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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자서전

[6개의 오해들] <나의 자서전>이 풀어준... (6) 조선무용

6. 최승희의 무용은 조선무용인가?

 

최승희가 19335<에헤야 노아라>를 발표하면서부터 그의 작품은 조선무용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최승희는 일본과 유럽 무대에서 <검무(1934)><승무(1934)><기생춤(1934)>, <유랑예인(1935)><무녀춤(1936)><낙랑의 벽화(1936), <초립동(1937)><보살춤(1937)><천하대장군(1937)>, <옥적곡(1937)<신로심불로(1937)><춘향애사(1939)>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근대 조선무용의 선구자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정작 조선에서는 최승희의 무용을 조선무용이라고 볼 수 없다는 비판이 일었다. 특히 한설야는 1937<사해공론(7월호)>에 발표한 기고문에서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조선 정서의 희화화해 불과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좀 더 가까이 우리들 예술가 중에서 불근실(不謹實)한 예술태도의 한 개 실례를 발견하였다. ... 최승희의 무용에서다. ... 조선을 취재(取材)한 그의 무용에 있어서의 조선 정조는 확실히 희화화되어 있고 부박(浮薄)히 왜곡되어 있다.”

 

한설야는 최승희가 조선에서 소재를 취했으면서도 조선 정조를 우스꽝스럽고 피상적이고 천박하게 왜곡한 불성실한 예술가이며, 그의 작품은 조선옷을 입고 장죽을 문 외국인의 사진처럼 조선인의 핏줄을 표현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옛 조선을 상징하는 몇 개의 조선 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춤은 전혀 옛 조선 사람의 희화화에 지나지 않는다. 승무도 그렇고 검무도 그렇다. 거기서는 조선인의 특성도 찾을 수 없고 조선인의 핏줄은 더욱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외국인-문명인이 옛 조선을 흉내 내고 우스개를 하는 듯한 허재비의 동작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도쿄와 오사카, 아사히카와와 나하,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파리와 브뤼셀과 헤이그와 뒤스부르크,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멕시코시티, 베이징과 상하이의 관객들이 최승희의 무용에 열광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도 한설야는 미리 예견한 바 있다.

 

최승희의 조선춤은 조선인 아닌 외국인의 환호를 받으리라고 우리는 벌써부터 생각한 일이 있다. 즉 외인은 조선을 깊이 모르느니만치 흉내를 참으로 대할 수도 있는 것이오, 또 조선이란 땅이 이른바 문명인들의 이색취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미개한 땅이니까 그들의 흥미는 과히 나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최승희의 희화화 수법이 서양인의 그것에 비할만한 지경에 이르고 보매 더욱 박수를 살 것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최승희의 파리 공연을 관람한 평론가 도미니크 쏘르데는 193923일자 <르악시옹 프랑세즈>에 기고한 비평문에서 최승희의 한국 무용이 얼마나 진짜 한국 전통에 뿌리를 둔 진정한 한국 무용인지 유럽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쏘르데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비평가들은 중국의 메이란팡, 인도의 우다이 샹카르, 인도네시아의 이뇨타, 스페인의 라 아르헨티나, 네덜란드의 다르자 콜라인과 함께 조선의 최승희를 세계 정상급 무용가의 반열에 올렸다. 이들 민족 무용가들에 대한 찬사를 모두 오해에 따른 환호와 갈채라고 폄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설야의 비판에 수긍하기 어려운 점은 조선 안에서도 발견된다. 최승희의 무용이 조선정서의 희화화에 불과하고 조선 춤을 모르는 외국인이나 웃고 즐길 작품이라면 조선의 인텔리와 민중이 최승희의 공연마다 극장을 가득 메웠던 까닭은 무엇일까? 또 일본 순회공연 때마다 재일동포들이 생활비에 비해 엄청나게 비싼 입장료를 내가면서 극장 한구석에 모여앉아 최승희의 공연을 지켜보며 눈물을 지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오늘날의 현실을 보아도 최승희의 무용은 조선무용이 아니라는 한설야의 주장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 그의 비판 이후 80년이 지난 오늘날도 최승희의 무용은 남,북한과 일본과 중국과 연해주의 동포사회에서 여전히 조선무용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에서 내 무용의 가장 중심적인 방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내가 추는 조선무용과 서양무용은 전혀 다른 전통과 독자성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 둘이 내 춤의 양면을 이루는 이상, 가능한 한 그 거리를 줄여보고 싶고, 나아가 이 두 무용을 힘껏 통일해 보고 싶습니다.”

