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1)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처음 기획되었을 때 첫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질문 2) 목적지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유럽으로 변경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질문 3) 세계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가 최종적으로 미국으로 결정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최승희는 1938년 1월 5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세계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였다. 그러나 이것은 최승희의 원래 계획이 아니었다. 그녀는 유럽 순회공연을 먼저 기획했고, 유럽 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계획은 마지막 순간에 바뀌었다.
1935년 10월 19일 자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2면)이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을 처음 보도했을 때는 목적지가 명시되지 않았다. “세계를 춤추며 돌”기 위해 “일본에서 출발할 것”이라고만 보도했다.
이는 <도쿄니치니치신문>의 기사를 전송받아 보도한 하와이와 시애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의 일본계 신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와이호치(ハワイ報知)신문>(2면)과 <다이호쿠(大北)일보>(1면), <니치베이(日米)신문>(3면)과 <신세카이아사히(新世界朝日)신문>(3면)은 모두 “세계 무용 순회공연(世界舞踊行脚)”이라고 보도했을 뿐, 구체적인 목적지를 명시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을 최초로 보도한 1935년 10월 22일 자 <동아일보>(3면)도 “세계적 무대”라든가 “세계 일주”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다. 미주의 조선인 신문인 <신한민보>(1935년 11월 21일, 3면)도 구체적인 목적지를 명시하지 않았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의 목적지를 처음으로 명시한 신문은 뜻밖에도 일본 시코쿠(四國)의 우와지마(宇和島)에서 발행되던 지방신문 <난요지지(南豫時事)>(1935년 11월 25일, 2면)였다. 이 기사는 제목부터 “내년에는 구주(歐洲)로”였고, 기사 내용 중에도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유럽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라는 최승희의 발언을 인용했다.

이 발언은 우와지마 공연(11월 23일)을 마친 최승희가 11월 24일 작별 인사를 위해 <난요지지> 신문사를 방문했을 때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의 잡지 <삼천리>(1935년 12월호, 81쪽과 85쪽)도 최승희가 오빠 최승일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저는 명년 봄에 바라고 바라던 지구의 동편에서 동편으로 일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후원이라고는 철도성 관광국뿐입니다. 물론 물질적 후원자는 없습니다. 저는 가방 하나를 손에 들고 동양의 리듬을 몸에 지니고서 지구를 한 바퀴 돌 작정이올시다.” (85쪽)
“내가 일찍부터 이상하고 바라왔던 ‘세계 무대’에로의 나설 기회를 얻게 되어서 나의 가슴은 무한이 뛰놀며 퍽 흥분과 기대 가운데서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나는 이 기회에 널리 세계 무대에 조선무용의 민속(民俗)무용으로서의 양식화를 세계인에게 보여주겠습니다.” (81쪽)
최승희의 이 발언에는 첫 목적지가 유럽인지 미국인지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최승일은 <삼천리>에 보낼 기고문을 작성하면서 제목을 “런던, 파리로 가는 무희 최승희”라고 붙였다. 즉,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이 유럽에서 시작된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애초 1936년 4-5월경에 출발하려고 했으나 그해가 다 지나가도록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1936년 12월호 <삼천리>(23쪽)는 “최승희 여사의 양행(洋行)은 아마 내년 봄(明春) 경이 되리라”라고 예측했다. 이 예측에도 확실성이 담겨있지 않았다. 세계 순회공연이 계속 미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출발 시기가 ‘내년(1937년) 봄’이라는 이 예측은 1936년 12월 10일 자 <경성일보>(7면)에 의해 재확인되기는 했다. <경성일보>의 도쿄지사가 전송한 이 기사는 최승희의 ‘양행’이 유럽에서 시작될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지명들을 열거했다.
“오랫동안 해외 순방의 소식을 전해오던 도쿄 무용계의 밝은 별, 최승희 씨는 그 후 외국의 본격 무대에서 상연할 레퍼토리를 연구하며 고심해 왔는데, 이번에 안무한 30여 종에 달하는 독창 작품에 자신감을 얻었기에 내년 이른 봄에 여권 발급을 신청하고, 6월에 파리를 시작으로 독일,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 서구 여러 나라를 순회 공연하기로 했다.”
이 기사에는 최승희의 순회공연 목적지로 유럽과 미국이 모두 거론됐지만, “파리를 시작으로” 한다는 서술로 미루어 첫 목적지가 유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는 또 최승희가 자신감 부족으로 세계 순회공연 출발을 주저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자신감을 얻었으므로 1937년 6월에는 유럽으로 출발할 것이라고 전했다. 다음은 이 기사에 포함된 최승희의 발언이다.
