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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 100장면] 3. 비상 상황

(질문 1) 1938년 말 일본이 처한 비상 상황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질문 2) 당시 일본의 비상 상황에도 불구하고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떠난 까닭은 무엇일까? (질문 3)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은 일본의 비상 상황을 피해 가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은 아닐까?

 

 

193816일 자 <하와이 호치(The Hawaii Hochi, ハワイ報知)> 신문(3)에 따르면 최승희는 일본은 현재 비상 상황이며 연예계는 큰 타격을 받고 있지만 도쿄는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가 말한 비상 상황이란 어떤 상황을 가리켰던 말이었을까?

 

전쟁 때문이었다.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약 반년 전인 193777, 일본은 중국 침략을 시작했다. 중일 전쟁(1937-1945)이다. 유럽사에서는 히틀러의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91일을 제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라고 서술하곤 하지만, 그것은 유럽 편향의 시각이다. 2차 대전은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시작됐다.

 

그보다 더 이르게 설정하는 주장도 있다. 중국 내전(1927-1949)을 틈타서 1931918일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것이 2차대전의 시발점이라는 주장이다. 어느 경우이든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한 나라는 아시아의 국제관계를 폭력적으로 흐트러뜨린 일본제국이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중일전쟁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만주사변에 비해 훨씬 크고 나빴다.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은 일본이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일본 군부는 물론 일본 시민도 이를 비상 상황이라고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일전쟁은 달랐다. 루거우차오(盧溝橋, 노구교) 사건이라는 우발적인 사건이 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은 호시탐탐 중국 침략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일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1884-1948)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일본이 (중국에) 친선을 구하는 것은 배일(排日)”이며 차라리 일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중일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이 빠르게 중국을 점령해 나갔고 19371213일 중국의 수도 난징을 함락했다. 개전 6개월 만이었다. 중국 침략 일본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1878-1948)는 보란 듯이 난징 시가를 행진했지만, 일본군의 난관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첫째, 난징 대학살이 알려지면서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됐다.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기까지 벌였던 무자비한 살육과 난징을 점령한 이후에 30만 명 이상의 중국인을 학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시민의 반일 감정이 치솟았고, 미국 정부는 대일 무역을 중단했다. 이 조치는 석유와 철강 등 전쟁 물자의 수입을 미국에 의존했던 일제 군부에 큰 타격이었다.

 

 

둘째, 난징 점령 이후 중국군이 항복하지 않고 국지전과 지구전으로 항전을 이어 나가자, 일본군은 전쟁 물자 보급에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일본 본국뿐 아니라 만주와 조선, 대만 등의 식민지에서도 전쟁 물자 수탈이 시작됐고, 석유와 철강과 고무 등의 전략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군은 동남아시아를 침공하는, 이른바 남방 작전을 개시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선 확대는 일제의 전쟁 수행 능력을 더 압박했다.

 

셋째, 50만 명에 달하는 중국 주둔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해 본토와 식민지의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문화예술 활동을 위축시켰다. 커피를 마시고 재즈 음악을 즐기는 행위까지 퇴폐적인 이적 행위로 비판되었고, 문화예술인들은 일반 공연을 제한당하는 한편, 중국 주둔 일본군의 위문 공연을 위해 체계적, 대대적으로 조직되었다.

 

 

최승희가 일본은 현재 비상 상황이라고 한 것은 위의 둘째 상황 때문이고, “연예계가 큰 타격을 받고 있다라고 말한 것은 세 번째 상황 때문이었다. 그런데 과연 도쿄는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었을까?

 

중일전쟁 발발 이후 문화예술인들의 공연은 군부의 허가 사항으로 바뀌었고, 군부는 문화예술인들이 중국 주둔 일본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도록 권고, 혹은 지시했다. 예술인들이 위문 공연에 협조하는 정도에 따라 일반 공연을 허가받는 일이 정착되면서 나름 공연계에 새로운 질서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점차 안정을 회복 중이라고 발언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함께 일제 당국은 국제적 반일 감정과 교역 중단을 완화하려는 방편으로 문화예술인들을 문화사절로 해외에 파견했는데, 이것이 문화예술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

 

 

한편, 최승희는 세계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로 유럽을 예정했지만, 출발 2달 전인 193710월 중순 이후에 미국으로 변경했는데, 이는 위의 첫 번째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에 일본 당국은 대규모의 문화예술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했는데, 1938년 최승희의 미국 공연과 1939년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의 미국 공연은 일본 당국의 권고 혹은 지시 사항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7월 이후의 일본은 확실히 비상 상황이었고, 그 영향은 일본인과 식민지의 시민들의 일상생활뿐 아니라 문화예술인들의 공연 활동에 타격이 되었다.

 

 

도쿄는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라는 최승희의 발언은 실제 상황과는 다른 언론용 백색 거짓말이었기 쉬울 것이다. 혹은 군부가 문화예술 공연을 허가제로 바꾸면서 군관이 주도하는 새로운 공연 질서가 잡혀가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jc, 2025/11/27; 2026/3/27) 조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