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1) 최승희는 숙명 여학교에서 몇 년 동안 공부했을까? (질문 2) 숙명 여학교는 세계에 널리 알려진 최초의 조선 여학교였던 것이 아닐까? (질문 3) 1920년대 조선에서 숙명 여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최승희는 1922년 4월 15일 숙명 여학교에 입학, 1926년 3월 23일에 졸업했다. 당시의 정식 이름은 숙명 여자고등보통학교(=숙명여고보)였고, 최승희는 숙명여고보의 17회 졸업생이었다.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기 전에는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숙명여자보통학교(=숙명보교)에 수학했으므로 최승희는 숙명 여학교에서 8년간 수학했다.
숙명 여학교는 조선의 신교육 기관이었고, 최승희가 이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최승일의 배제 고등보통학교, 최영희가 진명여학교, 최승오의 경성사범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부친 최준현은 4명의 자식에게 모두 신교육을 받도록 했다.
최승희와 형제들이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우는 대신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 학교에 입학한 것은 특권적인 일이었다. 특히 최영희와 최승희가 진명 여학교와 숙명 여학교에 진학했던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즉, 딸들에게도 조선 최고급 신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부친 최준현이 재산이 충분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사회 정세를 읽었던 그의 선각적 인식 때문이었다.

필자는 2017년 5월 유럽 취재 중에 파리 오페라하우스 박물관에서 최승희의 파리 공연 팸플릿을 발견했다. 공연 후 약 80년 만에 재발견된 이 팸플릿은 그녀의 첫 유럽 공연의 레퍼토리를 알려주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발견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팸플릿에는 최승희가 조선의 귀족(=양반) 가문 출신이자 숙명 여학교 졸업생이라고 소개되었다. 이러한 소개는 브뤼셀과 암스테르담 공연과 마르세유와 칸 공연, 그리고 뒤스부르크의 독일 공연 때에도 반복되었고, 미국과 남미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승희 덕분에 조선의 이름과 함께 숙명여학교의 이름이 남, 북미주와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세계 순회공연 기간(1938-1940)에 최승희가 공연하는 곳마다 그녀의 모교(alma mater)로 숙명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숙명 여학교는 세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최초의 조선 학교가 되었다.
다만 ‘숙명(淑明)’이라는 이름이 한국어 발음이 아니라 일본식 한자 발음 ‘슈쿠메이’로 알려졌던 것이 아쉬운 점이다. 이는 ‘최승희’라는 조선어 이름이 ‘사이 쇼키’라는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알려진 것과 같았다.

조선의 사정을 잘 몰랐을 유럽과 남, 북미주의 관객들에게 ‘숙명 졸업생’이라는 표현은 마치 빈 음악학교나 줄리아드의 졸업생이라는 학력으로 보였을 것이다. 당시 중등 교육기관에 불과했던 숙명 여학교가 대학교 이상의 전문 음악학교, 혹은 예술학교처럼 들렸다면 이는 확실히 과장된 면이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조선에서 숙명 여학교를 졸업한 것은 오늘날 뉴욕에서 맨해튼 음악학교나 파리에서 고등음악무용원을 졸업한 것보다 특별한 일이었다.
요즘은 한국인의 91.3%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7.8%가 대학 교육을 받고 있지만, 1920년대에는 사정이 달랐다. 최승희가 숙명 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던 1918년에는 조선 아동의 보통학교 취학률이 3%였다. 취학연령(8세)에 도달한 남녀 아동 2백70만 명 중에서 보통학교에 입학한 학생 수가 전국적으로 8만 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여학생은 남학생의 5분의 1에 불과했으므로 여학생의 취학률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같은 연령대의 여아가 보통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1백 명 중에서 1명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고등보통학교(=고보) 취학률은 훨씬 더 낮았다. 조선총독부의 1921년 교육통계를 보면 같은 연령대의 조선인 인구 1만 명 중에서 고보에 입학한 학생은 6명에 불과했다. 취학률이 0.06%였다. 이는 절대적으로도 미미한 비율이지만, 일본인의 경우 1만 명당 185명(1.9%)에 비하면 3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고등’ 교육기관이었던 전문학교와 대학교의 진학률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10만 명당 3명(0.003%)의 비율이었다. 지금의 한국인 고등교육비율이 67%인 것에 비하면 이는 극히 특권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전문학교/대학교를 졸업하기는커녕 중퇴하거나 그 문턱에만 다가섰더라도 사회의 지도층 인사가 되기에 충분했다.
1920년대에 4년제 보통학교와 4년제 고등보통학교의 수학 연한은 오늘날의 중학교 2학년 학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고등보통학교만 졸업하더라도 오늘날의 대학원 이상의 학력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등보통학교 졸업자의 수가 워낙 적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 숙명 여학교를 졸업한 것은, 단순한 수학 연한으로 보면 오늘날의 ‘중등교육’ 정도에 해당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최고의 고등교육’이었던 것이다. (jc, 2026/1/19)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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