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춘천1931공연

(29)
[춘천1931공연] 7. 희생적 양보 춘천 공연 전후의 최승희무용단 일정을 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1931년 2월21일의 춘천 공연 4일전인 2월17-18일에는 부산공회당에서 공연이 있었고, 그 사흘 뒤인 2월24-25일에는 대구극장에서 공연이 열렸다. 부산 공연의 한달 반 전인 1931년 1월10-12일에는 경성의 단성사에서 신춘무용공연이라는 이름으로 가 있었고, 열흘 전인 2월7-9일에는 경성공회당에서 가 열렸다. 이 두 공연에서 발표된 신작을 가지고 최승희무용단이 지방공연에 나섰던 것인데, 그 첫 공연이 부산공연이었던 것이다. 부산공연 다음에는 보통 대구에서 공연을 가지는 것이 관행이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였다. 대구 공연을 가진 다음에는 거의 예외 없이 부산공연이 이어졌다. 이는 경부선 철도로 쉽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
【春川1931公演】 6. 春川劇場(1930) 春川市民が近代化のために立ち上がった結果、1929年11月には京城のと競争するの設立許可を受け、12月には新設公会堂の落成式も行われた。 さらに、もう一つの公演施設「春`川劇場」も造られていた。 春川初の常設館がマスコミに初めて報道されたのは、1929年7月22日の『朝鮮新聞』であった。 「去る17日から春川劇場において興行した光榮團一座の演劇は盛大裡に終りを告げた記者は劇場主荒木氏が一大奮發を以つて百尺竿頭一步を進め計劃通り常設館としての施設を完成されんことを切望する者である。」 1929年7月22日、は春川劇場で演劇公演が上演されたという記事が掲載された。 この劇場は仮設劇場だった。 記者が記事に露骨に個人的な願いを記述したのは異例であるが、この記事を通じて我々は当時春川にという演劇上演劇場があったが、常設館ではなかったことが分かる。 また、劇場主荒木氏が常設館を建てるという「計画..
[춘천1931공연] 6. 춘천극장(1930) 춘천 시민들이 근대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결과 1929년 11월에는 경성의 와 경쟁할 의 설립허가를 받았고, 12월에는 신설 공회당의 낙성식도 열었다. 그에 더해 또 하나의 공연시설 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춘천 최초의 상설관 이 언론에 처음 보도된 것은 1929년 7월22일의 이었다. “지난 17일부터 춘천극장에서 흥행했던 광영단일좌의 연극은 성대하게 끝을 맺었다. 기자는 극장주 아라키 마츠노주(荒木松之十)씨가 일대 분발을 통해 백척간두 일보를 추진, 계획대로 상설관 시설을 완성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자가 기사에 개인적 바람을 노골적으로 서술한 것이 이례적이지만,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당시 춘천에 이라는 연극상연 극장이 있었지만 상설관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극장주 아라키가 상설관을 짓..
【春川1931公演】 5. 春川公會堂 春川市民の自発的かつ闘争的近代化要求は、京春線道路の改修と鉄道敷設問題だけでなく、公会堂設立の過程からも読み取れる。 春川公会堂の設置要求が初めてマスコミに報道されたのは、1925年11月12日の『釜山日報』に掲載された春川支局の後藤生(筆名)の記事だった。 後等生は春川の人口が増えており、日本人と朝鮮人のために市民のための文化施設が必要だという問題を正式に提起したのだ。 それまでは春川邑許文里(ホムンリ,=現在の春川市中央路1街)の小規模公会堂が春川の文化行事を開催していたが、あまりにも小規模だったため、一部映画を上映することはできたものの、正式に文化芸術公演を行うには力不足だった。 1927年8月1日の『朝鮮新聞』は、春川繁栄会が「大典記念事業として春川公会堂を建設」するための第1回準備委員会を開き、この問題を繁栄会評議員会に正式に提起することにしたと報じた。 「大典」とは、192..
