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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100장면

[최승희 100장면] 16. 신로심불로

최승희의 조선무용 작품 <에헤야 노아라(1933)>는 출세작이자 최인기작이다. 이 작품은 중년의 조선인 남성이 술에 취하고 흥에 겨워서 경쾌하고 익살맞게 추는 춤이다. 세계 순회공연에서 최승희는 주인공을 청년으로 바꾸어서 <한량춤(1938)>으로 개작, 1938122일의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초연했다.

 

<에헤야 노아라>의 주인공을 노년의 남성으로 바꾸어 재창작된 작품도 있다. 193818일의 <오클랜드 트리뷴(Oakland Tribune, 4)>은 샌프란시스코 공연의 프로그램을 미리 발표했는데, 여기에 <경성의 끽연자(Seoul Pipe Smoker)>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클랜드 트리뷴>의 기사는 샌프란시스코 공연의 연목을 (1) 코믹 작품(comedy numbers), (2) 이국적 작품(exotic group), (3) 고대의 전무(ancient war dances)의 세 부류로 나누었는데, <경성의 끽연자>는 코믹 작품으로 분류됐다. 이 작품은 노인이 장죽으로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청년처럼 맹렬하게 춤을 추다가 이내 지쳐서 주저앉아 다시 담배를 피우면서 늙은 것을 한탄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공연 당일(1938122)의 프로그램에는 <한량춤>은 수록되었으나 <에헤야 노아라><경성의 끽연자>는 제외되었다. 아마도 노년판인 <경성의 끽연자>가 안무 혹은 연습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성의 끽연자>1938116일의 뉴욕 2차 공연에서 초연됐다. 이때는 이 작품이 다른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117일의 <뉴욕타임스><늙은 몽상가(Aged Dreamer)>, 같은 날짜의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Brooklyn Daily Eagle)><젊은 날의 꿈(Dream of Youth)>이라고 소개했다.

 

미국 공연에서 뒤늦게 초연된 <경성의 끽연자> 혹은 <젊은 날의 꿈>이 유럽 순회공연에서는 활발하게 상연됐다. 1939131일의 파리 공연에서 상연될 때는 제목이 <젊은 날의 꿈(Rêve de sa jeunesse)>이었고, “조선의 노인이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다가 갑자기 청년처럼 춤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야위고 힘없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실망하고 다시 노인으로 되돌아온다.”라고 해설되었다. 이후 <젊은 날의 꿈>은 브뤼셀과 안트베르펜, 암스테르담과 덴하크, 칸과 마르세유, 뒤스부르크 공연에서 빠짐없이 발표됐다.

 

한편, 이 작품이 더 이른 시기에 발표된 적이 있었는지 조사했지만, 세계 순회공연 전에는 그런 제목으로 상연된 작품이 없었다. 19379월에 도쿄극장에서 열린 마지막 고별 공연에서는 총 23개 작품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에헤야 노아라>가 포함됐지만, <경성의 끽연자><젊은 날의 꿈>, <한량무>는 없었다.

 

최승희는 마지막 도쿄 고별 공연 이후에야 중년판 <에헤야 노아라>를 청년판 <한량춤>과 노년판 <경성의 끽연자> 혹은 <젊은 날의 꿈>로 분리해 다시 안무한 것으로 판단된다. 먼저 완성된 청년판 <한량춤>19381월의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초연되었고, 완성이 늦었던 노인판은 193811월의 뉴욕 공연부터 상연되기 시작했다. <에헤야 노아라><한량춤>과는 달리 <젊은 날의 꿈>을 상연할 때는 최승희가 가면을 사용했는데, 아마도 젊은 여성 얼굴로 노인의 얼굴을 표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최승희는 19373월 말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를 위로하는 특별 공연에서 이 작품을 초연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때의 제목은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1937)>였다. 창덕궁 인정전 서행각 앞에 설치된 가설무대에서 열린 이 공연에서 최승희는 이 작품을 독무로 발표했고, 반주 음악은 고곡(古曲)’이라고만 기록되었다. ‘신로심불로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경성의 끽연자>, <노인 몽상가>, <젊은 날의 꿈>과 같은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최승희가 193010월의 단성사 공연에서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던 사실이 발견된다. “청춘이 길고 늙지 않는 노래라는 뜻이다. 이 작품의 반주곡은 <장춘불로지곡>인데, 이는 고려시대에 당나라에서 수입된 기악+성악곡인 <보허자(步虛子)>의 다른 이름이다. 최승희는 이 음악을 반주로 <장춘불로지곡(193010)>을 안무한 것인데, 이 작품은 <영산무(19302)>에 뒤이은 그녀의 두 번째 조선무용 작품이다.

 

<신로심불로>의 반주 음악은 고곡(古曲)’ 또는 '아악(雅樂)'이라고만 밝혀져 있었는데, 이 고곡/아악은 <장춘불로지곡>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제가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춘불로지곡(1930)><신로심불로(1937)>로 이어졌다가 뉴욕 공연에서 <경성의 끽연자(1938)>, 파리 공연에서 <젊은 날의 꿈(1939)>으로 상연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춘불로지곡><신로심불로>의 사이에는 약 7년의 시간 간격이 있기 때문에 그 두 작품이 같은 작품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로심불로(1937)><젊은 날의 꿈(1938)> 사이의 시간 간격은 1년 이내이기 때문에 이는 같은 작품의 다른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경성 초연 때의 제목대로 <신로심불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최승희의 북한 시기 작품 <풍랑을 헤가르고(1949)> (출처: 정수웅, <최승희>, 2004년, 247쪽)

 

끝으로, 정수웅의 평전 겸 사진집 <최승희(2004)>247쪽에는 최승희의 북한 시기의 작품 <풍랑을 헤가르고(1949)>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이 작품의 의상은 <신로심불로(1938)>와 유사하다. 작품의 주인공이 가면을 쓰고 긴 수염을 달고, 기다란 밝은 색 도포를 입고 가슴에 띠를 두른 것은 완전히 같지만, 머리에 쓴 것이 갓과 두건이라는 점만 다르다.

 

따라서 최승희의 <신로심불로>1930년의 <장춘불로지곡>에서 1949년의 <풍랑을 헤가르고>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20년 동안 개작을 거듭하면서 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25/12/29; 2026/4/10) 조정희