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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1931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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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1931공연] 11. 강원도장관 이규완 의 함광복 기자는 이선길과 이영일의 부친이자 일제하 초대 강원도장관이었던 이규완(李圭完, 1862-1946)이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주선했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입증자료가 제시되지 없으므로 아직은 ‘가설’이다. 하지만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함광복 기자의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 볼 필요는 있다. 우선 이규완이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주선했더라도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춘천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통틀어 이규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원도장관(1908-1918년)과 함경남도장관(1918-1924년)을 역임한 후 62세의 나이로 춘천에 은퇴했지만 여전히 전국적 유명 인사였다. 퇴임 후 이규완은 중추원 참의직 등의 정무직은 거절했지만, 경제와 산업, 사회 ..
【春川1931公演】 10. 画家李英一 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は、崔承喜が「犠牲的譲歩」を押し切って春川公演に踏み切ったのは、「一人の後援者」が彼を待っていたからだと暗示した。その後援者は「彼(=崔承喜)にとって忘れられない恩師…。当時、淑明女學校訓育主任教師で画家の春泉·李英一(イ·ヨンイル)だという。 これは早くから『月刊太白』1989年4月号に掲載された事実であると注釈もつけている。 『月刊太白』の記事を探そうと努力したが、ソウルの主要図書館(国立中央、国会)には雑誌もなく、春川市立図書館もそれを所蔵していなかった。 そのため、その記事の内容と根拠はもちろん、タイトルと文章の執筆者さえ確認できていない状態だ。 咸光福記者の言葉通り、李英一(1903-194)は「初代江原道長官を務めた李圭完(イ·ギュワン)の三男」で、先述した春川の江原道警察局所属の柔道選手、李鮮吉の弟だった。 李英一氏は画家で淑明女学校の教員と..
[춘천1931공연] 10. 화가 이영일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가 ‘희생적 양보’를 무릅쓰고 춘천 공연을 단행한 것은 “한 사람의 후원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암시했다. 그 후원자는 “그(=최승희)에게 잊을 수 없는 은사 ... 당시 숙명여고 훈육주임교사이자 화가 춘천(春泉) 이영일(李英一)”이라고 했다. 이는 일찍이 1989년 4월호가 밝혀 놓은 사실이라고 주석도 달았다. 의 기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서울의 주요도서관(국립중앙, 국회)에는 그 잡지가 없었고, 춘천의 시립도서관도 이를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 기사의 내용과 근거는 물론 제목과 글쓴이조차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다. 함광복 기자의 말대로 이영일(李英一, 1903-194)은 “초대 강원도장관을 지낸 이규완(李圭完)의 3남”이었고, 앞서 서술한 춘천의 강원도 경찰국..
【春川1931公演】 9. 柔聖李鮮吉 春川の劣悪な交通と狭い劇場、そして低い収益性にもかかわらず、崔承喜が春川公演を断行した理由について、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は次のように述べた。 「春川では一人の後援者も彼女(=崔承喜)を待っていた。 崔承喜に忘れられない恩師がいれば、当時淑明女子高校の訓育主任教師であり、画家の春泉、李英一(イ·ヨンイル)氏を挙げ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月刊太白』1989年4月号) 長兄は覚一、全日本柔道選手権大会を制した鮮吉は直上の兄だ。 「ちょうど李英一氏の兄、鮮吉は朝鮮柔道の英雄として登場したころだ。 1931年はまだ「柔聖」と呼ばれた時ではない。 しかし、日本舞踊界の新星として浮上した崔承喜の名声を彼が知っていたように、崔承喜も李鮮吉の名声を知っていただろう。 2人はダンスと柔道で日本を揺さぶった江原道が生んだ朝鮮の英雄だった。 李圭完は春川公演を主催した可能性をうかがわせる」。 春川..
