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학교 14기의 다섯 번째 강연은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의 이병철 선생의 “북한의 이해”였습니다. 정식 제목은 조금 긴데, “내일의 북한: 희망을 변주해 나갈 수 있을까?”였습니다.
글이나 강연의 제목은 명확하면서도 약간은 모호한 것이 좋습니다. 주제를 알릴만큼 명확하면서도 호기심을 일으킬 정도로 조금은 모호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이병철 선생의 강연 제목이 그렇습니다. 북한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희망’과 ‘변주’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금하더군요. 제목이 이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되니까 강연에도 집중하게 되더군요.
제가 대륙학교 강연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아니고 “정리”할 뿐입니다. 전체 강연을 빠짐없이 요약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배울 거리와 생각거리를 정리하는 것이죠. 이해가 되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내용은 중요해도 그냥 넘어갑니다.
이병철 선생의 강연은 1시간40분 동안 진행된 모든 내용이 다 중요합니다. 심지어 뒤풀이 자리에서 토론한 내용도 중요하더군요. 그러나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이병철 선생께서 강연 중에 자주 “아쉽다”는 표현을 쓰셨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병철 선생은 강연 중에 세 번 ‘아쉽다’는 형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1) 1997년 7월,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것이 아쉽다; (2)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비핵화 북미협상을 결렬시킨 것이 아쉽다; (3) 향후 북한이 가까운 장래에 희망을 변주할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아쉽다.
김영삼-김일성 회담이 성사되어서 남북이 일찌감치 교류와 협력을 시작했다면,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느라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지금쯤은 남북경협과 북미수교 같은 평화의 과정이 꽤 진전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회담은 불발되었고, 김영삼 대통령이 거짓 정보에 홀려 김일성 조문도 거부하고 강경책으로 돌아선 것은 진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정은-트럼프 회담의 결렬도 아쉬운 일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혼신을 다한 중매에도 불구하고 비핵화와 경제제재 철회의 첫 단추가 끼워지지 않았습니다. 북한 비핵화의 첫 단계로 영변 비핵화를 트럼프가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약속이 지켜지고 북미간에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다면, 그 결과로 경제제재 철회와 북미 수교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세 번째 아쉬움은 미래형이라는 점에서 살짝 다릅니다. 향후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따라서 북미협상이 재개될 가능성도 희미하며, 거기에 한국 정부나 시민사회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아쉬움이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사건은 아무리 아쉽더라도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되돌릴 수 없지요. 하지만 세 번째 아쉬움은 아무리 제한적이더라도 노력할 여지가 있는 미래의 일입니다. 하다못해 다음번의 기회를 앞당길 수 있는 일이라도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병철 선생은 향후 30년 이내에 기회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북한 지도자의 건강문제를 이유로 들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체형과 병력을 고려할 때 김정은의 건강도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는 겁니다. 김정은의 권력 장악이 확고하고, 북미협상 결렬 이후 강경책으로 돌아선 만큼, 그의 거취에 이상이 생기기 전에는 남북관계가 호전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저도 남북관계의 겨울을 30년으로 예상하지만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남한 수구세력을 떠받치는 인구가 노년층을 중심으로 35%에 달하고 있는 한 남북관계는 호전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최고지도자의 용단이 결정적인 북한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시민들의 의견과 투표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독재시기에 매카시즘으로 세뇌된 인구가 30퍼센트 이상 한국에 버티는 한 남북관계 개선은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고 독재자들이 천수를 누리게 방치한 것이 이렇게 장기적인 악영향을 미칩니다. 아쉬운 일이지요. (jc,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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