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490) 썸네일형 리스트형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4-1. 곤도 도미오 선생의 <정홍영 씨와의 일> (이 글은 곤도 도미오 선생이 2020년 5월31일자 에 게재하신 기고문을 번역한 것이다. 은 한국/조선을 연구하는 일본인 중심의 모임인 의 월간 기관지이다.) [이글의 일어 원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7 에 있습니다.] 정홍영 씨와의 일 곤도 도미오 1983년 가을의 어느 날 방과 후에 A중학교 직원연수회가 열렸다. 강사는 정홍영 선생으로 같은 교육구 내에 사시는 재일 코리안 지역사 연구가이다. 그해 여름, 무코 강이 범람해 정홍영 선생이 살던 지역이 거의 전역, 1층의 천장 근처까지 물에 잠겼다. 이 지역은 재일 코리안들이 밀집해 사는 곳이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61년 여름, 무코강 하천 부지에는 공습 이재민이나 생활 곤궁자 등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4-0. 곤도 도미오 선생의 <정홍영 씨와의 일> [이글의 일본어 번역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7에 있습니다.] 2020년 5월31일자 300호에 실린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 제목은 이다. 곤도 도미오 선생이 정홍영 선생과 함께 했던 40년의 세월을 회고한 글이다. 1983년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20년 동안 다카라즈카 지역 재일 조선인 역사를 함께 조사하고 연구했다. 2000년 정홍영 선생이 타계하신 후에는 곤도 선생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를 건립하기까지 또 다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A4 한 장 분량의 기고문에 40년의 추억을 채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곤도 도미오 선생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필체로 그 일을 해내셨다.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 담긴 추억과 감성의 밀도가 워낙 높아서 읽는 이의 마음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3.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 [이글의 일본어 번역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6 에 있습니다.] 2020년 3월26일, 가 제막됐다. 나는 제막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가고 싶기는 했으나, 코로나19의 국제 방역이 까다로워지면서 여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즈음 한일 양국 사이에 발생한 무역 분쟁의 후폭풍이 겹쳐서 자유로웠던 한국인의 일본 여행에도 비자가 필요해졌다. 서울의 일본대사관이 정한 방문비자 발급 조건이 엄격했기 때문에 당분간 일본 여행은 불가능해졌다. 그 때문에 가 중단되었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1년 반 동안 수집해온 자료가 방대하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정리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히려 쉬는 시간이 생긴 셈이어서 속도조절을 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2. 무용신 캠페인과 조선인 추도비 [이글의 일본어 번역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5에 있습니다.-jc-] 2019년 11월,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고 나는 조선학교 무용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무용부를 운영하는 조선학교가 얼마나 되는지, 무용부 학생들은 몇 명이나 되는지, 어떻게 연습하고 훈련받는지, 작품은 어떻게 창작되고 공연되는지, 등등이 모두 궁금했다. 오사카에 머물렀던 5일 동안 정세화 선생은 내 의문의 상당부분을 풀어주셨다. 정세화 선생도 내 최승희 연구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으셨는데, 그동안의 국내 조사와 유럽 조사, 그리고 그때까지의 일본 조사에서 드러난 사실을 성심껏 말씀드렸다. 그러다가 우리는 의기투합했고 약속을 하나 했다. 서로 돕자는 약속이었다. 정세화 선생은 나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 정세화 선생을 만나다 [이글의 일본어 번역본은 https://jc-saishoki.tistory.com/4에 있습니다.] 내가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寶塚)에 묻힌 다섯 명의 조선인 노동자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2019년 11월초 오사카에서였다. 효고현 이타미(伊丹) 시에 거주하시는 재일동포 사진가 정세화 선생으로부터였다. 1910년대와 20년대에 있었던 이 지역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도하는 비석이 세워진다는 말씀을 처음 들은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추도비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재일 조선인 위령비나 추도비에 대한 선지식도 별로 없었을 때였고, 무엇보다 당시 나는 무용가 최승희 선생에게 푹 빠져서 그가 1930년대 일본 각지에서 가졌던 조선무용 공연을 조사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 [춘천1931공연] 15. 춘천공회당의 위치 1931년 2월21일의 최승희 춘천공연이 열린 곳은 이었다. 모든 신문기사들이 그렇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 공회당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마치 ‘뭐, 그런 걸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을까? 춘천에 오면 그게 어딘지 다 알텐데...’하는 투이다. 옛날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80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지금은 춘천공회당의 건물이 사라진 것은 물론, 그것이 있었던 위치에 대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이런저런 기록이 있었겠지만 일본의 패퇴 이후 벌어진 한국전쟁 통에 춘천은 쑥대밭이 되어버렸고, 과거에 대한 기록들이 대부분 불타버렸던 것이다. 1929년 12월18일의 에 따르면 춘천공회당이 완성되고 낙성식을 가진 것은 1929년 12월15일.. 【春川1931公演】 14. 崔承喜舞踊團 1931年2月21日の春川公演に参加した崔承喜舞踊団員は何人ぐらいになっただろうか。 公演プログラムも発見されておらず、各新聞もこれを報道していないため、確認する方法はないが、レパートリーを把握すれば、逆に推論することはできる。 1931年2月26日の『毎日申報』と2月9日の『東亜日報』が明らかにした春川公演(2/21)と釜山公演(2/17-18)のレパートリーを総合すると、春川公演の発表作品は1931年1月10-12日の団成社公演で発表された14作品と一致するものと推定される。 ここに春川公演の初演作品として「エレジーの独舞」が加わり、全部で15作品だった。 その15作品のタイトルと『第3回発表会』で各作品を発表したダンサーを並べると次のようになる。 1部: 1.、2.(崔承喜, 李玉熙, 安貞玉)、3.(張桂星, 安貞玉)、4.(崔承喜)、5.(崔承喜, 研究生數名), 2部: 1.. [춘천1931공연] 14. 최승희 무용단 1931년 2월21일의 춘천 공연에 참가한 최승희 무용단원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공연 프로그램도 발견된 바 없고, 신문들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으니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레퍼토리를 파악된다면 거꾸로 추론해 볼 수는 있다. 1931년 2월26일의 와 2월9일의 가 밝힌 춘천공연(2/21)과 부산공연(2/17-18)의 레퍼토리를 종합해 볼 때 춘천공연의 발표작품은 1931년 1월10-12일의 단성사 공연에서 발표된 14개 작품과 일치할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춘천공연 초연작품으로 가 추가되어 모두 15작품이었다. 그 15개 작품의 제목과 에서 각 작품을 발표한 무용수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부: 1. (최승희, 연구생 일동), 2. (최승희, 이옥희, 안정옥)>, 3. (장계성, 안정옥), 4. (최..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 6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