[춘천1931공연] 9. 유성 이선길 춘천의 열악한 교통과 협소한 극장, 그리고 낮은 수익성에도 불구하고 최승희가 춘천공연을 단행한 이유에 대해 함광복 기자는 다음과 같은 서술했다. “춘천에서는 한 사람의 후원자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은사가 있다면 당시 숙명여고 훈육주임교사이자 화가 춘천(春泉) 이영일(李英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월간 太白'1989년 4월호) 이영일은 초대 강원도장관을 지낸 이규완(李圭完)의 3남이다. 맏형은 각일(覺一), 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를 휩쓴 선길(鮮吉)은 바로 위형이다. “마침 이영일의 형 이선길은 조선 유도의 영웅으로 등장하던 무렵이다. 1931년은 아직 '유성(柔聖)'이라고 불리던 때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 무용계의 샛별로 떠오르던 최승희의 명성을 그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최승..
【春川1931公演】 8. 洪川出生説 崔承喜が巡業の日程と動線を修正する「犠牲的譲歩」を甘受しながら春川公演を断行した理由は何だろうか。 一般的にそうしたことは「金」と「影響力」で起こる。 公演収益を十分補てんしてもらえたら、喜んでそんな「犠牲」を甘受したはずだ。 また、招聘に応じなかった場合、何らかの不利益を被ることになれば「譲歩」したかもしれない。 ところが『江原道民日報』の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が「影響力仮説」を提示したことがあった。 崔承喜の評伝8冊のうち、崔承喜の春川公演について一文段以上叙述した本はないが、咸光福記者は崔承喜と江原道(カンウォンド)の縁について原稿用紙に130枚書いた。 2006年9月ごろ、あるインターネットサイトに投稿した「われわれはなぜ"崔承喜の洪川"を探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いう内容だ。 この文の目的は「崔承喜の出生地が江原道洪川」であることを立証することだった。 しかし、その..
[춘천1931공연] 8. 홍천 출생설 최승희가 순회공연의 일정과 동선을 수정하는 ‘희생적 양보’를 감수하면서 춘천공연을 단행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그런 일은 ‘돈’과 ‘영향력’으로 일어난다. 공연 수익을 충분히 보전 받았다면 기꺼이 그런 ‘희생’을 감수했을 것이다. 또 초빙에 응하지 않았을 경우 모종의 불이익을 겪게 되면 ‘양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 함광복 기자가 ‘영향력 가설’을 제시한 바 있었다. 최승희의 평전 8권 중에서 최승희의 춘천공연에 대해 한 문단 이상 서술한 책은 없지만,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와 강원도의 인연에 대해 원고지로 130매를 썼다. 2006년 9월경 한 인터넷 사이트에 포스팅한 “우린 왜 ‘최승희의 홍천’을 찾아야 하는가”라는 글이다. 이 글의 목적은 “최승희의 출생지가 강원도 홍천”임을 ..
【春川1931公演】 7. 犠牲的譲歩 春川(チュンチョン)公演前後の崔承喜舞踊団の日程を見ると、おかしな点が発見される。 1931年2月21日の春川公演4日前の2月17-18日には釜山(プサン)公会堂で公演があり、その3日後の2月24-25日には大邱(テグ)劇場で公演が行われた。 釜山公演の一ヶ月半前の1931年1月10-12日には京城(キョンソン)の団成寺で新春舞踊公演という名前で「第3回崔承喜新作舞踊発表会」があり、10日前の2月7-9日には京城公会堂で「第2回崔承喜舞踊公演会」が開かれた。 この2つの公演で発表された新作をもとに、チェ·スンヒ舞踊団が地方公演を行ったのだが、その初公演が釜山公演だったのだ。 釜山公演の後は、普通大邱で公演を行うのが慣行だ。 逆にも同じだった。 大邱公演の後は、ほとんど例外なく釜山公演が続いた。 これは京釜線鉄道で簡単に移動できるためだ。 釜山から大邱までは鉄道で3時間の距離だった。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