 것은 원족(遠足)’이라고 불렸다. 숙명여학생들이 자주 갔던 원족 대상지는 우이동과 효창원 등이었다. 1913 429일의 <매일신보(5)> 사립숙명고등여학교 생도 136명은 ... 어제(1913 428) 오전 830분 남대문을 떠나는 기차로 ... 동소문밖 우이동으로 향하여 갔다더라고 보도했고,

 

1921 54일의 <매일신보(3)> 사립숙명여학교에서 고등과와 보통과 학생 전부를 교원들이 영솔하고 ... 효창원으로 가서 유쾌히 놀고 오후4시 가량 각각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더라고 보도했다.

 

1921년 숙명여학교의 효창원 원족에는 최승희도 참가했다.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고등과에 진학하기 전에도 4년동안 숙명여학교 보통과를 다녔기 때문이다. 1921 54일 당시 최승희는 보통과 4년생이었으므로 당연히 효창원으로 원족을 갔을 것이다.

 

 

1920년대에 이뤄진 조선학생들의 수학여행은 <동아일보> 254, <조선일보> 171건이 보도되었는데, 중복 보도를 제외하면 이 10년간 보도된 수학여행 건수는 273건이었다. 이 시기에 수학여행지로 자주 선택되었던 곳은 경성(46)과 평양(45)이 가장 많았고, 그 뒤로 인천(36), 개성(28), 진남포(17), 수원(15), 신의주(13), 강화(12)의 순서로 나타났다.

 

1922 526일의 숙명여학교 인천 수학여행에는 전교생 516명이 참가했다. 이 수학여행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인구 6(1925년 기준)에 불과했던 인천에 같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 5백 명이 줄지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숙명여학생들이 인천을 구경했다기보다 인천 시민들이 숙명여학생들을 구경했던 여행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숙명여학생들의 인천 수학여행에는 당연히 경인철도가 이용됐다. 경인선이 개통되었던 1899 9월의 열차 운행은 하루 2왕복에 불과했다. 그래서 오전 기차를 놓치면 오후까지 기다려야 했고, 오후 기차를 놓치면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경인선 개통식에서조차 기차를 놓친 사람도 있었다. 조선 정부의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이었다.

 

1899 918일 제물포역에서 열린 경인선 개통식에는 대한제국의 고관대작들이 총출동했고, 학부대신 신기선도 당연히 참석했다. 신기선은 구한말의 어지러운 조정에서 그나마 괜찮았던 신하였다. 벼슬 팔아 돈벌이하던 고종에게 뇌물을 근절하지 못하면 나라의 명맥이 끊길 것이라는 따끔한 상소를 올린 적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경인선 개통식의 귀빈 신기선이 기차의 발차를 코앞에 두고 사라졌다. 기차는 경적을 울렸고 출발 직전에야 비서가 화장실에서 신기선을 찾아냈다. “대감마님, 어서 나오십시오.” 그러자 신기선이 호통을 쳤다. “내가 아직 다 일을 안 보았으니 기다리라고 일러라.” 비서가 호소했다. “대감마님. 화통(=기차)이란 시간을 늦출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잔말 말고 기다리라고 해라.” 기차는 떠났고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은 이 역사적 경험을 놓치고 말았다.

 

이 에피소드는 기차와 함께 시간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2간지를 사용하던 시간제가 24시간제로 바뀌었고, 한 시간도 분 단위로 세분화되었다. 새로 도입된 시간엄수의 관행은 반상천의 신분이나 고관대작이나 미관말직의 지위를 가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인선을 이용하는 여객과 화물이 늘자 기차 편수도 늘어났다. 그 해(=1899) 121일부터는 하루 세 번 왕복, 이듬해인 1900 316일부터는 하루 네 번 왕복으로 증편됐다. 6개월 만에 경인선의 열차 편수가 2배로 늘어난 것이다.

 

경인선의 여객과 화물 증가세는 계속되어서 1920 3월에는 9, 1925 4월에는 하루 13편으로 증가했다. 1회 운행 객차와 화물차의 수도 1899년의 3량에서 1925년에는 7량으로 늘어났으니 경인선 운행 25년 만에 열차 편수가 3, 여객과 화물 수송량은 10배로 증가했다.