 

조선무용과 서양무용의 거리를 좁히는 방법론으로 최승희는 근대무용의 기초 위에서 조선무용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일견 한설야의 비판대로 최승희 스스로 자신의 무용이 조선 춤과 기초가 다르다고 고백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작품을 여전히 조선무용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조선 무용기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조선 무용기법을 사용하는 정도에 따라서 자신의 조선무용도 몇 갈래로 나누기도 했다.

 

 

“<에헤야 노아라><승무> 등의 작품은 비교적 순수한 조선적 기법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검무><조선풍의 듀엣> 등의 작품은 어느 정도까지는 근대 무용의 기법을 포함하고 있고, <세 개의 코리안 멜로디>에 이르면 서양식 무용 기법이 주를 이루고 단지 거기에 조선적인 색깔과 향기를 입히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최승희는 조선식 무용기법이 무엇이며 그것이 서양식 무용기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에 예로 든 작품들로 미루어, 무용기법의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우선 위의 작품들은 모두 조선 음악과 의상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른 작품들을 보아도, 최승희는 서양 음악을 사용하면 서양 의상을, 조선 음악을 사용하면 조선 의상을 사용했다. 따라서 의상음악,’ 그리고 그 사이의 일치가 최승희가 말하는 무용기법의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최승희는 그 두 무용기법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융합을 시도한 바도 있었다.

 

 

이상의 방향과는 반대로 내 자신의 서양 무용에서도 나는 가능한 한 동양적인 색깔과 향기를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쇼팽과 드뷔시의 곡에 의한 춤이라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동양적 기법을 도입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승희는 서양식 무용, 즉 서양 음악과 의상을 사용하는 무용 작품에도 동양적인 분위기를 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앞으로 그런 작품을 시도할 것이라고 했다. 음악과 의상 말고도 무용 작품에 색깔과 향기를 주는 다른 요소가 있다는 뜻이다. 이는 조선 춤에 특징적인 동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최승희는 1936년에 <마음의 흐름><시골처녀와 기차> 10곡의 서양식 현대무용 작품을 발표했고, 1937년에도 <선구자><재즈풍의 멜로디> 등의 6개의 서양식 작품을 창작했다. 이 작품들에 조선식 무용동작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는 지금 확인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1938년 이후 최승희는 서양식 무용의 안무를 중단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조선 동작서양 음악과 의상이 한데 어울려 작품화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최승희의 조선식 무용동작은 당연히 서구 비평가들의 눈에 띄었다.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그 자신이 무용가였던 이렌 리도바(Irène Lidova, 1907-2002)193928일의 <마리안(Marianne)>에 기고한 비평문에서 최승희의 모든 작품의 저변에는 매우 특징적인 기법이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한 기법의 예로 리도바는 사랑스런 어깨동작을 동반하는, 바깥으로 미끄러지는 신기한 스텝을 들었다. 이 동작은 훗날 최승희가 저술한 <조선민족무용기본(1958)>미끄러져 걷기라는 이름으로 정식화되었다. , <조선민족무용기본>에 수록된 수 백 가지 동작들은 최승희가 일찍이 1930년대부터 활용했던 조선무용의 기본 동작들이었던 것이다.

 

 

<나의 자서전>에 따르면 최승희는 그의 조선무용작품에서 조선 의상, 음악과 함께 조선무용의 기본동작들을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최승희의 무용은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여전히 조선무용으로 불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