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490)
【春川1931公演】 13. レパートリー 崔承喜の春川公演のレパートリーは見つからなかった。 公演プログラムもなく、公演を報道した新聞もその日のレパートリーを全体的に報道しなかった。 ただ、1931年2月26日の『毎日申報』がその日の発表作品の内容といくつかの例を次のように報じた。 「舞踊は,,,,,の3部に分けて15種を演舞して... 完全に観衆の全精神をし、あちこち勝手に引きずり回り、思いっきり魅せてしまった」。 この日公演された作品が「3部に分かれて15種」という点は以前の発表会と似ていた。 1930年11月14日、京城公会堂で行われた「京城女子高学生慈善公演」でも3部14作品が発表され、1931年1月10日、團成社の「崔承喜第3回舞踊発表会」の発表曲も3部の14作品だった。 新聞記事に報道されたレパートリーは6作品だけだが、2月9日の『東亜日報』によると、2月17-18日の釜山公演の発表作品の中には「、、、、、など」が..
[춘천1931공연] 13. 레퍼토리 최승희 춘천공연 레퍼토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공연 프로그램도 없고, 공연을 보도한 신문들도 그날의 레퍼토리를 전체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다만 1931년 2월26일의 가 그날 발표작품의 내용과 몇 가지 예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무용은 , , , , , 등 3부로 나누어 15종을 연무하여 ... 완전히 관중의 온 정신을 하여 이리저리 마음대로 줄줄 끌고 다니며 여지없이 매혹하여 버렸었다.” 이날 공연된 작품이 ‘3부로 나뉘어 15종’이라는 점은 이전의 발표회와 유사했다. 1930년 11월14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에서도 3부 14작품이 발표되었고, 1931년 1월10일 단성사의 의 발표곡도 3부의 14작품이었다. 신문 기사에 보도된 레퍼토리는 6개 작품뿐이지만 2월9일의 에 따르면 2월17-18일의 ..
【春川1931公演】 12. 春川公演の報道 1931年2月21日の崔承喜春川公演の主催は、4紙の春川支局連合だった。 『東亜日報』と『朝鮮新聞』、『京城日報』と『毎日申報』だった。 『東亜日報』が含まれたのは意外だ。 他の3紙は日本語新聞か総督府の機関紙だったためだ。 広告文を除けば、春川公演に関する記事は計6つだった。 いずれも春川発の記事で、中央紙の地方版に掲載された。 春川にも独自の新聞があったなら報道がより詳しくなっただろうが、中央紙の春川発記事は概して簡略だっ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これらの記事を通じて、崔承喜の春川公演の面貌を推し量ることができた。 公演終了後の2月26日の『毎日申報』はこの公演について次のように報じた。 「崔承喜さんの新作舞踊公演会は11日夕方、春川公会堂で開かれたが、開会定刻の1時間前にすでに四方から集まった観衆によって、そのような大きな公会堂も文字通り立錐の余地なくいっぱいになった。 その後、..
[춘천1931공연] 12. 춘천공연 보도 1931년 2월21일의 최승희 춘천공연 주최는 4개 신문 춘천지국 연합이었다. 와 , 와 였다. 가 포함된 것이 뜻밖이다. 다른 세 신문은 일본어 신문이거나 총독부 기관지였기 때문이다. 광고문을 빼면 춘천공연에 대한 기사는 모두 6개였다. 모두 춘천발 기사로 중앙지의 지방판에 실렸다. 춘천에도 독자적인 신문이 있었다면 보도가 더 자세했겠지만, 중앙지의 춘천발 기사는 대체로 간략했다. 그럼에도 이 기사들을 통해 최승희 춘천공연의 면모를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인 2월26일의 는 이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최승희양 신작무용공연회는 지난 11일 저녁 춘천공회당에서 열렸는데 개회 정각한 시간 전에 벌써 사방에서 운집한 관중으로 인하여 그처럼 큰 공회당도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없이..
【春川1931公演】 11. 江原道長官李圭完 の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は、李鮮吉(イ·ソンギル)と李英一(イ·ヨンイル)の父親で、日本植民地時代に初代江原道長官を務めた李圭完(イ·ギュワン, 1862-1946)が、崔承喜の春川公演をあっ周旋した可能性を主張した。 立証資料が提示されていないため、まだ「仮説」である。 しかし、蓋然性は排除できないため、咸光福記者の仮説を検証する準備が必要だ。 まず、李圭完が崔承喜の春川公演を取り持っていたなら、それは可能なことだっただろう。 当時、春川では、日本人と朝鮮人の中で李圭完ほど影響力のある人がいなかったからだ。 彼は江原道長官(1908-1918年)と咸鏡南道長官(1918-1924年)を歴任した後、62歳で春川に引退したが、依然として全国的に有名人だった。 退任後、李圭完は中枢院参議職などの政務職は断ったが、経済と産業、社会活動は継続した。 彼は東洋拓殖会社顧問(1924-19..
[춘천1931공연] 11. 강원도장관 이규완 의 함광복 기자는 이선길과 이영일의 부친이자 일제하 초대 강원도장관이었던 이규완(李圭完, 1862-1946)이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주선했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입증자료가 제시되지 없으므로 아직은 ‘가설’이다. 하지만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함광복 기자의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 볼 필요는 있다. 우선 이규완이 최승희의 춘천공연을 주선했더라도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춘천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통틀어 이규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원도장관(1908-1918년)과 함경남도장관(1918-1924년)을 역임한 후 62세의 나이로 춘천에 은퇴했지만 여전히 전국적 유명 인사였다. 퇴임 후 이규완은 중추원 참의직 등의 정무직은 거절했지만, 경제와 산업, 사회 ..
【春川1931公演】 10. 画家李英一 咸光福(ハム·グァンボク)記者は、崔承喜が「犠牲的譲歩」を押し切って春川公演に踏み切ったのは、「一人の後援者」が彼を待っていたからだと暗示した。その後援者は「彼(=崔承喜)にとって忘れられない恩師…。当時、淑明女學校訓育主任教師で画家の春泉·李英一(イ·ヨンイル)だという。 これは早くから『月刊太白』1989年4月号に掲載された事実であると注釈もつけている。 『月刊太白』の記事を探そうと努力したが、ソウルの主要図書館(国立中央、国会)には雑誌もなく、春川市立図書館もそれを所蔵していなかった。 そのため、その記事の内容と根拠はもちろん、タイトルと文章の執筆者さえ確認できていない状態だ。 咸光福記者の言葉通り、李英一(1903-194)は「初代江原道長官を務めた李圭完(イ·ギュワン)の三男」で、先述した春川の江原道警察局所属の柔道選手、李鮮吉の弟だった。 李英一氏は画家で淑明女学校の教員と..
[춘천1931공연] 10. 화가 이영일 함광복 기자는 최승희가 ‘희생적 양보’를 무릅쓰고 춘천 공연을 단행한 것은 “한 사람의 후원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암시했다. 그 후원자는 “그(=최승희)에게 잊을 수 없는 은사 ... 당시 숙명여고 훈육주임교사이자 화가 춘천(春泉) 이영일(李英一)”이라고 했다. 이는 일찍이 1989년 4월호가 밝혀 놓은 사실이라고 주석도 달았다. 의 기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서울의 주요도서관(국립중앙, 국회)에는 그 잡지가 없었고, 춘천의 시립도서관도 이를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 기사의 내용과 근거는 물론 제목과 글쓴이조차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다. 함광복 기자의 말대로 이영일(李英一, 1903-194)은 “초대 강원도장관을 지낸 이규완(李圭完)의 3남”이었고, 앞서 서술한 춘천의 강원도 경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