 

 

한편 경인선 열차의 속도도 빨라졌다. 1899년 개통당시에는 33.2Km의 거리를 1시간40분 동안 달렸으므로 평균속도가 시속20Km 정도였다. 당시의 기차는 1백미터를 15초에 달리는 사람의 달음박질보다 느렸다는 뜻이다. 기차 통학생들이 달리는 기차에 뛰어 올라탔다거나, 만주의 마적단이 말을 타고 기차에 뛰어 올라 강도짓을 하는 일이 가능했던 속도였다.

 

그러나 그런 속도를 가지고도 경인선은 두 도시와 그 시민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우선 인천의 여관과 호텔들이 폐업했다. 인천항에 도착한 선객들은 바로 기차 편으로 경성으로 향할 수 있었으므로 인천에서 숙박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라는 <대불호텔>이 문을 닫은 것도 경인선이 개통된 직후였다.

 

 

그 대신 인천의 식당들은 호황을 맞았다. 경성 시민들이 점심 먹으러 인천에 가는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중국집 <중화루>가 유명해진 것도 경인선 덕분이었다. 경인선은 또 월미도 유원지를 경성시민의 일일 소풍지로 만들어 주었다.

 

190074일 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제물포-남대문 정거장의 거리는 약 40Km로 늘어난 반면, 이 거리를 달리는 경인선 열차의 운행시간은 19254월경 보통열차가 1시간20, 급행열차는 50분으로 줄어들어, 경인선 보통열차의 속도는 약 30Km/h로 25년동안 약 1.5배가량 빨라졌다.

 

 

<동아일보>는 숙명여학생들이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도착함)”했다가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고 보도했다

 

1920년의 열차시각표를 보면 남대문에서 출발하는 경인선 열차의 출발 시간은 오전 645, 9, 1042, 오후 1210, 210, 515, 610, 750, 1010분의 9편이었다. 숙명여학생들이 인천에 오전1135분에 도착했다면, 이들은 남대문 정거장에서 1042분 열차를 탔다는 뜻이다. 숙명여학생들이 인천에서 615분발 열차를 탔다면, 이들은 7시 조금 지나서 남대문역에 내렸을 것이다.

 

 

숙명여학생들은 경인선 기차 삯으로 얼마나 지불했을까? 당시 운임은 상등석 150, 중등석 80, 하등석 40전이었다. 쌀 한 가마니가 4원 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상등석이 6만원, 중등석은 32천원, 하등석은 16천원 정도였다. 오늘날 서울역-인천의 지하철 요금이 2,350원이므로, 하등석 기준으로도 당시의 기차삯은 지금보다 5배 이상 비쌌다.

 

숙명여학생들은 상오1135분 도착했다가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고 했다. 인천역 도착 직후와 출발 직전에 대열을 정비할 시간을 30분씩으로 잡는다면, 실제 수학여행은 12시부터 545분경까지 약 6시간이다. 여기에는 점심시간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수학여행지 방문시간은 약 5시간이었다. 숙명여학생들은 5시간 동안 어떤 구경을 한 것일까?

 

 

<동아일보>는 숙명여학생들이 시가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 및 기타 여러 곳을 순람(巡覽=차례로 관람)”했다고 보도했다. 당시에도 인천역을 나서면 바로 중심가였고 시내 대로가 인천신사가 있던 동공원까지 이어졌으므로 시가 방문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5시간 동안 동공원과 서공원, 관측소와 축항을 돌아보고, 그밖에도 기타 여러 곳을 차례로 관람했다는 것을 보면 이 수학여행은 일정이 빡빡한 여행이었을 것이다.

 

 

<동공원(東公園, 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은 일제강점기에 인천신사가 있던 공원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일본조계지의 동편 끝에 마련되었고 그때는 <일본공원>이라고 불렸다. 바닷가 절벽 위 높은 곳에 마련된 신사 인근이 공원으로 꾸며져 식물원과 놀이시설이 있었다.

 

<서공원(西公園)>은 지금의 <자유공원>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청국과 일본 조계지 북쪽 응봉산(鷹峰山) 기슭에 조성된 공원이다. <각국공원> 혹은 <만국공원>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 지역이 청국과 일본을 제외한 기타 각국의 조계지였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1914년 조계지를 철폐하면서 <일본공원> <동공원>으로 <각국공원> <서공원>으로 개칭됐다.

