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최승희는 여성주의자인가?
세계 순회공연 중 최승희가 1938년 12월 파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언론인 협회장 삐에르 드노이에(Pierre Denoyer, 1901-1965)는 12월24일의 파리 일간지 <르쁘띠 빠리지앵>에 최승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여성해방은 극동에서는 최근의 일이다. 한국의 유서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어린 소녀가 무용을 직업으로 선택했을 때 한국의 수도 서울의 존경받는 시민인 아버지 최준현씨에게는 기괴하게 들렸을 것이다. 특히 15세의 딸이 저명한 일본 도쿄의 무용가 이시이 바쿠를 따라가겠다고 말했을 때는 그는 숨이 끊어질 듯싶었을 것이다.”
드노이에의 눈에 최승희는 극동 “여성해방(L'émancipation des femmes)”의 화신이었다. 귀족(=양반) 가문의 젊은 여성이 무용을 직업으로 택하고 가부장의 반대를 무릅쓰며 무용 유학에 오른 것 자체가 여성해방가의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는 최승희의 무용 여정을 “혁명적 운명(destinée révolutionnaire)”이라고 표현했는데, 당시 프랑스 여성의 지위와 여성주의 상황으로 보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프랑스는 계몽(17-18세기)과 대혁명(1789), 파리코뮌(1870) 등의 시기에 상속과 이혼, 정치참여의 분야에서 여성의 지위와 권리 신장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후 <여성의 권리 협회(1870)>, <여성의 권리를 위한 프랑스 연맹(1882)>, <여성 참정권을 위한 프랑스 연합(1909-1945)> 등이 결성되면서 프랑스의 여성주의는 참정권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최승희가 파리를 방문한 1938년에도 프랑스 여성들은 여전히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1944년 드골 임시정부 포고령에 의해서였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후센(婦選)운동은 1924년에 시작되었지만 이를 억압하던 일제가 무너지고 나서야 1946년 점령군 미군에 의해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참정권 투쟁과 함께 유럽과 미국의 여성들은 문화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 무용가들은 여성해방운동의 기수였다. 최초로 여성 무용단을 설립한 로이 풀러(Loie Fuller)와 여성 무용수의 신체를 구속하는 코르셋과 토우슈즈를 벗어버린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은 실제로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였다. 독일 표현주의 무용의 선구자 마리 비그만(Mary Wigman)과 스페인 무용가 라 아르헨티나(La Argentina, 1890-1936)도 여성 무용수의 성적 이미지를 버리고 그 대신 민족정체성을 표현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서구의 근대무용과 여성주의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 때문에 조선의 선구적인 여성 무용가들, 예컨대, 배구자와 최승희, 박외선 등을 여성주의자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있다. 특히 유미희(2006)는 자신의 저서 제목에서 최승희를 “20세기 최후의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을 보았다면 이 같은 주장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선 일본과 조선은 서구와 달랐다. 일본 신무용의 선구자들이 대부분 남성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제자인 여성 무용가들이 참정권 운동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 근대무용과 여성주의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이시이 바쿠의 영향으로 시작된 조선 신무용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식민통치를 받던 조선에서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민족탄압에 항거하는 민족주의와 함께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여성주의도 탄압까지는 아니라도 금지 대상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조선의 초기 여성 무용가들이 전통적 성역할을 벗어나서 기생의 주객 접대 행위로 전락한 무용을 예술의 영역으로 다시 끌어올린 것은 분명 여성주의의 주목을 끌만 했다. 하지만 이들을 여성주의자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선 최승희는 가부장제에 거의 적대감이 없었다. <나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전반기 반생은 가부장들의 도움으로 형성되었다.
최승희가 신교육을 받으며 신여성이 된 것은 아버지 최준현 덕분이었다. 한학자였던 최준현은 과거에 급제했던 자신의 경험을 자녀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신교육을 시키기 위해 강원도 홍천에서 경성으로 이주했다. 덕분에 최승희의 4형제는 배재, 진명, 경성사범, 숙명의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최준현은 또 최승희의 무용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실 때마다 집에서 느긋하게 그다지 잘 하시지 않는 술잔을 기울이셨고 흥이 나시면 ‘승희야, 춤이나 한번 추어 볼까?’ 하시면서 내 앞에서 <굿거리춤>을 자주 추어 보이셨습니다.”
최승희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굿거리춤>은 훗날 최승희의 초기 대표작 <에헤야 노아라(1933)>의 원형이 되었다. 최승희에게 강한 영향을 준 또 다른 남성은 큰 오빠 최승일이었다. 그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도 진로가 막막했던 최승희를 예술무용의 길로 이끌어 주었다.
“오빠가 안계셨다면 ... 아마 무용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 확실히 오빠는 나에게 제2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귀한 존재입니다. 비유하자면 오빠는 나의 빛 그 자체였습니다.”
한편, 최승희를 실력있는 무용가로 양육한 것은 또 다른 가부장 이시이 바쿠였다. 일본 신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는 제자들에게도 엄격한 스승이었지만 가족 내에서도 독단적인 가부장이었다. 식탁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며 밥상을 들어 엎곤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에게 의리 있고 책임감 있는 가부장이었다. 그는 최승희를 내제자(=도제)로 받아들여 수업료도 받지 않고 무용가로 교육했고, 무용가에게 필요한 기량과 기법을 전수했다. 두 사람이 불편한 상황에서 결별한 적이 있었으나 최승희가 곤경에 처했을 때 이시이 바쿠는 기꺼이 그를 다시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시이 선생님 내외분은 나에게 대해 생활의 모든 면을 돌보아 주셨고, 또한 무용의 길에서 유일한 열성적인 지도자가 되어 나를 격려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부모를 대신하는 정도의 애정을 가진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나의 성장을 도와 주셨습니다.”
최승희의 춤과 삶에 깊은 영향을 준 또 한 명의 남성은 그의 남편 안막이다.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와 독자적인 무용 활동을 벌이던 최승희는 마침내 결혼을 결심했는데, 그는 자신의 결혼 동기를 이렇게 서술했다.
“내가 정식으로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무대 예술과 영화 분야에서 활동하는 진보적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정조관념을 타파하는 것이 새로운 사상을 생활에 옮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무정조하게 옮겨 다니는 것을 오히려 명예롭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흥무용을 위해 분투하던 저도 무대예술인이라는 이유로 그런 사람들과 혼동되었습니다.”
최승희는 당시의 다른 신여성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 특히 자유연애와 무절제한 성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나의 자서전>의 제8장 “독립”의 장에서 ‘자유로운 성’에 대한 반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봉건적인 구식 사고방식일지 모르나 몸의 순결을 유지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깊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런 마음을 뒤집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승희는 한 남자와 결혼해서 전통적인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이 다른 신여성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고 스캔들을 피하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결혼하기 전부터 최승희의 남편관은 “확실한 지도자 같은 남편”이었고, 그런 남편을 얻기 위해 오빠 최승일의 도움과 아버지 최준현의 허락을 구했다. 이는 자유연애를 내세웠던 당대의 신여성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나의 자서전>의 이같은 서술로 보아 최승희를 여성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최승희를 가부장제 신봉자였다고 볼 수는 없다. 딸 안성희를 “어떤 남자들 못지않은 무용가로 키우겠다”는 결의를 내비친 까닭은 남아선호 풍습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요컨대 최승희는 민족주의나 사회주의로 정의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처럼, 가부장제나 여성주의의 어느 하나에 가두기 어려운 사람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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