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1931벌교 (44) 썸네일형 리스트형 [崔承喜1931筏橋公演] 10. 不正行為 地主であり事業家だった蔡重鉉も不正行為の疑いで警察と検察の捜査を受けたことがあっ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 1924年5月12日付の「時代日報(4面)」は「南鮮貿易株式会社では社長蔡重鉉氏の不正行為が先月(=4月)28日の定期総会の席上で暴露され、一場紛糾」が起き、「調査役3人を選挙して一切を調査することにしたところ、当選した調査役たちは帳簿とその他の証拠調査を十分に完了し、臨時株主総会を招集して調査の顛末を報告することにした」と報道した。 1ヵ月後の1924年6月21日付の東亜日報(3面)>は「蔡重鉉は全南警察部から出張した警察官に取り調べを終え、17日に順天支庁検事局に押送」されたと伝え、蔡重鉉の容疑は「会社の物を恣意的に売買したことと立資金に対して重役の決議もなしに高い利子をつけて訪ねてきたこと」であり、その他にも「筏橋勤倹組合長が書記の月給と賞与金を支払ったと言ったが、それを受.. [최승희1931벌교공연] 10. 부정행위 지주이자 사업가였던 채중현도 부정행위 혐의로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받은 적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1924년 5월12일자 시대일보(4면)>는 “남선무역주식회사에서는 사장 채중현씨의 부정행위가 지난달(=4월) 28일 정기총회 석상에서 폭로되어 일장 분규”가 일어났고, “조사역 3인을 선거하여 일체를 조사키로 한 바 당선된 조사역들은 장부와 기타 증거조사를 충분히 완료하고 임시주주총회를 소집하여 조사의 전말을 보고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한 달 후인 1924년 6월21일자 동아일보(3면)>는 “채중현은 전남경찰부에서 출장한 경찰관에게 취조를 마치고 지난 17일에 순천지청 검사국에 압송”되었다고 전하고, 채중현의 혐의는 “회사의 물건을 자의로 매매한 것과 입체금(立替金)에 대하여 중역의 결의도 없이 높은 이자.. [崔承喜1931筏橋公演] 9. 徐道鉉と金會山 筏橋には蔡重鉉の他にも富豪が多かった。 朴士胤、崔在鶴なども筏橋の富豪であり、蔡重鉉と共に宝城郡と筏橋邑のために活発に活動した。 彼らは大地主であり、家門が代々金持ちだった人々だ。 ところが、筏橋には貧しい暮らしから出発した自力成功型百万長者もいた。 1923年、朝鮮全域で民立大学設立運動が起きた時、宝城では筏橋面の金會山(キム·フェサン)と崔在鶴が1千圓ずつ、蔡重鉉と朴士胤がそれぞれ900圓を寄付し、筏橋の募金目標額4万圓を達成した経緯がある。 (『朝鮮日報』1923年11月28日、4面)。 崔在鶴と蔡重鉉、朴士胤は筏橋地域史によく登場する富豪だったが、金會山は名前が見慣れなかった。 民族教育のために1千圓を寄付した人なので、彼がどんな人物なのか調べてみることにした。 金會山は筏橋の富豪徐道鉉(ソ·ドヒョン)の妻と確認された。 1916年7月4日付毎日新報>は徐道鉉が62歳、193.. [최승희1931벌교공연] 9. 서도현과 김회산 벌교에는 채중현 말고도 부호가 많았다. 박사윤, 최재학 등도 벌교의 부호였으며 채중현과 함께 보성군과 벌교읍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들은 대지주이자 가문이 대대로 부자였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벌교에는 가난한 살림에서 출발한 자수성가형 백만장자도 있었다. 1923년 조선 전역에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보성에서는 벌교면의 김회산(金會山)과 최재학(崔在鶴)이 1천원씩, 채중현(蔡重鉉)과 박사윤(朴士胤)이 각각 9백원을 기부하면서 벌교의 모금목표액 4만원을 달성한 바 있다. (조선일보, 1923년 11월28일, 4면)>). 최재학과 채중현, 박사윤은 벌교 지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부호였지만, 김회산은 이름이 낯설었다. 