 

 

관측소(오늘날, 중구 전동 25-1)란 기상대를 가리킨다. 일제는 1904 4월 인천에 관측소를 신설, 러일전쟁을 필두로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하는 데에 필요한 기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응봉산 정상에 69평 규모의 목조 2층 건물로 지어진 관측소의 주변에는 기후를 측정하기 위한 각종 기기가 즐비했고, 그 측정 결과는 매일 보고되고 발표됐다.

 

축항(築港, 중구 내항로 67)은 축조된 항구라는 뜻이다. 1883년 개항 시기 인천에는 항구시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일제는 1914년 갑문과 잔교를 만들어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게 했다. 관측소와 함께 축항은 일제가 건설한 신식문물로서 학생들의 견학거리로 추천됐다.

 

 

<동아일보>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조선일보(1924 426)>가 보도한 이화학당의 인천 수학여행에는 검역소(중구 항동7 1-17)”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으로 반출되던 한국소를 검사하던 이출우 검역소를 가리킨다. 통감부 시기부터 일제 패망까지 일제는 약 150만 마리의 한우와 6백만 마리분의 소가죽을 반출했는데, 검역소는 그 한우와 가죽을 검사하던 곳이다.

 

그런데 5시간의 도보 일정으로 동공원과 서공원, 관측소와 축항과 검역소 방문이 가능했을 지가 의문이었다. 현주소 기준으로 동선을 측정해 보면, 인천역에서 자유공원 입구까지 5백미터(도보로 10), 자유공원 입구에서 관측소까지 5백미터(오르막길 약15), 관측소에서 검역소까지 3.3킬로미터(55), 검역소에서 축항까지 1.7킬로미터(30), 축항에서 동공원까지 3.2킬로미터(50)였고, 모든 방문을 마치고 인천역으로 돌아가는데 1.5킬로미터(30)였다.  10.7킬로미터였고 도보로 190, 즉 걷는 데에만 약 3시간 이상 걸렸을 거리이다.

 

 

5군데의 방문지를 돌아보는 시간은 2시간밖에 할당되지 않았을 테니, 5백명이 넘는 학생들은 한 방문지에 25분 이상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인천 시가지와 서공원의 양식 건물들은 걸어지나가면서 구경할 수 있었겠지만, 관측소나 검역소, 축항의 갑문이나 신사에서는 현장 관계자로부터 최소한의 설명이나마 제대로 듣기 어려웠을 시간이다. 숙명여학생들의 이날 인천 수학여행은 3시간 걸으면서 2시간 구경해야 했던 아주 분주하고 빡빡한 여행이었다.

 

이 인천 수학여행을 통해서 숙명여학생들은 무엇을 닦고()’ 무엇을 배웠()’을까? 조선총독부 학무과의 수학여행 지침에 따르면 학생들에게 일본의 풍습과 일본이 도입한 신식문물을 배우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 신사와 공원, 일본이 건설한 축항과 측우소와 검역소를 견학하게 한 것은 총독부 지침에 부합되는 일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시간 동안 주마간산으로 인천을 돌아본 학생들에게 그런 일본식 문물이 경이와 찬탄의 대상이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한 학생은 여행 후기에서 저렇게 많은 우리 소를 어째서 일본으로 가져가는 걸까?”하며 자문하기도 했다.

 

최승희는 보통과와 고등과를 통해 8년 동안 숙명여학교를 통학하는 동안 경복궁의 전각이 헐리고 그 자리에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목격했다. 숙명여학교의 캠퍼스가 광화문 바로 옆 수송동에 있었으므로 대다수의 숙명여학생들은 같은 경험을 공유했을 것이다.

 

1927년 10월30일자 <조선일보>는 <양명회>가 최승희의 경성 공연을 맞아 숙명여학교 교정에서 간친회를 개최했다고 보도했다.숙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해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8년간 숙명여학교에 재학하면서 조선인, 특히 엘리트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가정형편상 1925년의 수학여행에 참가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해 도쿄에서 이왕을 만나지 못했지만,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인 1937년 12월 자신의 두 번째 영화 <대금강산보>가 완성되었을 때 그 시사회에 이왕을 초청했다.

 

또 숙명여학생들은 양정고보, 진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한제국의 황실이 설립한 학교의 학생이라는 자부심이 남달랐다. 숙명여학교 출신, 특히 최승희와 동기생인 숙명17회 졸업생들 중에는 독립운동과 노동운동, 예술운동과 여성운동가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총독부의 지침이 항상 일제 식민주의자가 의도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jc, 2023/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