[춘천1931공연] 5. 춘천 공회당 춘천시민들의 자발적, 투쟁적 근대화 요구는 경춘선 도로 개보수와 철도 개설 문제뿐 아니라 공회당 설립 과정에서도 읽을 수 있다. 춘천공회당 설치요구가 처음 언론에 보도된 것은 1925년 11월12일의 에 실린 춘천지국의 후등생(後藤生, 필명)의 기사였다. 후등생은 춘천의 인구가 늘고 있어 내지인과 조선인 모두를 위해 시민을 위한 문화시설이 필요하다는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춘천읍 허문리(=지금의 중앙로1가)의 소규모 공회당이 춘천의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었으나 워낙 소규모여서 일부 영화를 상영할 수는 있었지만 정식 문화예술 공연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듬해인 1927년 8월1일의 은 춘천번영회가 “대전(大典)기념 사업으로 춘천공회당을 건설”하기 위한 제1회 준비위원회롤 열고, 이 ..
【春川1931公演】 4. 京春街道 1930年以来崔承喜が進めてきた15回の地方公演を見ると、公演地の選択にいくつかの傾向が見られた。 第一に、幹線鉄道の線上やそれに近い都市だった。 釜山(プサン、14.6万)と大邱(テグ、9.3万)、大田(テジョン、2.2万)と清州(チョンジュ、1.7万)と水原(スウォン、1.3万)は京釜線上の都市であり、開城(ケソン、4.9万)と沙里院(サリウォン、2.4万)と平壌(ピョンヤン、14.1万)は京義線、仁川(インチョン、6.8万)は京仁線の都市だ。 第二に、木浦(モクポ、3.5万)と鎮南浦(ジンナムポ、3.8万)は新しく栄え始めた港町だった。 第三に、海州(ヘジュ、2.4万)と在寧(チェリョン、1.9万、1940年)、仁川と水原は京城に近い都市だった。 カッコ内の数字からも分かるように、公演都市の決定は人口1万人を基準にしたものと見られる。 崔承喜が春川公演を決定したのは、おそらく3番..
[춘천1931공연] 4. 경춘가도 1930년 이래 최승희가 진행해 온 15회의 지방공연을 보면 공연지 선택에 몇 가지 경향성이 보였다. 첫째 간선철도 선상이나 그에 가까운 도시들이었다. 부산(14.6만)과 대구(9.3만), 대전(2.2만)과 청주(1.7만)와 수원(1.3만)은 경부선 상의 도시였고, 개성(4.9만)과 사리원(2.4만)과 평양(14.1만)은 경의선, 인천(6.8만)은 경인선의 도시들이다. 둘째, 목포(3.5만)와 진남포(3.8만)는 새로 번성하기 시작한 항구도시들이었다. 셋째, 해주(2.4만)와 재령(1.9만, 1940), 인천(6.8만)과 수원(1.3만)은 경성에 가까운 도시들이었다. 괄호 안의 숫자가 보이듯이 아마도 공연 도시 결정은 인구 1만 명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가 춘천 공연을 결정한 것은 아마..
【春川1931公演】 3. 帰国後の舞踊公演 崔承喜は1929年8月末に留学を終えて帰国した。 同年11月初め、「崔承喜舞踊研究所」を設立し、約10人の弟子を募集して教育と訓練を行い、新しい舞踊作品を創作していった。 帰国後の初公演は1929年12月5日、朝鮮劇場で開かれた贊映会主催の『舞踊演劇映画の夜』であった。 京城の主要日刊紙芸能部記者たちの集まりである「贊映会」が組織したこの公演は、朴勝喜の土月会が活動を再開した公演でもある。 この公演でチェ·スンヒは『印度人の悲哀』と『金と銀』、『セレナーデ』などの3作品を発表し、朝鮮舞踊界に第一歩を踏み出した。 まもなく崔承喜は1930年2月1日、京城公会堂において「第1回舞踊発表会」を開き、11曲の新作を発表した。 9人の弟子たちと一緒だった。 この公演が終わるやいなや、2月4-5日に開城(ケソン)の高麗青年会館講堂で初の地方公演も行った。 同年3月31日と4月1日には、團成社で2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