“오래전부터 더 일찍 떠나려고 했지만, 현지 서양에서 본격적인 무대를 밟게 되니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져서 미루었지만, 결국 자신감이 생겨서 가기로 했습니다. 사실은 내년 봄 초에 일찍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4월 말까지 각지의 고별 공연이 확정되어 있어서 결국 6월에 가기로 했습니다. ... 해외여행은 최소한 3년 정도로 계획하고 있으며, 그 기간 가능한 한 많은 수확을 얻어 일본의 명예를 손상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경성일보>의 이 기사는 조선어로 번역되어 다음날인 1936년 12월 11일의 <매일신보>(10면)에도 실렸다. 몇 군데 표현상의 차이가 있지만, 기사의 구성과 내용은 거의 같았다. 즉 <경성일보>와 마찬가지로 <매일신보>도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가 미국이 아니라 유럽이었음을 보도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자, 상황이 또 달라졌다. 1937년 1월 27일 자 <경성일보>(7면)는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가 미국으로 바뀌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반도가 낳은 무희 최승희 씨의 세계 무대 진출이 작년부터 홍보되고 있었지만, 이번에 드디어 미국 도쿄 대사관과 다카라즈카 극장의 지배인 하타 토요키치(秦豊吉) 씨의 주선으로, 미국의 뮤직 매니저와 15만 달러의 정식 계약이 체결되었고, 약 반년 정도의 일정으로 전 미국을 돌면서 그 매혹적인 모습을 양키 무대에 드러내 동양 예술의 진수를 가지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최승희는 가까운 시기에 미국으로 출발하게 되는데, 고향을 떠나기 전에 그녀는 2월 20-21일의 양일간 경성 부민관에서 고별 공연회를 열 예정이다.”
즉, 1937년 1월 최승희의 순회공연 목적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뀌었고, 이는 주일 미국 대사관과 다카라즈카 극장의 주선으로 미국 공연 계약이 성사되었기 때문이었다.
애초 최승희는 자비로 순회공연을 진행하려고 기획했다. 일본 철도성 관광국이 지원 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최승희는 자비 공연을 고집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 예술과 공연의 자율성이 해쳐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업과의 계약은 다른 문제였다. 만일 6개월의 미국 공연으로 15만 달러의 수입을 얻을 수 있다면, 이후의 유럽 공연도 재정적 압박 없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 터였다.
제미나이(Gemini)에 따르면 1937년경의 미화 15만 달러는 오늘날(2026년)의 약 350만 달러, 한국 돈으로 거의 55억 원에 달한다. 최승희는 애초 3년간의 해외 순회공연에 필요한 경비를 약 3만 달러로 예상했고, 이를 자비로 충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자기 돈을 쓰지 않고도 순회공연 초기에 그 3배에 달하는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1937년 6월경에 취소됐다. 1937년 6월 15일 자 <동아일보>(7면)는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면서, 최승희의 미국 공연 계획이 중지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기자: 분주하신 데 미안하지만, 최승희 씨에 관한 것을 좀 알려고 왔습니다. 최승희 씨의 미국 가시는 것은 머지않아(不遠間) 실현됩니까?
“최승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중지하였습니다. 본래 동경에 있는 미국 대사관원과 하타 토요키치 씨의 알선으로 거의 결정이 되었었으나, 나중에 알아보니까 최승희의 개인 공연이 아니라 여러 가지 공연 중에 끼인 한 가지 쇼에 불과하여서, 그러면야 갈 것이 없다고 중지했지요. 그 전에 이시이 바쿠 씨도 미국에서 그런 청이 있었지만 거절한 일이 있다더군요.”
최승일은 동생 최승희의 마음도 바뀌었다고 전했다. 즉 “미국의 무용은 본격적인 무용이 아니라 ‘레뷰’가 유행하니까, 미국에 가서는 무용을 연구하기가 어렵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는 “먼저 파리와 베를린에 가서 2-3년간 무용 연구를 한 후에 미국으로 갈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레뷰’란 예술무용이 아니라 오락 무용에 가까운 무용 공연을 가리키는 당시의 용어이다.
이에 기자가 “언제 떠나시게 되느냐”고 묻자, 최승일은 “도쿄에서 11월이나 12월에 고별 무용회를 하고 떠날 것”이며 “첫 목적지는 프랑스의 파리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과연 최승일의 발언대로 1937년 11월 21일 자 <동아일보>(3면)는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 출발 날짜와 첫 목적지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 기사는 1937년 11월 20일 자 <오사카아사히신문>의 기사를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국제무대에의 데뷔를 목적으로 <대금강산보(大金剛山の譜)>라는 영화를 예정대로 완성한 최승희 씨는 무거운 짐을 벗어 가뿐한 몸으로 19일 어머님을 모시고 부산 부두를 떠났다. 조선 사회는 (최승희) 씨와 함께 희망에 넘치는 국제 진출의 날을 기다려 오던 바 마침내 내달(=12월) 19일 요코하마(橫濱)에서 출범하는 카시마마루(鹿島丸)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의 여정은 먼저 영국 수도 런던에서 첫 기염을 올리고, 그다음은 독일, 이탈리아를 돌아 아메리카로 발을 돌리리라 한다.”

따라서 1937년 6월 미국행을 포기한 이후 11월 중순까지도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첫 목적지가 유럽으로 확정되어 있었다. 유럽행 여객선이 언급되었고, 출발 날짜도 12월 19일로 공개되었을뿐 아니라, 유럽 첫 공연은 런던에서 개최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출발 날짜가 한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이 계획은 확정적인 것처럼 보였다. (jc, 2026/7/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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