민족교육을 위해 1천원을 쾌척한 사람이므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조사해 보기.. [崔承喜1931筏橋公演] 8. 文化事業 蔡重鉉が地主であり能力のある事業家であり、教育事業に深い関心を持ったということは分かったが、そのような人物が劇場を建設したという点には依然として疑問が残った。 それで蔡重鉉が宝城と筏橋で文化事業に関与したことがあるかも調査してみた。 1925年8月22日の『東亜日報(5面)』は、筏橋で水害救済音楽大演奏会を開催したと報道した。 「筏橋青年会と京城学友会主催で8月15日午後8時30分に筏橋公立普通学校で」開かれたこの音楽大演奏会には「20種類余りの音楽と遊戯と舞踏など」が試演されたが、入場料は「普通20銭と小児10銭」であり、この演奏会を通じて筏橋の有志30人が水災義金44圓50銭を募金したが、このうち蔡重鉉は10圓を寄付、全体募金額の約2割を充当した。 1925年の10円は、歴史的国際為替レート表によると、2015年の約4万円(賃金ベース)、韓国圓では約40万圓に当たる。 しかし、.. [최승희1931벌교공연] 8. 문화사업 채중현이 지주이자 유능한 사업가였고, 교육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런 인물이 극장을 건립했다는 점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그래서 채중현이 보성과 벌교에서 문화사업에 관여한 적이 있는 지 조사해 보았다. 1925년 8월22일의 동아일보(5면)>는 벌교에서 수해구제음악대연주회를 개최했다고 보도했다. “벌교청년회와 경성학우회 주최로 8월15일 오후8시30분에 벌교공립보통학교에서” 열린 이 음악대연주회에는 “20여종의 음악과 유희와 무도 등”이 시연되었는데, 입장료는 “보통 20전과 소아 10전”이었으며, 이 연주회를 통해 벌교의 유지 30명이 수재의연금 44원50전을 모금했는데, 이중 채중현은 10원을 기부, 전체 모금액의 2할을 충당했다. 1925년의 10엔은, 역사적 국제.. [崔承喜1931筏橋公演] 7. 蔡重鉉 筏橋劇場>落成式を報道した3紙の記事は共通してこの劇場の設立者が蔡重鉉(チェ·ジュンヒョン、1876-1947)だと明らかにした。 蔡重鉉は筏橋の「富豪、財産家、百万長者」などと紹介されたことから見て、相当な財産を持った事業家であったことがわかる。 一部の記録に蔡重鉉を「万石君」と叙述されたことを見れば、彼が筏橋地域の大地主として家産が十分だったに違いないが、彼は受け継いだ財産を元手として事業にも手腕を発揮したと見られる。 1926年1月6日付の『朝鮮新聞(5面)』に掲載された謹賀新年広告文に現れた蔡重賢の肩書は、金融組合長と南鮮貿易株式会社長だった。 金融業と貿易業に従事していたことが分かる。 蔡重鉉はまた、宝城郡と筏橋邑の発展のための公共事業を発起したり参加した。 1924年9月21日の『時代日報(4面)』と10月5日の『每日申報(6面)』によると、蔡重鉉が筏橋のモルヒネ患者救済.. [최승희1931벌교공연] 7. 채중현 벌교극장> 낙성식을 보도한 세 신문의 기사는 공통적으로 이 극장의 설립자가 채중현(蔡重鉉, 1876-1947)이라고 밝혔다. 채중현은 벌교의 “부호, 재산가, 백만장자” 등으로 소개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재산을 가진 사업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일부 기록에 채중현을 ‘만석꾼’이라고 서술된 것을 보면 그가 벌교 지역의 대지주로 가산이 넉넉했음에 틀림없지만 그는 물려받은 재산을 밑천으로 사업에도 수완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1월6일자 조선신문(5면)>에 게재된 근하신년 광고문에 나타난 채중현의 직함은 벌교의 금융조합장과 남선무역주식회사이었다. 금융업과 무역업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채중현은 또 보성군과 벌교읍의 발전을 위한 공공사업을 발기하거나 참여했다. 1924년 9월21일의 시대일보(4.. 이전 1 2 3 4 5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